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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제주엔

1만8천 년 전 태어난 젊은 ‘화산학 교과서’…제주 수월봉 지질트레일

등록 2018-10-17 11:19수정 2018-10-18 09:59

[제주&]지질트레일①-수월봉

노을이 아름다운 해넘이 명소
화산활동의 결과 한 눈에 볼 수 있어
일본군 특공보트 숨어있던 진지동굴도

차귀도 억새 물결 위 부서지는 가을 햇빛
영화 <공포의 외인구단> 숙소도
배낚시로 이름난 자구내 포구
10월 7일 관광객들이 산방산 앞 용머리 해안을 둘러보고 있다.
10월 7일 관광객들이 산방산 앞 용머리 해안을 둘러보고 있다.
푸른 바다 위에 솟은 화산섬 제주에는 18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 화산활동의 흔적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그래서 유네스코가 2010년 섬 전체를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했고, 지금까지 경관이 아름다운 12곳이 핵심 지질 명소로 지정됐다. 그 가운데 화산학 연구의 교과서로 불리는 수월봉과 수려한 해안 절경으로 이름난 용머리 해안, 그리고 웅장한 종 모양의 종상 화산체 산방산은 제주도의 대표적인 지질 명소다. 가을 제주로 지질 시간 여행을 떠난다.

글 박영률ylpak@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화산학 교과서’라 불리는 수월봉 아래 바람에 깎여나간 화산 절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화산학 교과서’라 불리는 수월봉 아래 바람에 깎여나간 화산 절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A구간 수월봉 엉알길과 고산리 유적

제주에서 해가 먼저 뜨는 곳은 성산일출봉이요, 해가 마지막으로 떨어지는 곳은 수월봉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지도를 보면 성산일출봉이 제주 본섬의 가장 동쪽 부분에, 수월봉이 가장 서쪽 부분에 불거져 나와 있다.

제주도 서부지역 한경면 고산리에 있는 해발 77m의 수월봉은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는 해넘이 명소로 알려져 있다. 7일 오전 제주공항에서 46km 남짓한 길을 한 시간 10분가량 차로 달려 수월봉 입구 탐방안내소에 다다르자 미리 연락을 받고 기다리던 고춘자 지질해설사가 반갑게 맞아준다. 탐방안내소에 신청하면 교육을 받은 이 지역 출신 해설사가 무료로 해설해준다.

정상까지 이어진 산책로를 따라 올라가면 오래지 않아 수월봉 정상이 나온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차귀도와 자구내 포구가 한눈에 들어온다. 뒤편으로 돌면 산방산과 한라산 등 제주 서남부 풍경이 펼쳐진다. 정상의 팔각정과 지구본처럼 생긴 구체를 이고 있는 기상대 건물도 재미있다.

고춘자 해설사는 “수월봉 지질 트레일은 바다에서 분출한 화산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말했다. 수월봉은 약 1만8천 년 전 뜨거운 마그마가 물을 만나 폭발적으로 분출하면서 만든 고리 모양 화산체의 일부다. 수월봉에서 분출한 화산재는 기름진 토양이 돼 신석기인들이 정착할 수 있는 삶의 터전이 돼주었다. 분화구의 중심은 기상대 앞바다 한가운데에 있었고 현재의 수월봉은 그 폭발이 만들어낸 일부다. 수월봉 화산재층은 화산활동으로 생긴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에 ‘화산학의 교과서’라 불린다.

수월봉 정상의 고산 천문대와 파도와 바람에 깎여나간 화산 절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수월봉 정상의 고산 천문대와 파도와 바람에 깎여나간 화산 절벽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입구에서 자구내 포구로 이어지는 길은 이른바 ‘엉알길’로 제주올레 12코스와 일부 겹친다. 자구내 포구로 걸어가면 길 왼쪽에는 검은 현무암 위로 푸른 파도가 넘실대는 해안이 펼쳐지고, 오른쪽에는 1만8천 년 전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지층들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 있다. 화산체의 속살을 직접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붉은 노을 속 이 길을 걸으면 마치 꿈속을 거니는 것처럼 아득하다. 고산리 출신 고 해설사는 ‘비밀 이야기’라며 노을에 얽힌 사연을 들려줬다.

