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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영화 이야기만 나오면 피가 뜨거워진다

등록 2012-12-06 20:14

원로 영화제작자 이태원(오른쪽) 태흥영화사 대표와 이지승 영화 프로듀서 겸 감독이 지난달 23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태흥영화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 감독은 이 대표의 3남1녀 중 막내이다. 막내아들과 사진을 찍으며 이 대표는 “막내가 내 얼굴과 가장 많이 닮았다”며 웃었다.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인터뷰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했다. 아들은 태흥영화사 영화 ‘베스트 3’으로 <기쁜 우리 젊은 날> <개그맨> <장군의 아들>을, 이태원 대표는 <서편제> <장군의 아들> <뽕>을 꼽았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원로 영화제작자 이태원(오른쪽) 태흥영화사 대표와 이지승 영화 프로듀서 겸 감독이 지난달 23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태흥영화사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 감독은 이 대표의 3남1녀 중 막내이다. 막내아들과 사진을 찍으며 이 대표는 “막내가 내 얼굴과 가장 많이 닮았다”며 웃었다.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인터뷰하는 것이 꿈이었다”고 했다. 아들은 태흥영화사 영화 ‘베스트 3’으로 <기쁜 우리 젊은 날> <개그맨> <장군의 아들>을, 이태원 대표는 <서편제> <장군의 아들> <뽕>을 꼽았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우리는 짝]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이지승 감독
서편제 등 36편 제작 ‘흥행 승부사’
그 아들은 저예산 영화 새실험 나서

“요즘 밥값만 해도 얼마인데….”

타박처럼 들려도, 아버지는 ‘이놈, 거 참’이란 속뜻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는 1990년대 초반, 정부가 불온소설이라며 영화화를 막아 제작이 3년여 표류했던 <태백산맥>의 원작료로 1억원이나 쓰고, 남들은 “돈 벌지 못할 텐데 제정신이냐”고 했던 판소리 영화 <서편제>에 6억원 제작비를 들인 ‘통 큰 손’이었다. 그런데 아들이 5000만원 제작비로 장편영화 연출 데뷔작 <공정사회>를 만들었다는 얘기를 하다가, “나 원, 어처구니가 없어서”라며 ‘허!’ 하고 그만 웃음을 지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부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공정사회>는 경찰의 부실수사를 믿지 못한 엄마(장영남)가 어린 딸의 성폭행범을 직접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최근 코스타리카 필름 페스티벌 최우수작품상을 타는 등 국제영화제들의 초청을 받고 있다. “쉽지 않은 소재인데, 생각보다 잘 만들었더라고요. 영화가 10분만 더 길었으면 좋았을 텐데.” 예산이 적어 상영시간이 74분인 것이 아버지는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영화계 ‘큰손’ 아버지 이태원
5천만원으로 ‘공정사회’ 만든 아들
쉽잖은 소재로 생각보다 잘 연출…
난 예술가가 아니고 영화 장사꾼
내 시대는 지나…제작 더는 안해

아들은 일흔여섯살인 아버지와 영화를 놓고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것이 “감사하다”고 했다. “제 영화가 시간을 넘나드는 구조이고, (화면이 전환되는) 컷 수도 많고 속도감이 있는데, 아버지가 요즘 영화들도 어려워하지 않고 보실 수 있다는 것이 놀랍죠.”

그를 어떤 평가의 시각으로 바라보든, ‘흥행 승부사’였던 이태원 태흥영화사 대표를 빼고 1980~2000년대 초반까지의 한국영화사를 거론하는 건 어렵다. “그런 아버지 그늘 밑에서 부담과 비애도 느꼈다”는 아들은 1988년에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한 시점으로 기억을 돌렸다.

“신입생 소개 시간에 ‘아버지는 뭐 하시냐’고 물어서, 누구의 아들이라고 말하기 겸연쩍어 ‘작은 영화사를 한다’고 했어요. 그게 태흥영화사라는 걸 알고 다들 놀랐죠. 당시 태흥은 지금의 씨제이(CJ)처럼 영화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사였으니까요. 학과의 분위기는 ‘넌 대충 해도 감독 되겠다’는 사람들과, ‘전형적인 상업영화를 만드는 영화사 아들’이라며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로 갈렸죠.”

