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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그래도 좋은 영화는 만들어지고 있다

등록 2016-03-01 18:51

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설행: 눈길을 걷다
요즘 17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한 120여편의 한국 독립영화를 몰아서 보고 있다. 전주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로서 한국 영화들을 선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점점 더 심해지고 있는 경향인데, 독립영화들 가운데 다큐멘터리의 수준은 올라가고 있는 반면 극영화는 갈수록 수준이 떨어지는 걸 느낀다. 예전 같으면 주류 영화계에서 소화했을 법한 장르영화의 아이템들을 저예산으로 만든 꼬마 상업영화들이 독립영화 카테고리로 묶여 들어온다.

나는 이게 주류영화계의 흥행 양극화, 배급 독과점만큼 심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감독들이 기성영화계에 대한 도전의식이 약하고 기성사회를 향한 분노가 희미해지고 있다면 이 비정상적인 한국 영화 투자·유통 구조를 부술 만한 새로운 에너지는 어디서 구할까 비관적인 심정이 된다.

그래도 좋은 영화는 만들어지고 있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장편 프로젝트 세 편 가운데 하나인 김희정 감독의 <설행: 눈길을 걷다>가 좋은 예다. 3일에 개봉하는 이 영화는 필자가 제작 기획한 것이니 편파적이라 해도 어쩔 수 없지만 좋은 영화는 좋은 영화인 것이라고 자신있게 추천하고 싶다. 삼십대의 알코올중독자 남자가 수녀원에 들어가 갱생을 모색하는 내용의 이 영화는 망각과 망상의 이중 그물에 걸린 남자의 심리 상태를 유려한 화면으로 부드럽게 펼쳐 보이는데 인간의 고통을 감독이 부드럽게 응시하며 쓰다듬는 듯한 연출력을 보여준다. 삶의 고통스런 비극을 눈물 쏙 빼게 묘사하는 것은 항시 고통을 착취할 위험을 안게 된다. 이 영화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알코올중독자의 금단에 따른 고통스런 일상을 심상한 듯 따라가는데 그 남자의 마음에 비친 헛것을 현실로 풀어내면서 등장인물들이 번갈아 가며 서로의 고통을 들여다볼 수 있는 순간들을 누나의 시선 같은 카메라로 관찰한다.

녹록지 않은 환경에서도 자신들의 예술적 의지를 상당한 수준의 미학으로 이뤄낸 감독과 배우들의 역량에 놀라게 된다. 알코올중독자 주인공을 연기하는 김태훈은 자기 고통이 너무 세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알아차릴 수 없었던 회한을 텅 빈 표정과 힘겨운 동작들로 연기하는데 꾸며서 하는 흔적 없이 주인공의 몸과 마음에 빙의된 상태를 보여준다. 그 상대역의 젊은 수녀 역을 연기하는 요즘 뜨고 있는 배우 박소담은 타고난 재능인 무구한 얼굴과 자기 내면의 아픔을 감추기에는 너무 정직한 이의 아름다움을 곧잘 화면에 잡히는 클로즈업을 통해 생생하게 드러낸다.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무엇보다 나는 이 영화에서 숟가락으로 인물의 상처를 후벼파지 않고도 그들 옆에서 친구처럼 다정한 거리를 지키는 카메라의 역할에 감탄했다. 영화의 예술적 윤리로 가장 중요한 화면 내의 거리를 용케 지켜내면서 이 영화는 타인의 고통에 다가간다는 준엄한 명제가 무엇인지를 관객에게 정서적으로 웅변한다. 정치가 우리의 삶을 개선시킬 수 없다는 패배감이 점점 더 심해지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나는 이런 영화가 우리 안의 고통들을 나누는 계기를 만들어줄 수 있다는 것에 격한 감동을 느낀다. ‘너만 힘든 게 아냐’라고 외면했던 일상의 무심함을 이 영화를 보며 적지 않게 반성했다. 얼마 전 마지막 눈이 내렸고 이제 봄이 온다. <설행: 눈길을 걷다>가 그 징표다.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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