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전 집행위원장은 내겐 큰 형님 같은 분이다. 내가 대학원생이었던 1990년대 초에 그는 사비를 털어 <영화언어>라는 계간지를 발행하고 있었는데 난 말석에서 잡지 실무를 도왔다. 당시 그는 부산 경성대 교수였으며 성실한 학자였다. 변변한 영화이론 서적이 없어 원서로 읽던 시절, 나는 <영화언어>에 실리는 그의 글을 교정보느라 읽고 또 읽으며 공부를 했다. 1994년 대학원을 졸업하고 처음 시간강사 일을 맡게 된 곳도 그가 일하는 경성대였다. 나는 수요일에 내려가 오후 수업을 하고 그와 밤새 술을 마시다 다음날 오전 수업을 하고 귀경하곤 했다. 든든한 물주였던 그가 술과 맛있는 회를 사주니 좋았지만 두세 달이 지나면서부터는 좀 지겨워졌다. 그 때 술자리에서 오간 영화얘기는 서울에서 3년 전에 하던 얘기들이었다. 나는 이 좁은 나라에서 그렇게 최신 영화에 관한 정보가 늦는다는 게 좀 이상했다. 그러니 틈만 나면 부산에서 국제영화제를 하겠다는 이용관 교수의 얘기를 심드렁하게 농담 비슷한 얘기로 받아들인 내 반응도 당연했다.
다들 아는 대로 부산국제영화제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나 역시 잡지사에 근무했던 10여년 동안 매해 영화제에 참석해 데일리를 만들었으며 수많은 영화를 봤고 감독들을 숱하게 인터뷰했다. 안방에서 해외 영화인들을 만난다는 건 신기한 경험이었다. 1996년 처음 칸 영화제에 갔을 때 그곳에는 한국영화를 위한 자리가 없었다. 영화진흥공사가 열었던 한국영화 홍보 부스는 파리만 날렸고 한국의 기자들이나 수입업자들의 휴게실 비슷한 역할만 했다. 부산을 통해 칸이나 베를린, 베니스 등의 영화제 사람들과 친교를 트면서 한국영화는 국제화 시대의 서막을 열었다. 그 사이 이용관 교수는 프로그래머, 부집행위원장, 집행위원장으로 역할을 바꿔 가며 영화제의 산 증인이 됐다. 그와 독대를 안 한 지가 10년은 넘은 것 같다. 그는 너무 바빴고 가끔 만나더라도 늘 다양한 사람들의 무리 중에 있었다. 그는 한때 바쁜 영화제 일을 그만 두고 학자로 살겠다고 수시로 공언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영화제 일을 너무 재미있어 한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제 일을 다른 욕심 없이 재미있어서 한다는 건 대단한 미덕이다. 오늘 날 부산국제영화제가 이만큼 성공한 것은 영화제를 처음 만들었던 사람들의 초심을 잃지 않는 자세 덕분이라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이용관은 김동호 명예집행위원장,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 등과 더불어 부산국제영화제의 얼굴 같은 사람인데 그가 변변한 감사패 하나 받는 일 없이 엉성하게 영화제에서 물러나는 지금 사태가 슬프다. 부산 출강 때 그와 매주 술 마시던 시절, 새벽에 광안리 근처 여관에 들어가니 텔레비전에선 성수대교가 무너진 광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혀 실감나지 않던 대재난의 모습, 오늘의 부산국제영화제 사태와 이용관의 무기력한 퇴장을 보며 너무 어이가 없어서 초현실적이었던 그 재난의 광경을 생각한다.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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