김의석의 독립장편 데뷔작 <죄 많은 소녀>를 뒤늦게아이피(IP) TV로 봤다. 화면의 밀도가 아주 높았는데 그만큼 고도의 집중을 요구해 관람이 힘들었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들의 고통, 죄의식, 증오를 다루는 영화이고 그들을 이해할 순 있지만 좋아하긴 힘들었기 때문에 관람 도중 치르는 기운 소모가 만만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요즘 한국영화의 특정 경향이 된 피해자 서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상업영화들은 피해자 의식을 대개 가족주의에 기대어 동일화를 유도하고 우리를 울게 한 뒤에 이 정도면 이제 그만 슬퍼해도 되지 않나요, 라고 회유한다. 말 못하는 어머니에게 말하는 기적을 행하게 한 <신과 함께-죄와 벌>이나 전쟁 피난길에 헤어진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국제시장>이 대표적이다. 죽도록 고생한 부모 세대를 인정하고 그 세대로부터 우리도 열심히 했으니 알아주세요, 라고 한 다음 서로 붙잡고 꺼이꺼이 우는 것과 같다.
그에 반해 젊은 감독들이 만든 독립영화에선 이런 가족주의로의 퇴행을 솔직하지 못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화해와 카타르시스의 대단원을 끝내 유보하는 대신 등장인물들이 겪는 고통을 할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지켜보는 서사 전략을 택하는 경우가 많은데 <죄 많은 소녀>가 대표적이다. 한 아이가 죽은 후 가족을 비롯한 그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다룬다는 점에서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살아남은 아이>와 유사한 지점이 있지만 <살아남은 아이>의 주인공들이 기본적으로 지켜가고자 하는 선의가 <죄 많은 소녀>에는 아예 없다. 전여빈이 뛰어난 존재감을 보여준 주인공 영희는 친구 경민이 자살하도록 부추겼다는 혐의를 받고 죄책감과 고통에 시달리며, 경민의 어머니는 경민을 잘 보살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집요하게 영희에게 책임을 추궁하려 한다. 영희의 애정을 누가 더 받는가를 두고 경민과 경쟁관계에 있던 친구 한솔은 영희에게 불리한 진술을 형사들에게 하고 영희의 같은 반 동료들은 영희를 집단 린치 하다가 영희가 자살 시도를 한 후에는 영희에게 잘해주기 위해 표 나는 행동을 하려고 열심이다.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도덕적 책임 전가를 위한 수건돌리기에 직, 간접으로 동참한다. 위로부터의 억압과 내면의 혼란을 동시에 겪으며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간극을 메우지 못해 괴로워하는 사춘기의 통과의례는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극단적 상황으로 귀결되고 남겨진 사람들은 그 책임을 누군가에게 지우기 위해 날이 서 있다. 혹여 그 책임이 자신에게 귀속될 가능성이 있을 때 해당 당사자는 자해로 도덕적 결백을 입증하려 한다. 영화의 결말에 엄마의 책임을 간접적으로 추궁하는 영희와 한솔 앞에서 경민의 엄마는 칼로 자해를 하는데 나는 이 장면이 비극의 원인을 합리적으로 수습하지 못한 채 도덕적 명분 전쟁으로만 치달은 끝에 누군가의 파멸을 목도해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사회의 현재를 축약해 드러내는 것이라고 봤다. 자립하면서 동시에 협조한다는 개인과 공동체의 이상이 처절하게 무너진 사회에서 목도하는 지옥도일 것이다.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