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의 시네마즉설
영화는 만드는 사람만큼이나 보여주는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다.
아무리 잘 만든 영화라도 보여주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열정이 없으면 그냥 사장되기 쉽다. <파수꾼>이란 작품이 좋은 예다. 이 영화는 윤성현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며 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학생 작품이라고 해도 할 말 없는 영화였다. 완성도가 완벽하진 않지만, 배우들의 연기가 좋았고 사춘기의 성장이란 소재를 새롭게 해석한 관점이 독창적이었다. 영화는 평단으로부터 호평받고 독립영화로선 적지 않은 2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 영화에 출연한 신인배우 이제훈은 후속작인 <고지전>까지 주목받으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건 다 후일담이다. 개봉 당시에는 이 영화가 그렇게까지 화제를 끌 줄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이 영화를 배급한 필라멘트 픽쳐스의 한 담당자는 10여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는데 느닷없이 내게 전화해서는 무조건 도와달라고 했다. 막무가내로 평론가의 일정을 잡고 밀어붙이는데도 밉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배급 홍보하는 <파수꾼>에 대해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그녀의 불도저식 열정 때문에 감독과 배우들은 수십번의 무대 인사와 관객과의 대화 일정을 소화했다. 내가 진행한 관객과의 대화 행사 때도 감독과 배우들이 몰려왔는데, 그 풋풋한 패기가 보기 좋았다. 열정은 감염될수록 좋다. 영화를 만든 당사자들도, 평론가도, 관객도, 배급담당자도 기분 좋게 그 열정을 나눴다.
그 담당자의 집요함은 이후로도 지속됐다.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의 <비우티풀>이란 영화가 개봉할 때도 그는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할 것임에 틀림없다며 역시 영화 상영이 끝난 뒤 관객들에게 해설하는 자리를 부탁했다. 솔직히 기대만큼 영화가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나는 관객들 앞에서 그 영화의 이모저모를 충실히 해설하는 일을 즐겼다. 좋은 영화가 관객을 불러 모은다는 건 거짓말이다. 좋은 영화가 관객과 만나기 위해서는 영화를 만드는 것 이상의 열정과 헌신이 필요하다. 단순히 밥벌이로 여겨서는 그런 열정을 유지할 만한 자부심이 생겨나지 않는다. 나는 필라멘트 픽쳐스의 그 담당자가 모처럼 좋은 일자리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며칠 전 지인과 송년 모임을 하는 자리에 필라멘트 픽쳐스의 또다른 관계자와 우연히 합석하게 되었다. 그는 다소 풀이 죽은 표정으로 필라멘트 픽쳐스의 모기업인 씨제이에서 필라멘트 브랜드는 유지하되 부서는 없애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며 심란해했다. 앞서 말했던 그 열정 넘치는 담당자도 심적인 타격이 이만저만 아니라고 했다. 그는 <비우티풀>을 배급하기로 했던 당시의 일화를 들려줬다. 모니터 시사가 끝난 뒤에 두 사람은 영화의 우울한 정조에 맥이 빠져 터덜터덜 회사로 걸어 돌아갔다고 한다.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어떡하죠? 흥행은 힘들 것 같은데.” “한번 밀어붙여 보자. 영화는 좋으니까.” “오케이예요”로 끝났다.
이런 식의 태도, 열정이 매년 이윤을 내야 하는 대기업 직원으로선 결격사유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극장배급 ‘업자’가 아닌, 존경받는 영화인으로 사는 태도로는 모범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기업이 욕을 먹는 데는 이유가 있다. 종사자들의 열정을 이윤의 대차대조표로 치환해서는 욕을 먹어도 싸다. 새해에는 힘든 상황에서도 영화에 대한 존경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열정이 보상받는 일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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