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개봉하는 <삼례>의 이현정 감독은 방송 앵커 출신이다. 나는 그를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만났다. 취재차 내려온 그에게 인터뷰 통역을 부탁했는데 흔쾌히 도와줘서 고마웠다. 폴란드의 크쥐쉬토프 자누시와 같은 국제적 명성을 지닌 감독들을 만나면서 그도 적지 않게 흥분하곤 했다. 평소 영화를 좋아하는가 보다 생각했는데 영화제가 끝날 무렵 차 한 잔 하면서 그가 말하길 언젠가는 영화감독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시냐고, 잘 되길 바란다고 의례적인 덕담을 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한 두명 본 것도 아니고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영화감독이 되는 일도 드물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흐른 후 2011년 가을 느닷없이 이현정 감독에게서 메일이 왔다. 방송국을 그만 두고 미국으로 갔으며 귀국해서 모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한다고 소식을 알린 그는 자기가 지금 뭔가를 만들었는데 이게 영화가 될 수 있는지, 영화가 아니면 이것저것 잡다한 재료로 만든 샌드위치 같은 것인지 판단해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첨부한 동영상은 그의 외할머니 장례식을 기록한 사적인 동영상과 외할머니의 집에 찾아가 정갈하게 그 집을 청소하면서 극중 동생과 티격태격하며 싸우는 극화된 부분을 짜깁기해놓은 것이었다.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일차 편집본이었는데 영화의 말미에 눈이 번쩍 뜨이는 장면이 있었다. 이현정 감독이 직접 오스트레일리아에 가서 다른 관광객들이 다 하산한 높은 바위산에 홀로 남아 한복을 입고 자기만의 의식을 치른다. 기이한 굿과 비슷한 퍼포먼스를 하는 이 장면을 보고 나는 이현정 감독에게 이건 영화가 될 수 있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 영화는 그 다음 해 지금은 없어진 시네마 디지털 영화제에 초청됐고 몇 군데 해외 영화제를 돌며 호의적인 평을 얻었다.
영화 <삼례>의 한 장면. a모멘텀엔터테인먼트 제공
필자가 주목했던 것은 기이한 이미지를 채집하는 이현정의 능력이다. 그는 일상적 스토리 묘사에는 관심도, 재능도 없고 대신 일상적 풍경 너머에 숨어 있는 다른 각도의 이미지를 잡아채는 데 능하다. 두 번째 영화 <용문>은 등장인물들이 모두 이상한 방언을 하는 듯 착각을 주는 가운데 귀기가 서린 시골공간을 특이하게 잡아낸 영화였다. 전주 삼례 현지에서 대다수 장면을 촬영한 <삼례>도 마찬가지다. 신작 시나리오 헌팅 차 삼례에 내려온 영화감독이 자기 영화의 뮤즈를 자처하는 젊은 여성을 만나 벌어지는, 별다른 스토리가 없는 이 영화는 상영 시작 20분 가량 지나면 무심코 지나쳤던 삼례라는 곳의 공간적 기운을 홀린 듯이 잡아낸다. 그때까지 이 영화 속 공간에 대한 느낌을 형용사로 표현하자면, ‘이상하고 누추하고 낯선 것’이었는데 동학혁명 때의 유명한 여전사의 환생이라고 추측되는 여주인공의 안내를 따라 주인공이 삼례의 이곳저곳을 순례하고 난 후 관객은 그곳이 강인한 생명력이 축적된 긍정적인 기운으로 가득 찬 곳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아울러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던 여주인공의 측정할 수 없는 슬픔도 알 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주류사회와 영화계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지 모르나 이 사회에서 얼마간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여성들의 상상력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삼례>가 살짝이라도 극장가에서 관심을 얻길 바란다.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