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공동정범>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김일란과 이혁상이 함께 연출한 <공동정범>은 기대와 달리 흥행에 빨간불이 켜진 모양이다. 두 감독이 독립운동하듯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관객과의 대화를 하고 있는데도 그렇다. 그런 딱한 사정과는 별개로 나는 이 다큐멘터리가 대단한 성취를 이미 거뒀다고 생각한다. <공동정범>은 김일란, 홍지유의 전작 <두 개의 문>의 속편이라 할 수 있는데 접근법은 전혀 다르다. <두 개의 문>은 감옥에 간 용산참사 피해자들의 증언을 들을 수 없는 환경 때문에 국가폭력의 대리자이자 가해자인 경찰을 주인공으로 삼아 용산참사 그날의 비극을 일종의 박력 있는 법정드라마처럼 구성해 진실의 조각들을 모으려는 시도였다.
구속된 피해자들이 풀려나자 김일란, 이혁상은 이 영화 <공동정범>에서 마침내 그 피해자들의 증언을 카메라에 담지만 거기서 진실을 구하려는 시도는 실패한다. 그들의 기억은 서로 일치하지 않고 그들 사이에 고인 불화의 감정들만 드러난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뒤통수를 치는 이 영화만의 인상적인 잔상들이 생긴다. 그들이 각자, 또는 함께 증언하는 장면에서 그날 망루에서 벌어진 상황을 불완전하게 보여주는 이미지들이 나오는데 이것들은 전체 맥락을 유추하게 만드는 조각들이기 때문에 불완전하다. 그 이미지의 조각들을 종합적인 맥락으로 재구성하게 해줄 피해자들의 증언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 <공동정범>의 한 장면. 엣나인필름 제공
극영화도 그렇지만 다큐멘터리는 특히 팩트를 주장하는 이미지를 선한 자들의 고난과 악한 세력을 심판해야 한다는 익숙하지만 진부한 명제를 외치는 도구로 쓸 유혹에 빠지기 쉽다. 김일란과 이혁상은 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에 직면해 사실을 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섣부른 길을 마다하고 그 길목에 걸터앉아 고뇌하면서 진실을 향한 미궁에 빠진 것을 인정하는 대신, 이미지를 증거로 삼지 않은 채 거듭 반복해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이미지와 진술은 순차적으로 조응하는 게 아니라 서로 어긋나며 관객 스스로 질문하게 하고 느끼게 하고 집단 망각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경험을 하게 만든다.
모든 것이 명료하게 보이는 마법의 순간도, 피해자들이 시련을 딛고 또 다른 영웅으로 재생하는 순간도 없지만 이 영화는 기억의 단절과 왜곡, 이미지의 불완전함을 계속 반복함으로써 이 불연속적인 사건의 고리에 관객인 우리가 가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이는 과거에 가려졌던 것이 현재에 밝혀지고 미래에 심판이 기다린다는 직선적 시간관에 편승한 편의주의적 해피 엔딩이라는, 극영화의 조합된 감동과 다른 것이다. 용산참사라는 비극은 아직 종료되지 않았고 현재형이며 그걸 지각하는 순간 우리는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사려 깊은 다큐멘터리는 교차 반복되는 인물들의 증언과 이미지를 통해 웅변한다. 기억은 쉽사리 유실되거나 왜곡되지만 영화감독은 그 기억의 불완전한 대치물인 이미지들을 현재 시간으로 계속 풀어냄으로써 망각에 저항한다. <공동정범>은 그 감동적인 결과물이다.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