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필자의 마음을 붙잡고 놔주지 않는 영화는 <부산행>이 아니라 2주 전에 개봉한 <데몰리션>이라는 미국 영화다. 뒷북이긴 하지만 별로 사람들이 거론하지 않는 것 같아서 한마디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영화가 다루는 죽음, 이별, 상실을 대하는 태도가 진실하고 아프게 다가와서 쉽사리 뇌리에서 지워낼 수 없고 이 나라의 사악한 기운을 어쩔 수 없이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연출한 캐나다 감독 장마르크 발레는 <댈러스 바이어스 클럽>이나 <와일드> 등의 전작에서도 증명했듯이 할리우드의 유행과는 좀 동떨어진 영화를 만드는데, 온갖 초인적인 영웅들이 나와 세상을 때려 부수는 블록버스터에 비하면 인간들 사이의 소소한 얘기를 다루는데도 보는 사람의 가슴을 떨리게 만든다. 진짜 고통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데몰리션>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영화에 나오는 파괴의 정경을 잊지 못할 것이다.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은 남자 데이비스는 유체이탈된 사람처럼 넋 놓고 모든 상황에 무감하게 지내다가 문득 아내가 말했던 고장 난 냉장고 생각이 난다. 남자는 냉장고 분해에 나선다. 전문가가 아니니 냉장고 고장의 원인을 알아낼 리 없다. 그 앞에는 해체된 냉장고의 잔해만 남는다. 장인이 경영하는 투자회사에서 온갖 기행으로 신뢰를 잃는 것과 동시에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남자의 충동도 심해진다. 이 와중에 남자는 카렌이라는 여자의 전화를 받는다. 남자는 아내가 죽던 날 병원의 자판기가 고장 난 탓에 초콜릿을 먹지 못했고 그걸 항의하는 편지에 자기 심정을 구구절절 적었다. 카렌은 데이비스의 마음을 읽고 전화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카렌은 데이비스의 얘기를 들어주고 데이비스는 카렌의 민감한 사춘기 아들 크리스와 친해져 그의 얘기를 들어준다.
이 대목부터 영화가 재미있어지는데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대로 관계가 구축되지 않는다. 카렌은 정혼한 남자가 있지만 그에 대한 애정은 없는 것 같고 크리스는 애어른처럼 굴지만 스스로 동성애자가 아닌가 곤혹스러워하는 길 잃은 어린양이며 데이비스는 이들과 서로 부족한 부분을 털어놓는 친구가 된다.
요컨대 이들 세 사람은 서로 인간적인 호감이 있지만 대체가족을 꾸릴 만큼 의지가 있는 게 아니다. 데이비스는 그 와중에 크리스와 함께 부지런히 자기 집의 기물을 부순다. 이 육중한 파괴의 구경거리에 영화는 관객의 온 신경을 집중하게 만든다. 필자는 결국 트라우마를 극복한 데이비스의 맑은 표정보다도 주변의 모든 물건을 부수던 때의 데이비스의 확정할 수 없는 표정이 인상 깊었다. 파괴를 통해 재생에 이른다는 건 평범한 명제지만 영화의 화면에 그 명제가 시각적으로 그려질 때 아픔과 안도감과 해방감을 동시에 느꼈다. 사방에 분노와 비야냥이 만연하고 파멸을 향해 대동단결해 달려가는 듯한 이 나라에서 정말 필요한 건 고장 난 냉장고의 실체를 보기 위해 다 부숴버릴 수 있는 체념과 막다른 골목에 이른 용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