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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변호인’을 예외적 영화로 만든 송강호

등록 2013-12-26 20:14수정 2013-12-26 20:14

[문화'랑'] 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며칠 전 길을 걷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유니폼을 입은 이십대의 두 직장여성이 재잘재잘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 중에 ‘빨갱이’ 운운하는 말이 들려 호기심이 동한 나는 듣지 않는 척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알고 보니 영화 <변호인> 얘기였다. 영화를 본 사람이 보지 않은 동료에게 영화 내용을 들려주고 있었다. 그들은 멀쩡한 학생을 잡아다가 빨갱이로 모는 영화 속 경찰을 화제로 올리면서 통닭구이 등의 고문 형태를 거론하며 함께 “말도 안 돼”를 외치고 있었다. 평론가로서 작품의 공과를 논하기 전에 이런 대화를 끌어낸 영화의 파급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변호인>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은 영화 속 과거 현실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 영화 속 주인공 모델이 된 고인에 대해 복잡다단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의 흥행이 기분 좋은 것은 앞서 말한 평범한 젊은 관객들의 반응을 봤기 때문이다. 극장 객석에서 나는 옆자리의 많은 관객들이 토해내는 짜증과 분노와 슬픔이 거대한 기운을 형성하는 걸 느꼈다. 그 광경을 보고 느끼며 새삼 배우의 힘을 생각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는 메모에 ‘송강호, 송강호, 송강호’라고만 적었다. 송강호가 연기한 송우석 변호사의 사자후는, 고문경찰을 연기한 곽도원의 느물거리는 표정과 더불어 이 영화의 백미다. 이 두 배우가 이 영화의 정서를 완벽하게 응축했으며 긴 잔상을 남긴다.

송강호는 이제까지 어떤 인물을 연기해도 풍선에 살짝 바람이 빠질 때처럼 그 인물에게서 긴장을 빼내어 인간미를 입히는 매력이 있었다. 그가 굳이 개그를 하지 않아도 거울 속에서 혼자 대면할 때 짓는 표정 같은 것을 우리에게 보여줄 때면 우리는 정서적으로 무장해제당하고 슬며시 웃게 된다.

그가 형사나 깡패가 아니라 <박쥐>에서처럼 진지한 신부 역을 해도 그런 정서적 일체감은 마찬가지였다. <변호인>에서 송강호는 그 두 면을 다 끌어안고 간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관객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속물변호사 송우석을 연기하는 송강호의 인간적 매력이 바탕에 깔려 있지 않았다면, 법정에서 격정적인 연설을 쏟아놓는 이상주의자로서의 송우석을 보며 감흥이 덜했을지 모른다.

영화를 보고 나서 곰곰 생각했다. 이것은 노무현의 이야기에 기초한, 송강호가 연기하는 송우석의 이야기다. <변호인>은 노무현의 신화를 배우 송강호가 순화시켜 새롭게 제시하는 영화 속 이상주의자의 신화이다. 그렇게 보지 않으면 그 이후의 이 세상의 변화와 타락에 대해 견디기 힘들다.

송강호라는 배우의 육체를 경유해 현시한 그 과정과 결과가 흥미로웠다. 그는 한국 영화에선 좀처럼 성공하기 힘든 이상주의자 영웅을 연기했다. 한국 영화에서 그런 인간의 진화는 잘 설득되지도, 용납되지도 않는다. 이 영화는 예외였다. 순전히 배우의 힘이다. 앞으로 송강호가 더 좋아질 것 같다.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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