“여고 시절 이 마을에 사는 한 친구를 따라다니는 남자가 있었는데 거들떠보지도 않았대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친구가 노을이 붉게 깔린 저녁 이 길을 걷는데 뒤따라오던 그 남자가 불러주는 노랫소리에 그만 사랑을 느끼게 돼 지금 부부로 살고 있어요.”

수십 년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같은 방법을 써도 되지 않을까 하는 ‘아재 생각’이 들만큼 엉알길의 노을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믿거나 말거나.

엉알길 오른편에 있는 수월봉 해안 절벽 곳곳에는 다양한 크기의 화산탄(화산 바윗덩어리)들이 박혀 있다. 휘어진 지층에 박힌 무수히 많은 화산탄은 수월봉의 화산활동이 얼마나 격렬하게 일어났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전용문 박사(지질학)는 “10여 m 높이의 이 화산재 지층은 불과 일주일 이내의 극히 짧은 기간에 쌓인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말했다.

제주 화산 지형과 지질 자원을 둘러볼 수 있는 제주 지오트레일, 10월 7일 관광객들이 화산학 연구의 교과서라 불리는 수월봉을 둘러보고 있다. 제주/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제주 화산 지형과 지질 자원을 둘러볼 수 있는 제주 지오트레일, 10월 7일 관광객들이 화산학 연구의 교과서라 불리는 수월봉을 둘러보고 있다. 제주/김진수 기자 jsk@hani.co.kr
왼쪽의 지층도 좀처럼 볼 수 없는 멋진 절경이지만 아픈 역사의 흔적도 있다. A 구간 곳곳에서는 일본군 갱도 진지를 만나게 된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은 수월봉뿐만 아니라 제주도 전역에 수많은 군사시설을 만들었다. 수월봉 해안 진지 동굴은 미군이 고산 지역으로 진입할 경우 갱도에서 바다로 직접 발진해 전함을 공격하는 일본군 자살특공용 보트와 탄약이 보관돼 있던 곳이다. 썰물 땐 이 잠수정이 바다로 향할 때 사용하던 콘크리트 유도로의 잔해가 드러난다고 한다.

수월봉에는 안타까운 남매의 전설도 전해온다. 어머니의 병 치유를 위해 약초를 찾아 절벽을 오르다 누나 수월이가 떨어져 죽고 동생 녹고도 슬픔에 겨워 한없이 눈물을 흘리다 죽고 만다. 그 뒤 사람들은 수월봉 절벽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녹고의 눈물’이라 불렀고, 남매의 효심을 기려 이 언덕을 ‘녹고물 오름’ 또는 ‘수월봉’이라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해안 절벽의 화산재 지층을 통과한 빗물이 화산재 지층 아래 진흙으로 된 고산층을 통과하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것이다. 언제나처럼 전설은 아름답지만 진실은 건조하다.

길을 걷는 동안 예쁜 스쿠터 모양의 전기자전거를 탄 커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차량 진입을 금지한 탐방로에 유일하게 허용된 탈것이다. 수월봉 정상부터 해안길과 인근 마을까지 구석구석을 누빌 수 있어 데이트족이나, 시간이 없는 이들에게 쓸모가 있다. 40분에 1인용 1만원, 2인용 1만5천원을 받는데 수익금은 인근 지질마을 발전기금으로 쓰인다고 한다.

포구에서 해변 뒷길로 돌아 나오면 만나는 고산리 유적지는 덤이다. 수월봉 앞 해안단구 지대에 넓게 형성된 신석기시대 전기의 선사 유적이다. 제주시는 이 유적지 3643㎡에 지상 2층 건축면적 449㎡의 방문객 안내센터를 지었다. 일종의 전시실인데 건물 안에는 영상관과 유물 복제품들을 전시해놓고 있다. 건물은 멋진데 전시물이 빈약한 느낌을 주는 것은 아쉬웠다.

