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오름 정상에 서면 한라산부터 송악산까지 제주 서남부의 장엄한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차로 오를 수 있는 오름이 있다.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군산오름이다. 접근이 쉽다고 만만하게 볼 게 아니다. “군산에 오르면 제주의 4분의 1을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제주 서남부권의 풍광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에 최적의 장소로 꼽힌다.
10월4일 안덕면 대평리에 있는 군산오름 입구로 차를 몰았다. 포장도로이기는 하지만 1차선에 그쳐 대형 버스 등이 진입하거나 속도를 내는 것은 무리다. 반대쪽 차량을 만나면 어느 쪽이든 길 한쪽에 차를 대고 양보해야 한다. 그런데도 해발 334m에 이르는 오름의 정상 바로 아래까지 차를 타고 갈 수 있다는 것은 군산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임이 틀림없다.
어쨌든 차로 갈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가면 일단 9부 능선을 넘은 셈이다. 적당히 주차하고 산길을 5분만 걸어가면 곧바로 정상이다. 등산을 시작하자마자 “거의 다 왔어, 정말이야!”라고 외쳐도 거짓말이 아니다.
군산 정상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면 그야말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날씨만 좋다면 어디를 바라봐도 말 그대로 ‘그림’이 된다. 우선 한라산부터 시작해 다래오름·산방산·송악산·박수기정·용머리해안의 장엄한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대포항과 사계항에는 작은 어선과 낚싯배들이 분주하게 오갔다. 포구 너머의 형제섬과 가파도, 국토 최남단 마라도까지 이어지는 환상적인 풍광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쪽에는 우뚝한 고근산이 굽어보는 신서귀포 일대와 중문 관광단지가 자리 잡고 있다. 서귀포 앞바다의 범섬·문섬·섶섬까지 눈에 들어왔다.
관광객들이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군산오름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아침 일찍부터 군산을 찾은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군산이 자아내는 기적 같은 풍경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마침 전날 흐렸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맑아진 참이었다. 가시거리는 ‘무한대’에 가까웠다. 서울에서 왔다는 김민성(37)씨는 “태어나서 이런 광경은 처음 본다. 군산에 오길 정말 잘했다”고 했다.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정상을 밟을 수 있어 영유아를 동반하거나 거동이 다소 불편한 노부모를 모시고 군산을 찾는 관광객도 적지 않다.
워낙 넓은 범위를 조망할 수 있는 요충지였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에는 이곳에 진지동굴이 만들어졌고, 아직 동굴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정상 부근에 있는 ‘제9 진지동굴’은 길이 9m, 폭은 1m로 전시에 관측소 및 대피소로 활용됐다고 한다. 여행 가운데 만날 수 있는 생생한 역사교육의 현장이다.
풍수학적으로 보면 군산의 정상은 두 갈래의 뿔 바위가 용의 뿔처럼 솟아 있는 쌍선망월형(雙仙望月形)의 명당으로 꼽힌다고 한다. 하지만 이곳에 묘를 쓰면 가뭄이 들거나 폭우가 내려 이웃들이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고 해서 ‘금장지’, 즉 묘를 쓰지 못하는 땅이 됐다. 현용준의 책 <제주도 전설>에 따르면, 어느 해인가 인근 마을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사람들이 군산 정상을 살폈더니 작은 봉분이 발견되었고, 시신을 이장하자 곧 해갈되었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군산에 올랐다가 안덕계곡에 들르지 않으면 절반만 본 것이다. 군산오름 정상에서 다시 큰길 쪽으로 내려오면 입구 표지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안덕계곡은 천연기념물 제377호로 지정된 천혜의 상록수림 지대다.
널찍한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 들어가면 곧바로 구실잣밤나무, 참식나무, 후박나무, 각종 양치식물 등 300여 종의 식물이 빽빽한 산책로로 접어든다. 시원한 계곡물이 굽이쳐 흐르는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서기 500~900년에 인간이 살았던 흔적인 동굴형 그늘집터, 병풍처럼 늘어선 기암절벽도 만날 수 있다. 인근 대정읍에서 8년 넘게 유배생활을 한 추사 김정희가 ‘맑은 물’을 찾아 이곳에 머무른 것으로 전해진다. ‘추사 유배길’의 마지막 제3코스 종착지가 바로 이곳 안덕계곡인 이유다. 군산과 안덕계곡을 찾은 김에 지척인 대정읍에 있는 ‘제주 추사관’에 들러 유배생활 중 추사체를 완성하고 불굴의 명작 ‘세한도’를 남긴 선생의 묵향에 취해보는 것도 좋겠다.
송호균/제주도민이 된 육아 아빠·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