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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권력에 기생하는 자들의 초라한 맨얼굴

등록 2012-12-02 20:14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김영진의 시네마즉설
남영동 1985
정지영 감독은 <부러진 화살>로 재기하기까지 오랫동안 새 영화를 만들지 못했다.

<남부군>, <하얀 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연출했던 1990년대에 그가 코리안 뉴웨이브 감독으로 거론되던 걸 고려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만했다. <블랙 잭>과 <까>가 연달아 실패한 뒤 정지영 감독이 투자를 받는 건 쉽지 않았다. 흥행실패 감독이라는 주홍글씨는 이래서 무섭다. 솔직히 그를 새 영화의 감독으로 만나게 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부러진 화살>을 보고 난 뒤에는 그의 뚝심에 감탄했다. 세부묘사가 엉성한 대목은 있었지만 반제도권 성향의 캐릭터를 밀고 가는 핵심 메시지 하나만으로 그는 많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도 정지영 감독의 연출이 낡았다는 기왕의 내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남영동 1985>는 달랐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필자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한국에서 저예산 작가영화를 만드는 이들 가운데 정지영 감독만큼 과감한 발상과 시도를 할 수 있는 이가 있을지 의문이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오직 좁은 신문실에서 고문이라는 폭력적 방식으로 만난다는 이 설정만으로 장편 영화를 찍어낸 정지영의 예술적 배짱은 유기적인 화면 연결의 찰기 덕분에 긴장을 놓치지 않는다. 거짓 자백을 강요하는 국가 공무원들의 고문 시나리오에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되어가는 듯했던 주인공은 일시적으로 고문에 백기를 들지만 끝내 자존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처음에 굴욕의 당사자는 고 김근태를 모델로 한 주인공 ‘김종태’였으나 나중에 굴욕을 겪는 이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모델로 한 ‘이두한’이다. 권력의 편에 서서 자기 통제력을 잃지 않던 이두한은 끝내 굴복되지 않는 김종태를 보며 이성을 잃고 상대편의 입장에서 생각할 능력이 없었던 자기 영혼의 황량한 바닥을 드러내며 짐승이 된다.

권력이나 권력에 기생하는 이들이 우월할 수 있는 것은 짐승이 아니라 인간의 행세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피권력자’들은 때로 일상적인 소통 통로를 거부당한 채 울부짖어야만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권력자들 편에 선 이들이 편한 것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남영동 1985>의 후반부는 그이들의 단단하게 보였던 권력에의 투사와 이입 능력이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를 보여주며 관객에게 전율을 준다. 고문기술자 이두한뿐만 아니라 그의 주변에서 서성거리던 평범한 경찰공무원들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일상적 악의 평범성은 불안의 다른 얼굴이다. 그 맨얼굴이 드러났을 때 그들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남영동 1985>는 단순히 과거를 고발하고 현재의 정치지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선동영화가 아니라 권력의 악한 부분에 기생하는 우리들의 민얼굴을 보여주는 영화이다. 그 과정이 통렬하기 때문에 대단한 영화적 활력이 있다. 극장에서 끈질기게 버티며 더 많은 관객을 만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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