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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어쩌면 가장 최선의 거짓말

등록 2016-08-29 14:05수정 2016-08-29 19:16

김종관 감독의 <최악의 하루>
영화 <최악의 하루>는 한 여자가 하루에 세 명의 남자를 만나며 하는 ‘거짓말’을 다루고 있다.  인디스토리 제공
영화 <최악의 하루>는 한 여자가 하루에 세 명의 남자를 만나며 하는 ‘거짓말’을 다루고 있다. 인디스토리 제공
소설에 한 권 분량의 장편만 존재하는 게 아닌 것처럼 영화도 마찬가지다. 단편도 있고 대하소설 분량의 영화도 가능하지만 상업 영화관은 두 시간 내외의 장편영화만 수용한다. 한국에서 그런 편협한 제도의 가장 큰 피해자는 김종관 감독일 것이다. 그는 배우 정유미를 발굴한 6분 분량의 단편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으로 영화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고 이후에도 뛰어난 단편영화들을 꾸준히 만들었으나 아무래도 대중과 만나는 접점은 적었다. 김종관은 영화감독이기 때문에 오 헨리나 레이몬드 카버나 현진건 같은 소설가들이 해낸 것을 할 수 없었다. 그의 장편 데뷔작 <조금만 더 가까이>(2010)는 흥미로운 영화였으나 몇 개의 에피소드로 연결되어 김종관의 작법이 단편을 만드는 연장선상에서 이뤄지는 게 아닌가라는 의구심도 갖게 만들었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상영작이었던 그의 두 번째 장편 <최악의 하루>는 구조의 윤곽이 선명하고 그 안에서 반복과 대구와 차이를 만들어내는 솜씨가 상당하다. 한예리가 연기하는 은희가 하루 동안 세 남자를 만나는 내용의 이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나름의 거짓말들을 한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고 묻게 되는 상황인데 인생이 일종의 연극이고 상대에 따라 바뀌는 역할놀이라는 명제는 익숙한 것이지만 이 영화의 매력은 다른 데 있다. 인생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건 어쩌면 최선의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준비된 태도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다.

은희는 초반 장면에서 일본인 소설가 료헤이를 만나 참신한 시간을 보내는데 소설가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사람이라고 한 료헤이에게 배우는 거짓을 연기하는 직업이라고 응수한다. 말이 씨가 되는 건지 은희는 이후 상황에서 그 자신이 한 말을 실감한다. 남산에서 은희는 현 애인인 탤런트 현오와 전 애인인 이혼남 운철을 번갈아 만나며 상대의 거짓말에 분노하다가도 자신도 거짓말을 하게 되는 기묘한 상황에 처한다. 기가 막힌 우연의 장난 한판에 휘말려든 상황과 대비되는 것이 좋은 날씨와 아름다운 주변 풍경이다. 개별 인간들에게 어긋나는 관계에 따른 소소한 불행은 전 우주의 지각변동만큼 심각하다. 그런데 거리를 두고 보면 그 모든 소동은 반쯤 비극이고 반쯤 희극이며 인간의 모자란 자질과는 상관없이 세상은 그 자체로 완전무결하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의 말미에 료헤이가 일본어로 다음 소설의 해피엔딩을 은희에게 말해줄 때 은희는 그 말을 못 알아들으면서도 감동한 듯 보인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때로 말은 소음이고 대체로 거짓말이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거짓말을 최선을 다해 할 때 말의 성질에 상관없이 우리는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진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시네마즉설’은 이번으로 연재를 끝냅니다. 그간 수고해주신 필자와 사랑해주신 독자분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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