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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임상수, 기세는 여전하고 재능은 성숙

등록 2012-05-27 20:10

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필자는 임상수의 영화에 관해 좀 야박하게 굴었던 평론가이다. <그때 그 사람들>이 임상수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영화의 결말에 대해서도 불만이 있었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을 모두 역사의 불쌍한 희생자들로 그리고 있는데 니들 그렇게 살지 마라, 라고 감독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일갈하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깐족거리는 에너지가 임상수 영화의 신경세포를 이룬다. 임상수의 반골적 에너지는 조금도 줄지 않았으나 <하녀>와 <돈의 맛>에 이르러서는 개인적으로 이젠 졌다, 인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상수는 나이를 먹어도 자신의 태도를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전임 대통령조차 권력이 그쪽으로 넘어갔다고 인정했던 재벌가의 내부 이야기를 허구로 다루면서 기세 좋게 대드는 인상을 준다. 우리 너무 돈 가진 사람들에게 휘둘려 주눅 들지 말고 삽시다, 그리고 상위 1% 그들도 마찬가지로 불쌍합디다, 하고 화면 어딘가에서 임상수가 말하는 듯한 환청이 들렸다.

인위적으로 보일 만큼 지나치게 장중한 비극으로 끝낸 <하녀>와 달리 임상수의 신작 <돈의 맛>의 결말은 훨씬 부드러운 교훈극처럼 끝난다. 재벌가 사위로 들어가 부와 명예를 누린 윤 회장(백윤식)은 자신의 삶이 모욕적이었다며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런 윤 회장을 보며 윤 회장 같은 삶을 꿈꾸었던 비서 주영작(김강우)은 신분상승 코스를 포기하고 재벌가를 나온다. 두 남자를 거느렸던 이 집안의 실질적 권력자 백금옥(윤여정) 여사는 눈 하나 까딱 안 하는 것 같지만 그 자신도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마찬가지다. 백금옥 여사의 아들은 유들유들 상속자로서의 자기 신분에 잘 적응하지만 따님인 나미(김효진)는 다르다. 이 집안의 가풍에 비판적이었던 나미는 주영작을 따라나서며 본격적으로 연인관계를 시작한다. 그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일은 재벌가의 하녀이자 윤 회장의 연인이었던 필리핀 하녀 에바의 관을 본국 가정에 돌려주는 일이다. 그때 하늘에선 갑자기 비가 내리고 죽은 하녀 에바는 관 속에서 주영작이 던져놓은 돈다발을 보며 눈을 부릅뜬다.

<돈의 맛>은 제목 그대로 돈의 맛을 시각적으로 가상체험시키지만 맛을 보니 별것 없더라는 결론을 내린다. 부잣집 내부에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한 권력투쟁과 섹스행각을 보려던 관객의 관음증을 만족시켜 주는 척하면서 노골적으로 뒤통수를 친다. 이전 영화들과 다른 것은 등장인물들 중 일부는 자존과 위엄을 회복한다는 전개와 결말이다. 말로 옮기면 교조적으로 들리겠지만 나는 김우형 촬영기사의 카메라가 돈으로 도배됐다는 착각을 주는 재벌가 집 내부를 우아하게 훑는 허다한 장면들에서 번들거리는 공허를 시각적으로 충분히 맛보았다. 모든 것이 반질반질한 집안 곳곳의 물건들과 지형지물은 등장인물을 감싸 안는 게 아니라 그들을 반사해 보여주고 튕겨낸다. 등장인물들은 이 화려한 공간에서 서로 염탐하며 의심하고 경계한다. 그들이 서로 마음을 얻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의 값비싼 집안 조형물들과 벽에 걸린 그림들도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물화된 환경에 포위된 인간들이다. 이런 느낌은 아마 칸영화제 본부 ‘팔레 데 페스티발’의 엄청나게 큰 스크린으로 보면 확 느낌이 배가될 것이다.

임상수는 배짱도 좋지만 시각적 감성도 예민하다는 점에서 두말할 나위 없이 뛰어난 영화감독이다. 필자는 <돈의 맛>이 임상수 재능의 성숙의 징표라고 본다.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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