건설회사 겸 미군 군납업체를 하며 돈을 벌어 1983년 태흥영화사를 차려 36편을 만든 이 대표는 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어우동> <뽕> 등 성인 관객들이 좋아할 영화를 제작했다. 이후 첫사랑 영화의 교본 같은 <기쁜 우리 젊은 날>, 이규형 감독을 발굴한 <청춘 스케치>, 신인을 대거 발탁한 <장군의 아들> 등 젊은 관객층을 아우른 흥행작도 배출했다. 이 대표는 “<장군의 아들> 오디션을 보러 온 800여명 중 김두한 역(박상민)을 지망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 지금의 신현준(당시 하야시 역)이었다. 서울의 한 호텔 ‘설악룸’에서 오디션을 봤는데 실제 설악산으로 갔던 지망생도 있었다. 그 열정을 높이 사 캐스팅했다”고 떠올렸다. 태흥은 <아제아제 바라아제> <경마장 가는 길> <서편제> <화엄경> <태백산맥> <춘향뎐> <취화선> 등 도전적인 소재도 마다하지 않았다.

3남1녀의 막내아들인 이지승(43) 프로듀서 겸 감독은 “그런 아버직 덕에 영화가 자연스럽게 내 몸으로 들어왔다”고 했다. “우리 집에 이장호·배창호·이두용 감독님, 배우 안성기 선배님, (강)수연이 누나가 찾아와 집이 늘 북적북적했죠. 아버지가 극장도 운영해서 어려서부터 장르와 연령등급에 관계없이 영화도 많이 봤고요.”

아들이 영화를 전공한다고 하자 아버지는 반대했다. “배우 뒤꽁무니도 쫓아다녀야 하고, 힘든 일”이란 걸 알아서다. “거기 합격해도 (아버지 덕에) 학교 뒷문으로 들어왔다고 오해받을 것”이라 걱정했지만, 이 대표는 “아들이 과 차석으로 합격해 뒷문으로 들어온 놈은 아니란 걸 스스로 보여줬다”며 기특해했다.

미국 뉴욕대에서 영화이론을 더 공부한 아들은 프로듀서로서 영화현장에 들어왔다. 아버지는 이를 두고 “이론 전공으로 교단에 선다던 아들이 결국 본색을 드러냈다”며 웃었다. 아버지가 80~90년대 한국 영화 도약기를 이끌었다면, 이제 아들은 ‘1년 1억명 관객 시대’를 연 한국 영화의 재도약기를 끌어갈 영화인으로 컸다. 1000만 관객을 넘긴 <해운대>와 <색즉시공> <통증> 등의 프로듀서를 했던 아들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총괄 책임교수로 차세대 영화인도 키운다. 지난해 독립영화 화제작 <파수꾼>의 윤성현, 700만명 돌파를 앞둔 <늑대소년>의 조성희 등 유망한 젊은 감독들이 영화아카데미에서 그에게 배웠다.

‘프로듀서 겸 연출자’ 아들 이지승
아버지 명성 먹칠할까 늘 긴장…
힘든 영화 전공한다고 반대하셨죠
극장개봉 저예산 영화 계속 도전
창작자들 갈수록 위축돼 아쉬워

아시아와 미국의 국제영화제에 <공정사회> 출품을 온라인으로 직접 신청해 초청장을 받아내고 있는 아들은 ‘저예산 영화 제작·연출-영화제 출품-극장개봉’의 3단계 과정을 시도하고 있다. “후배들에게 도전하는 모습과, 영화의 다양성을 위해 저예산 영화도 국제영화제를 거쳐 개봉에 이르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다. <공정사회>는 내년 3월 개봉 예정이다.

왼쪽부터 <서편제>, <장군의 아들>, <뽕>.
왼쪽부터 <서편제>, <장군의 아들>, <뽕>.
아들이 국제영화제를 여기저기 두드릴 수 있는 건, 한국 영화에 굳게 닫힌 듯했던 그 문을 열어놓은 아버지 덕분이다.

이태원 대표는 “한국 영화가 프랑스 칸영화제 경쟁작에 한 번도 오르지 못했을 때, 이건 내가 한번 해보자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 구닥다리 영화를 왜 만드느냐”는 비아냥도 들었던 판소리 뮤지컬 형식의 <춘향뎐>을 제작해 2000년에 한국 영화 사상 처음 칸 경쟁작에 초청받았다. “칸에서 상영이 끝나고 10분 넘게 기립박수를 받았는데, 임권택 감독한테 ‘우리가 나가야 박수가 그치겠다’고 할 정도였죠. 레드카펫을 걷는데 구름 위를 걷는 듯 감격적이었죠.” 당시 상을 받지 못한 그는 “칸 경쟁작에 오를 때까지만 도전하자고 했는데, 기립박수를 받으니 상을 뭐 하나라도 가져가자는 욕심이 생겼다”고 했다. “대기업이 국제영화제에 나갈 영화 하나쯤 만들 줄 알았는데, 그 사람들이 하지 않기에 ‘나도 영화 한 편 만들 힘은 있다’면서 <취화선>을 또 제작한 겁니다.”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은 2002년 칸영화제 감독상을 거머쥐었다.

