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현의 <가시>(왼쪽), 양정호의 <밀월도 가는 길>(오른쪽)
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대학에서 영화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장편제작연구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장편영화들을 보고 있으면 시샘이 난다. 박기용 감독이 원장으로 재직할 때인 2007년에 만들어진 아카데미 장편제작연구과정은 5000만원의 예산으로 학생들이 장편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이다. 이렇게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여 만들어낸 영화들이 성과를 거두는 건 놀라운 일이다. 대체로 이들 영화는 그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되고 이듬해엔 독일 베를린이나 여타 굵직한 국제영화제들을 통해 나라 바깥에서도 알려진다. 더 질투 나는 건 해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표’ 장편영화의 수준이 조금씩 올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해 제작된 4편의 한국영화아카데미 장편들이 모두 올해 3월에 개봉했다. 이 네 편 가운데 양정호의 <밀월도 가는 길>(오른쪽 사진)이 짜임새 있는 스토리텔링으로 관객 반응이 좋고, 김중현의 <가시>(왼쪽)가 작가적 저력이 있다는 평판을 들었다. 소문 그대로였다. 내가 주목한 것은 이 영화들의 힘이었다. 이전의 아카데미 표 영화들은 뭔가 아직 체화되지 않은 영화적 호흡을 자기 목소리로 변환시키는 과정에서 덜 숙성된 듯한 혐의가 없지 않았으나, <밀월도 가는 길>과 <가시>에는 그런 이물감이 덜했다. 지난해 나온 윤성현의 <파수꾼>이 잘 증명했던 것처럼, 배우들의 연기가 20회차 미만으로 찍은 저예산영화의 규모에서 감당할 수 있으리라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뛰어난 것도 경이적이었다.
<밀월도 가는 길>은 학창 시절 섬세한 취향의 친구를 사귀었다가 학내의 폭력 서클 아이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하고 헤어진 기억이 있는 주인공이 나온다. 그가 어른이 되어 그 시절 체험을 토대로 단편소설을 써서 당선된 후 예기치 않은 기회로 과거를 더듬어보는 내용이다. 현재와 과거가 교직되고, 이미 적당히 마모된 마음을 지닌 애늙은이로 살고 있는 주인공이 역시 비슷하게 마모돼버린 동창들을 재회하는 가운데, 매우 선연하게 또다른 삶의 입구를 꿈꿨던 청춘기를 잔혹하게 회상한다. 회상의 톤이 노스탤지어에 갇히지 않고 현재를 날카롭게 벼리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 <밀월도 가는 길>의 가장 독창적인 부분이다.
생각의 이물질들이 덜 들어와 있기 때문에 아름답고 순수할 수 있는 게 청춘이라고 흔히 생각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때 묻지 않은 만큼 연약하고 변절의 농도가 심할 수 있다는 게, 그게 바로 상처라는 걸 이 영화는 매우 단단한 서사로 보여준다.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교직하는 기술적 성취가 특히 뛰어나 보였다.
<가시>는 어머니의 사채 빚 때문에 고통받는 청년을 축으로 삼는다. 어머니에게 돈을 꿔줬다가 낭패를 본 주변의 이혼녀와 청년의 약혼녀, 재개발에 관여하는 건설사에서 일하는 청년이 맺게 되는 철거민들과의 관계 등이 촘촘하게 전개된다. 단순하지 않은 전개인데도 인간의 개별적인 삶이 성립하려면 공동의 관계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당연한 명제를 인간사의 주름 속에서 수려하게 펼쳐놓는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면서도, 심지어는 탈출구가 없는 패배를 담고 있는데도 끝내 가라앉지 않는 영화의 내적 호흡이었다. 이런 유형의 소재를 다룬 영화들에서 지금까지 느꼈던 불만을 이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었다. 그건 아마도 관념이 현실을 누른 게 아니라 그 반대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튼 이런 영화들이 국가부설기관에서 제작되는 걸 환영하고 그 과정에서 헌신한 선생과 학생들의 열정을 존경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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