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의 시네마즉설
며칠 전 필자가 교수로 있는 대학에 강의하러 오는 한 촬영감독과 식사를 하다가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요즘 충무로 상업영화를 찍는 감독들 중 일부는 현장에서 거의 연출을 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했다. 그럼 뭘 하느냐고 물었더니 끊임없이 소스를 찍어둔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배우의 연기를 지휘하고 사전에 정해둔 시각적 콘티뉴이티(콘티)대로 컷을 나누는 대신 전체 장면을 화면 크기별로 여러 컷 길게 찍어둔 다음에 만약의 경우에 대비해 편집실에서 쓸 수 있는 인물이나 사물 클로즈업을 부지런히 찍는다고 한다. 현장은 생물과 같은 것이어서 정해진 대본대로만 찍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배우의 상황과 현장의 날씨까지도 고려해가며 창의적으로 변용하는 일이 잦다. 그런데 이런 현장에서는 창의적 변용 따위는 벌어지지 않는다.
쑥스럽지만 필자도 반년 전에 한 극장 홍보동영상을 찍으면서 비슷한 일을 겪었다. 유명배우들과 함께 하는 작업이었는데 연출을 맡은 광고(CF) 출신 감독은 장면 전체를 롱 숏, 풀 숏, 바스트 숏, 클로즈업 등으로 나눠 통으로 찍었다. 함께한 모 배우는 다소 어이없어하면서도 “뭐, 광고니까요” 하며 대수롭잖게 넘어갔다. 그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이런 식이라면 나도 감독하겠다”고 우리끼리 수군대며 넘어갔지만 그런 일이 영화계 현장에서도 벌어지는 줄은 몰랐다. 이게 할리우드식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쪽에서도 일류 감독은 그런 식으로 작업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식이라면 화면들의 찰기가 생길 리 없고 대본에 씌어 있는 것 이상의 마술이 현장에서 발생하지도 않는다.
이제 충무로에선 감독이나 제작자가 중심이 아니다. 그들 대다수는 투자사에서 용역을 받은 하청업자들일 뿐이다. 현장에선 효율이 가장 중요하고 대본에 쓰여 있는 대로 그림만 재미있게 맞춰 찍어내면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영화가 나온다고 투자사 관계자들은 생각한다. 아직 유명세를 얻지 못한 신인감독들의 고충은 더욱 심하다. 일부의 사례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들은 어떤 현장 스태프의 얘기로는, 감독이 매일 다음날 찍을 장면에 관해 리포트를 써서 투자사에 제출하며 그것도 못미더워하는 투자사 관계자들에게 당일 아침 일찍 불려가 프레젠테이션할 것을 요구받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제작자도 필요 없고 감독도 누가 하든 할 사람은 줄을 서 있다는 식의 전문가 폄하 의식을 이런 사례에서 읽을 수 있다.
물론 영화인들의 잘못도 있다. 실제로 한국에서만큼 제작자나 감독이 되는 게 쉬운 나라는 없다. 그러나 오래 살아남는 전문가가 되는 건 어디서나 다 똑같이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이용주 감독의 <건축학개론>을 만든 명필름처럼 여전히 프로페셔널리즘을 증명하는 제작사가 존재하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이 영화를 보며 새삼 연출과 촬영과 미술과 여타 스태프들의 재능이 배우들의 연기를 위해 오롯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도록 잘 조율한 명필름의 전문가정신에 감탄했다. 현재의 충무로는 제작사나 감독의 이런 전문성을 앙양하는 환경일까? 아닌 것 같다. 결국 이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신작 촬영에 들어간 이명세 감독이 해고당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을 최근에 들었다. 이명세 감독이 현장에서 그 유명한 ‘창의성’을 발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앞으로 감독과 배우들은 현장에서 대사를 고치려면 투자사에 전화를 걸어야 할 모양이다. 이명세도 쫓아내는 충무로 현장이라면, 이제 막장이다.
김영진 명지대 교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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