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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허진호 감독의 변신은 ‘무죄’

등록 2012-10-07 18:45수정 2012-10-21 19:58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김영진의 시네마즉설
‘위험한 관계’
한달 전 허진호 감독과 <봄날은 간다> 블루레이판에 들어갈 음성 해설을 함께 녹음한 적이 있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더불어 허진호 감독의 대표작인 이 영화는 200여개의 컷으로 이뤄진 긴 호흡의 영화다. 손안에 쥔 모래가 빠져나가듯 덧없이 흘러 지나가는 시간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느낌으로, 허진호 감독은 남녀 주인공의 사랑과 이별을 삶과 죽음의 유비로 꾸며놓았다. 사랑하는 누군가와 헤어지는 것의 아픔의 끝장은 죽음이다. 이별과 그에 따른 상실감은 우리의 삶에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러니 우리는 물끄러미 그 과정을 지켜보고 받아들이며 다만 견딜 수 있을 뿐이라고 이 영화의 긴 호흡으로 연출된 화면은 말하는 것 같았다. 다시 봐도 좋은 영화였다.

그런데 음성해설 도중 허진호 감독이 뜻밖의 말을 했다. “내가 만든 것이지만, 이 영화는 정말 호흡이 기네요. 이번에 중국에서 찍은 제 신작은 좀 다릅니다. 컷이 1700개 정도 돼요. 지금까지 제가 만든 모든 영화의 컷 수를 합친 것보다 많아요.” 도대체 어떤 꼴의 영화일까 궁금했다. 그 영화는 허진호 감독이 중국 자본으로 만들고 장동건, 장쯔이, 장바이즈(장백지)가 주연한 <위험한 관계>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되고 오는 11일 정식 개봉할 이 영화는 종래의 허진호 감독의 영화와 전혀 다른 톤의 영화이다. 관조적이고 성찰적인 호흡이 사라진 대신에 폭풍처럼 감정이 화면에 쏟아진다. 신파 혐의를 비켜가는 품위를 지키면서 자기 감정을 통솔하지 못한 채 그것이 운명이라고 착각하게끔 만드는 남녀 주인공들의 어긋나는 사랑의 비극을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느낌으로 보게 만든다.

피에르 앙브루아즈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유명한 서간문학 고전이 원작인 <위험한 관계>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영화화됐다. 근래 만들어진 것으로는 스티븐 프리어스의 <위험한 관계>가 걸작 수준이고 밀로시 포르만의 <발몽>, 심지어 이재용 감독의 <스캔들>도 같은 소설 원작이다. 그밖에도 다양한 변주가 있는 이 원작을 굳이 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삼아 허진호가 다시 만든 이유를 화면에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전쟁이 임박한 상황에서 서구 물질문명의 유입으로 번영의 외피가 화려한 상하이에는 데카당스의 매혹이 독버섯처럼 자라난다. 일종의 자기파괴적 욕망과 열정은 이 영화의 주인공, 백만장자 바람둥이 세이판(장동건)과 유한부인 모지웨이(장바이즈)가 공유하는 감정이다. 그들은 정복과 배척의 삶 속에서 사랑과 욕망도 쉽게 거래할 수 있다고, 그럼으로써 삶을 다치지 않고 영속적인 쾌락을 누릴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다. 세이판은 모지웨이의 계략을 받아들여 도덕적인 삶을 사는 전쟁 미망인 뚜펀웨이를 유혹하기로 한다. 뚜펀웨이는 세이판을 처음에는 거부하지만 마침내 받아들이고 예정된 수순에 따라 세이판은 뚜펀웨이를 버린다.

물론 다 아는 스토리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답지 않게 잘게 나눠진 화면들은 세 주인공이 결국 다 함께 빠지는 사랑과 소유의 그 자기파괴적 열정의 함정을 격렬하게 담는다. 나는 뜻밖에도 이 예정된 비극의 순환고리에 깊이 감정이입했다. 장동건과 장쯔이의 좋은 연기 덕분이기도 하겠지만 허진호의 연출은 감정을 장식해야 하는 대중영화의 필연적인 왜곡필터를 적당히 채택하면서도 끝까지 품위를 잃지 않았다. 권태와 고독이 두려워 사랑과 소유의 외피를 둘러야 하는 우리는 가련한 동물들이라는 걸 이 영화는 멜로드라마의 부드러운 손길로 콕콕 찌른다. 나는 허진호의 연출 스타일의 변화를 지지한다.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크랭크人#9] '위험한 관계' 허진호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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