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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루저에게 분노와 좌절만 있는 건 아니다

등록 2013-06-13 19:46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문화‘랑’]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얼마 전 분당 오리에 있는 극장에서 켄 로치 감독의 <앤젤스 셰어>를 보고 관객들과 대화를 나눴다. 켄 로치가 평생 애정을 갖고 묘사하는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교양있는 중산층 관객들이 극장 안에 많았다는 게 기분을 묘하게 했다. 영화가 이웃의 고통을 다루는 매체로서 유능한지 늘 회의가 떠나질 않는다. 사람들은 오락, 요즘 유행하는 말로는 힐링을 원한다. 고통을 고통 그대로 들여다보는 리얼리스트의 화법은 누구에게나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 칸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이 영화, <앤젤스 셰어>는 켄 로치의 영화 가운데 가장 밝고 낙관적이다. 이분이 나이를 먹을수록 더 유들유들해지는 것인지 이 영화에서만 그래본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영화를 보는 내내 유쾌했다. 위스키를 증류할 때 사라지는 2%의 알코올을 그쪽 지방에서는 천사의 몫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영화의 주인공들, 하릴없이 지역사회의 세금만 축내고 있는 실업자 청년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위스키가 담겨 있는 오크통에서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세 병을 훔쳐내어 비싼 값에 판다. 아무도 알지 못했고 모두 다 행복하다. 이건 천사의 몫이라는 것이다. 켄 로치 감독은 주인공들의 도둑질 행각을 그리면서도 그럼 좀 어떤가라고 관객들에게 들이대는 해피엔딩을 그린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건 우리가 <오션스 일레븐> 유의 강탈 영화에서 기대하는 결말이다. 그런 장르영화를 보며 우리는 주인공들이 단죄당하는 걸 바라지 않는다. 여기서는 관객의 그런 관습적인 기대감을 비틀었다. 주인공들은 관객인 우리가 본받고 싶은 인물들은 절대 아니고 심지어 공감하기도 힘든 인물들이다. 무식하고 요령부득이며 미래에 대한 전망 따위는 품어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한심하다. 켄 로치 감독은 이들에 대해 어떤 도덕적 훈계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처한 사회환경을 자세히 묘사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루저였고 지금도 루저이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영화가 끝난 뒤 어느 젊은 관객이 물었다. 연륜이 느껴지는 연출이라기보다는 그저 능숙함만 보이는 연출이었다고, 그래서 뭔가 개운하지 않다고 그는 말했다. 내 생각은 달랐다. 직업상 이런 유형의 소재를 다루는 영화들을 많이 접한다. 특히 젊은이들이 주인공인 한국의 독립영화들은 지나치게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사회에 짓눌려 있다. 나는 그런 영화들의 답답한 기운이 과도한 자기연민이나 사회적 환경론에 갇힌 결과라고 본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희로애락이 보이지 않고 분노와 좌절만 있는 인물들이 스크린에 너무 많이 나온다. 켄 로치는 기성세대가 보기에 아주 한심한 젊은이들을 그리면서 그들의 맹목성과 무지와 게으름까지도 다 껴안는다. 영화 속에는 이런저런 술을 테스트하며 마시다가 남이 침을 뱉어놓은 술을 일부러 다시 먹는 더러운 짓을 하는 젊은이도 나온다. 이 역겨운 짓을 해놓고도 그는 맛있다며 태연하다. 이런 캐릭터 묘사는 웬만한 내공 아니면 힘들 것이다. 가르치거나 훈계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들을 껴안는 것, 그리고 그들의 자잘한 범죄조차도 그게 뭐 어떠냐고 도발하는 노감독의 대담한 태도를 통해 모처럼 제대로 힐링하는 기분이었다.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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