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무뢰한
무뢰한
오승욱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무뢰한>은 망했다.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상영되고 전도연이 일생일대의 명연기를 펼쳐 화제를 모았지만 극장 흥행 성적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매우 애석하다. 이 영화는 그가 15년 만에 만든 신작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서로 비슷한 공산품 같은 영화들만 쏟아지는 이 시기에 감독의 개성있는 스타일이 살아있는 드문 영화였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팬덤을 형성할 만큼 열광하지만 대다수는 희미한 스토리 라인에 실망했다. <무뢰한>은 스토리와 대사의 행간에 영화적 매력이 집중돼 있는 영화이다. 시나리오에 적혀 있지 않은 여백과 행간에 빼곡히 채워 넣은, 오승욱이 창조한 영화적 무드가 나는 좋았다.
오승욱과 나는 오래된 친구이다. 그가 나보다 연배가 높지만 그가 자꾸 나를 친구같은 사이라고 하니 그냥 친구라고 하겠다. 그의 데뷔작 <킬리만자로>는 화면을 뚫고 나오는 맹렬한 폭력의 기세를 통해 루저들에 관한 짙은 연민을 담은 영화였으나 비평적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오승욱이 좀처럼 새 영화를 찍지 못하고 여러 차례 탈고한 각본이 끝내 빛을 보지 못할 때마다 나는 그와 함께 술을 마셨다. 그는 강의로 호구지책을 삼으면서 맹렬하게 온갖 문화적 자양분을 탐식했다. 넓게 공부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나에게 그는 좋은 스승이었다. 실제 자연인 오승욱은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의 예술적 취향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를 아우르고 액션과 멜로를 횡단한다. 그는 <킬리만자로>를 찍은 사람이지만 <8월의 크리스마스> 각본가이기도 하다. 그와 나는 10대에 텔레비전 주말의 명화 시간에 방영됐던, 남들은 별로 관심 없는 영화들에 열광했던 취향을 공유했다. 서로 깜짝 놀랄 만큼 비슷한 취향이었다. 동시에 그는 내가 접촉할 수 없는 섬세하고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나는 그가 열광하는 마초들의 거친 에너지는 여리고 유약하며 소통하지 못하는 남자들의 다른 이면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가 빨리 새 영화를 찍어서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만큼 술과 음식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인간다운 인간을 사랑하는 그가 스크린 안에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의 자취를 유구하게 남겨주기를 바랐다. 그가 새 영화를 찍으면서 우리 관계도 좀 멀어졌다. 그는 바빴고 새 영화 연출에 따르는 스트레스를 감당하려고 애썼다. 감독은 고독한 직업이다. 나는 그가 <무뢰한>으로 보란 듯이 스스로 감내했던 절실한 고독의 대가를 받기를 원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는 좋은 영화를 찍었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는 극장 흥행의 결과에 따라 덧없이 사라지는 소비재가 아니다. <무뢰한>은 자체의 결함을 스스로 장점으로 바꾸는 영화이다. 각자 세상을 잘못 살고 있는 주제에 남들 비평하는 데만 쏠려 있는 얼치기들이 판치는 이 세상에서 홀로 죄의식을 짊어지고 제대로 살 길을 찾아 시늉이라도 하는 인간의 초상을 멋지게 제스처로 담아낸 영화이다. 벌써 나는 그의 다음 영화를 응원하고 싶어진다.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김영진 명지대 교수,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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