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김영진의 시네마즉설
<지슬>
<지슬>
수년 전 어느 영화상 심사에 참여했다가 제주도에서 극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다. <버스 정류장>의 이미연 감독이 <어이그 저 귓것>이란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됐다며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그런 영화를 방기하는 것은 평론가의 직무유기라고 그는 은근히 협박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보게 된 그 영화는 아마추어가 만든 허술함을 드러내놓고 과시하는 뻔뻔한 기색이었는데 묘하게도 우습게 보이지 않는 엄격함이 화면에 배어 있었다.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은 비슷한 규모의 저예산으로 <뽕똘>이라는 신화적 코미디를 만들었고 나는 이 감독이 몇 년 안에 한국 영화계의 주요 감독이 될 거라고 예감했다. 그는 연극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오멸 감독이었다. 제주도의 신화를 난센스 코미디로 풀어낸 <뽕똘>은 말도 안 되게 웃기다가 나중에는 관객의 마음을 훔치는 슬픈 영화였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한 <지슬>을 본 뒤 나는 내 예감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제주 4·3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영화는 시종일관 강력한 주술적 기운으로 관객의 뇌리를 얼얼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모시는 신들만 1800여신이 있다고 하는 제주도 특유의 무속적 기운이 화면 바깥에서 화면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착각을 준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 채 미군의 소개령을 듣고 피신했거나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죽어가는 제주 사람들의 모습을 따라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몰아 소탕하는 군인들의 일상을 그리고 있는 이 영화는 겉으로는 무심한 척, 잔인했던 역사의 현장을 카메라로 후벼 판다. 그런데 나사고리로 학살 현장의 공기를 후벼 팔 듯이 훑는 카메라에서 냉정함 대신 속세의 무질서 위에 옹립하는 신의 초월적 기세를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영화의 진정한 힘이다.
연출자 오멸이 집전한 화면 속의 그 초월적 기운은 과시적인 것이 아니라 제주 사람들뿐만 아니라 제주 산천의 공기까지 아우르며 공명하려는 절실한 몸짓으로 느껴져 슬프다. 비전문 배우들이 다수 포함된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 채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도 평소 일상대로 그들끼리 티격태격하고 보살피고 염려하며 자기들만 아는 동굴에 숨어 지슬(감자를 뜻하는 제주도 방언)을 나눠 먹으면서 여하튼 그들의 삶을 이어간다. 제주도민들의 피난 상황을 묘사할 때나 군인들의 일상을 묘사할 때, 심지어 군인들이 민간인을 학살하는 장면에서조차 카메라는 현장에 엄격하게 입회해 있는 듯하면서도 어느 순간 다른 세계로 진입하는 듯 착각을 준다. 절대자의 눈에 이끌려 다른 차원의 입구로 끌려가는 몰입감에 젖어 관객은 압도당한다. 마을 사람들이 동굴에 피신해 감자를 나눠 먹을 때 카메라가 느리게 수평으로 이동하는 영화 속 한 장면에서처럼 때로 연극적으로 보이는 <지슬>의 형식적 장치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꾸 여기 말고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상상을 하게 만든다. 이게 괜한 형식적 허세로 보이지 않고 자신이 태어나 자란 제주도의 산천과 역사에 대한 오멸 감독의 통한이 분출하는 흔적으로 읽히는 것이다. <지슬>에는 슬픈 영성이 가득하다.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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