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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무기력한 죄책감 넘어 우리 더 독해지자

등록 2017-03-13 14:09수정 2017-03-13 14:30

[김영진의 시네마즉설] ‘눈발’
영화 <눈발> 명필름영화학교 제공
영화 <눈발> 명필름영화학교 제공

필자는 최근 꽤 많은 120여 편의 장편 독립영화들을 몰아서 봤다. 4월 말에 시작하는 전주국제영화제 출품 신청작들이었다. 올해만 그런 건 아닌데 다큐멘터리는 갈수록 다양해지고 수준이 높아지는 반면 극영화 장편은 과도기가 너무 긴 것 아닌가라는 불길한 느낌이 든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집권 기간 동안에 정책적으로 집요하게 독립영화의 숨통을 조인 탓도 크겠지만 다큐멘터리의 약진에 비하면 극영화 쪽은 전반적으로 활기가 없다. 지난해 주목을 받은 <연애담>과 같은 영화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물론 재기가 있고 완성도가 괜찮은 영화들은 꽤 있다. 이런 영화들의 특징은 예산과 시간이 더 주어지면 훨씬 좋았을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저예산으로 찍은 게 불우한, 꼬마 상업영화의 경계에 있다. 완성도는 균질하지 않더라도 살아 있는 잉어의 펄떡거리는 기운이 있는 영화들이 드물다.

얼마 전 개봉한 조재민의 데뷔작 <눈발>을 보며 상대적으로 수일한 완성도와 사회적 고민을 담은 이 영화가 반가웠다. 경남 고성을 무대로 수원에서 내려간 주인공 민식이 새로 다니게 된 고등학교 같은 반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예지에게 진한 우정을 느끼고 그를 도우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를 돕지 못해 죄책감을 느낀다는 게 이 영화의 내용이다. 반듯한 모범생의 영화라고 할까, 소소한 감동을 주는 이 영화는 그 이상의 울림을 남기지 못한다. 명필름 영화학교의 창립작이며 전주 시네마 프로젝트 중 한 작품이었던 이 영화를 여러 번 봤던 필자는 그때마다 그 이유를 곰곰 생각해봤는데 소재와 인물을 다루는 태도가 너무 착해서 소심하게까지 여겨지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영화의 후반부에 예지가 길 잃은 염소를 안고 민식의 아버지가 목사로 있는 교회를 찾아가는 장면이 있다. 교회에선 예배가 진행 중이고 예지는 염소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그 약속을 저버린 민식을 원망하듯 교회 안에 들어가 민식 앞에 선다.

이 장면은 매우 교과서적인 호흡으로 편집돼 있다. 별로 흠잡을 데가 없으나 그것뿐이다. 이를테면 예지가 교회를 향해 걸어갈 때 교회가 우리의 뇌리에 남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예지가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주인공 민식과 그의 아버지가 사랑을 전파하는 교회 사람들조차도 그렇다. 민식은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에 예지를 찾아다니지만 예지는 보이지 않는다. 그때 예지가 안고 다니던 염소가 벌판을 헤매고 다니는 게 눈에 들어온다. 민식은 염소를 꼭 붙잡는다. 영화 제목처럼 고성 벌판에 눈발이 날린다. 희망을 암시하는 결말이라고 해야겠지만 역시 문제는 이미지와 그 이미지의 병렬 방식이다. 절망도 희망도 어떤 묘사의 경계선을 넘어서야 하며 죄책감의 환기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미 이 사회에 무기력한 죄책감이 만연해 있지만 그런 죄책감을 만연하게 한 세력의 사악한 힘은 요령부득으로 세다. 이 글을 쓰기 직전 박근혜가 자택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보며 우리가 너무 착한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을 새삼 되씹는다. 극영화 독립 장편들은 더 독해져야 한다. 영화평론가

※깊이 있는 평론으로 사랑받았던 영화평론가 김영진 명지대 교수의 영화비평 ‘시네마즉설’을 다시 연재합니다. ‘듀나의 영화불평’, ‘권여선의 인간발견’과 함께 3주에 한차례씩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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