그는 대기업들이 영화와 문화의 수준을 높이는 데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대기업이 제품광고비에 수천억원의 돈을 쓰는데, 칸과 베네치아 영화제에 나갈 수 있을 만한 작품에 1년에 1편 또는 2년에 1편씩이라도 투자하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만약 <서편제>를 삼성에서 만들었다면, 그건 삼성의 영화가 되면서 기업 이미지도 올라가는 겁니다. 50억원을 날릴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그건 결국 대기업 소유주(오너)가 문화의 중요성을 알고 결단해줘야 합니다. 꿈같은 말이겠지만….”

프로듀서와 연출을 동시에 하는 아들은 “창작자의 위상이 떨어지고 있다”고 걱정했다. “최근 몇몇 감독들이 (투자·제작자 간섭에 의해) 촬영 도중 하차하는 일들이 있잖아요? 투자자 도움 없이 영화를 만들 수 없다 보니, 제작자나 영화인들도 이런 문제에 대해 몸을 사리고 목소리를 내지 못해요. 투자자들은 감독 등 창작자들의 권리를 존중해야 하고, 창작자들은 ‘웰메이드 영화’를 지향해, 하고 싶은 영화를 할 수 있는 위상을 스스로 키워야 합니다.”

아들은 “뚝심 있는 이태원 대표 같은 제작자가 요즘 거의 없다는 얘기를 많이 듣기도 한다”고 했다. “태흥의 명성에 먹칠하지 않으려고 프로듀서 할 때도 투명하게 하려고 노력했다”는 그는 ‘선주(제작자)는 배가 바다(촬영)로 떠나면 선장(감독)에게 배를 맡겨야 한다’는 아버지 지론에서 많이 배웠다고 한다. “프로듀서 할 때도 감독 뒤에서 촬영 모니터를 보는 걸 하지 않으려 했어요. 촬영 현장에선 감독의 존재와 권한을 중요시하는 아버지를 봤기 때문이죠.”

최근 서울 한남동 태흥영화사에서 아들과 함께 기자와 만난 이태원 대표는 경기도 의정부의 ‘태흥시네마’(THC9)란 복합상영관 운영에 매진하고 있다. 젊은 시절 서울 명동 주먹조직에도 몸담은 자신의 삶을 극화한 <하류인생>(2004) 이후 그는 제작에서 손을 뗐다. 그는 “다시 제작할 생각은 없다. 이제 나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했다. “‘난 예술가가 아니고 영화 장사꾼’이라고 말해왔어요. 돈이 남아야 다른 영화에 또 돈을 보탤 수 있었으니까요. 영화는 미친 사람들이 하는 겁니다. 자기가 좋아서 죽기 살기로 하는 놈이 이기는 거죠. 진심을 다해, 거짓 없이 영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는 “아직도 ‘<서편제> 만든 분 아니세요?’란 말을 듣는데, 이렇게 행복한 게 어디 있나요? 그 영화가 벌써 몇 년이 됐는데…”라며 뿌듯해했다.

그 말을 들은 아들이 “그러고 보니 내년이 <서편제> 제작 20주년인데, 의정부 태흥시네마에서 기념상영하면 어떨까요?”라고 제안했고, 아버지는 “무료이면 관객들이 많이 올 수 있겠다”며 반겼다. “1000만 영화를 제작하지 못해 아쉽다”면서도, 이 대표는 “<서편제>가 지금 개봉했으면 1000만 이상 영화”라고 위안 삼는다. 이 대표가 평소 이 영화를 생각하면 “피가 뜨거워진다”고 말해온 <서편제>는 1993년 단성사 한 곳에서만 당시 서울 관객 신기록인 113만명을 모아 35억원을 벌었다. 196일간 상영하면서 비바람에 빛바랜 극장 간판을 두 번 교체할 정도였다.

이태원 대표가 언론과 인터뷰에 나선 건 7년 만이다. 아들은 “같이 (신문) 사진을 찍고 싶다고 내가 애교를 부려 모시고 나왔다”고 했는데, 이참에 아버지는 감독으로 데뷔한 막내에게 고마움과 격려를 표현하고 싶은 듯 보였다. “영화 현장에 많이 나가 있었는데, 자식들이 공부도 잘했고 잘 커줬어요. 자식복이 많죠. 이번에 아들 영화 보니까, 장편 상업영화 연출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이건 아버지의 마음이기도 하겠지만, “영화는 과학이나 수치가 아니라, 대중의 마음을 읽는 ‘감’이 중요하다”는 흥행 승부사의 ‘어떤 감’처럼 들렸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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