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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사랑의 갑을관계’ 정확히 포착한…아, 폴 토머스 앤더슨!

등록 2018-04-09 17:42수정 2018-04-09 23:49

[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팬텀 스레드’
영화 <팬텀 스레드>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처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영화 <팬텀 스레드>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처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동시대의 영화감독들 가운데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이는 폴 토머스 앤더슨이다. 이미 타계한 교과서 속의 인물 존 포드나 고희를 넘긴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영화는 감탄하며 보지만 나보다 나이가 어린 폴 토머스 앤더슨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가 던진 화두에 허겁지겁 놀라 답을 궁리하는 난 인생을 헛살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그의 영화들은 대체로 미국의 역사에 대해 특정 가문의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축으로 아메리칸드림을 거스르는 관점으로 성찰하곤 했던 것인데 그렇지 않은 영화일 경우 <펀치 드렁크 러브>와 같은 낭만적인 사랑 영화도 신경증적인 스릴러로 기운을 북돋아 넣는 특이한 스타일을 보여줬다. 최근 개봉했으나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팬텀 스레드>를 보며 나는 역시 폴 토머스 앤더슨이라고 느낌표를 쭉 그어가며 가슴에 생채기를 입었다.

영화 <팬텀 스레드>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처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영화 <팬텀 스레드>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처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남자 예술가와 그의 뮤즈에 관한 이야기나, 사랑에 있어서의 권력관계의 뒤바뀜이라는 소재는 식상하지만 폴 토머스 앤더슨은 이걸 특유의 문법으로 다뤄 비등점 이상으로 화면을 펄펄 끓게 만든다. 1950년대에 왕실과 상류 사교계의 드레스를 만드는 유명 디자이너 레이놀즈 우드콕은 자신의 의상실 사람들의 숨소리까지 지배하는 독재자이자 젊은 여인에게 영감을 구하고 그게 싫증이 나면 차버리는 바람둥이인데 고향에 갔다가 당차고 영리한 알마에게 반해 알마를 의상실로 데리고 온다. 처음엔 늘 그랬듯이 레이놀즈는 알마를 연인으로 대하지만 머지않아 다시 독재자로 변하기 시작한다. 알마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그런 레이놀즈에게 대항했다가 레이놀즈를 길들이려고 시도하는데 알마의 시도는 늘 실패로 끝나지만 나중에는 역전에 성공한다.

영화 <팬텀 스레드>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처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영화 <팬텀 스레드>의 한 장면. 유니버설픽처스인터내셔널코리아 제공
<팬텀 스레드>에서 남녀 주인공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아주 뒤늦게 관계가 너덜너덜해진 다음이다. 설렘과 매혹과 흥분이 지나간 후에 권태와 증오와 애증이 몇 주름 잡히고 나서도 그들은 서로 좀처럼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을 갖지 못한다. 애정의 저울추가 팽팽히 균형을 잡는 시간들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서로 각자 탈진하지 않기 위해 상대를 공격하고 방어한 끝에 마침내 누군가가 쇠약해지고 보살핌을 받은 후 다시 지배하고 쇠약해지는 상황을 반복하는 순환에 접어들 때까지 그들은 지속적으로 투쟁한다. 그들의 투쟁은 각자 갖고 있는 트라우마와 결함의 대체물인데, 상대방의 결함을 알아차리더라도 서로의 몸과 마음을 얻기 위해 싸워야 할 이유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날 가장 오용되고 남용되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팬텀 스레드>처럼 날이 서고 싸늘한 관점으로 정의하는 영화는 본 적이 없다. 영화 후반부에 벌어지는, 사랑을 얻기 위해 여주인공이 꾸미는 계략은 좀 으스스하지만 그걸 감각적으로 완벽하게 전하는 폴 토머스 앤더슨의 화면 연출은 숨이 막힌다. 인물의 시선 하나, 손동작 하나, 걸음걸이까지 눈을 뗄 수 없게 하는 가운데 정확히 필요하다고 느낄 때 배치되는 클로즈업 덕분이다. 요즘은 이런 연출 호흡을 한국 영화에서 전혀 볼 수 없어 유감이다.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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