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감독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킬링 디어>의 원제는 <신성한 사슴 죽이기>(더 킬링 오브 어 세이크리드 디어)다. 에우리피데스의 희곡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에서 착상을 얻은 작품이라고 하는데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현실적 개연성과는 거리가 멀고 관객을 불편하게 하고 심지어 막판까지 관객을 졸도하게 만들고 싶은 위악의 산물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치과 의자에 앉아 마취 안 한 상태에서 치아를 뽑는 의사의 손을 보는 고통을 상상하게 하는 이 영화가 불쾌하지 않은 것도 신기하다. 결국 앓던 이를 뽑아낸 것처럼 시원한 느낌마저 준다.
안과 의사인 아내와 14살 딸, 12살 아들 자녀와 함께 남부럽지 않게 잘 사는 외과 의사 스티븐은 남들 모르게 어딘가 유별나 보이며 유체 이탈 상태인 것 같은 16살 소년 마틴을 가끔 만나 선물도 주고 용돈도 주며 잘 대해준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동성 연인인가 추측하려는 즈음 마틴이 수년 전 스티븐이 수술 도중 사망케 한 환자의 아들이라는 게 밝혀진다. 안전하게 거리를 두고 자기 죄의식을 위안 받기 위해 마틴을 만나고 싶은 스티븐의 바램과는 달리 마틴은 점점 스티븐의 일상 공간에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급기야 황당한 제안과 함께 경고를 던진다. 마틴은 자기 아빠가 죽은 것처럼 스티븐의 가족 누군가 한 사람이 죽어야 불행의 균형이 맞는다며 스티븐이 그의 가족 누군가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차례로 몸에 마비가 오고 음식을 먹지 못하며 눈에 피를 흘리면서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다.
<킬링 디어>는 주인공이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이겨내고 진화하는 장르영화의 서사와는 거리가 먼 전개와 결말을 택한다. 신탁에 걸린 것처럼 스티븐과 그의 가족들은 무력하게 마틴의 저주에 갇혀 고통 받는다. 서로 살기 위해 처절한 경쟁을 벌이는 스티븐 가족의 모습에서 인간 존엄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에게 <송곳니>, <랍스터> 등의 영화로 소개된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연출은 전작들보다 훨씬 유장한 호흡으로 이 발암을 유발하는 이야기를 조물주의 시점에서 연출하려는 듯 정교한 거리감을 준 앵글로 관찰하며 관객에게 지극한 심적 고통을 안겨 준다. 죄의식과 속죄에 관한 영화이지만 그게 제 삼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닥칠 수도 있는 고통일 수 있다는 걸 이 영화는 예리하게 상기시킨다. 현실감 없는 우화의 형태로 지극히 현실감 있는 인간들의 심리상태를 그려낸다는 게 천재적이다.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면 그 고통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인과응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율법을 이처럼 가공할 위력으로 찔러주는 영화도 흔치 않다. 도덕과 명분을 내세워 함부로 누군가를 증오하고 비판하고 공격하는데 익숙한 우리 사회의 에스엔에스(SNS) 풍속이 떠올랐다.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