■B 구간 당산봉 트레일과 차귀도

엉알길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덧 배낚시로 유명한 자구내 포구에 이른다. 곳곳에서 한치와 오징어를 말리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인근 유람선 선착장에서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매시간 정시에 차귀도로 가는 유람선이 출항한다. 하지만 최소 정원이 차지 않으면 출발하지 않을 수 있으니 사전에 전화 문의(064-738 5355)는 필수다.

<한겨레> 박영률 기자가 차귀도의 억새 사이를 걷고 있다.
<한겨레> 박영률 기자가 차귀도의 억새 사이를 걷고 있다.
차귀도는 면적이 0.16㎡밖에 안 되는 작은 섬이다. 황금색 억새가 가을빛에 반짝이는 본섬인 죽도와 와도 바위섬인 지실이섬(독수리 바위) 등을 모두 일컫는데 지금은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1978년까지 7가구가 보리, 콩, 참외, 수박 등의 농사를 지으며 살았으나, 거제도에 간첩이 출몰하자 주민들을 철수시켜 현재는 무인도로 남아 있다. 그 뒤 30여 년 동안 출입을 제한하다 2011년 말부터 다시 개방되었다. 여기엔 풍수사 호종단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중국은 탐라에 인물이 날 것을 두려워해 혈을 끊으라고 풍수사 호종단을 파견한다. 용머리 해안의 수맥과 지맥을 끊었던 호종단의 배는 한라산 산신의 노여움을 사 차귀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호종단의 복귀를 막았다고 해서 차귀도다.

배를 타고 들어가 볼 수 있는 것은 가장 큰 죽도다. 선착장에 올라 조금만 걸어가면 반쯤 무너진 옛집 터와 빗물 저장시설이 보인다. 옛집 터의 창틀엔 오래된 됫병들이 보해 소주 빈 병이 하나 놓여 있는데 이 또한 옛 유물로 여겨 치우지 않았다고 한다. 이 집터는 1980년대 히트 영화 <공포의 외인구단>(1986년) 촬영지이기도 했다. 전용문 박사는 “선수들이 발목에 족쇄를 차고 개펄에서 뒹구는 훈련 장면은 바로 이 차귀도에서 촬영했는데 영화 속에서 그들의 숙소로 쓰였던 곳”이라 전했다. 또 다른 집터에는 연자방아도 있다는데 그곳까지는 탐방로가 연결되지 않아 찾기 힘들었다.

차귀도는 비록 작지만 굴곡이 있고 이국적 풍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섬이다. 하얀 등대와 낮은 해변, 깎아지른 절벽의 지층에 부딪히는 파도까지 다양한 풍경을 숨기고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특히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의 물결 위에 가을 햇빛이 부서지는 풍경은 마치 꿈속처럼 아련하다. 사계절 아름다운 섬이지만 특히 가을과 겨울 사이가 절정이다. 탐방로를 따라 걷다 보니 출렁이는 억새 저편 먼 등대 위로 붉은 태양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무어라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이 밀려왔다. 하룻밤 텐트를 치고 쏟아지는 별을 보며 머물고 싶다는 강한 소망이 일었다.

자구내 포구에선 오징어 말리기가 한창이다.  오징어 사이로 보이는 섬이 차귀도다.
자구내 포구에선 오징어 말리기가 한창이다. 오징어 사이로 보이는 섬이 차귀도다.
아쉬운 점은 한 시간 만에 다음 배로 나와야 해서 체류시간이 짧다는 점이다. 사전에 매표소에 잘 얘기해 몇 시간 더 머무른 뒤 그다음 배로 나올 것을 권한다. 차귀도 석양을 본 뒤 항구로 나왔다면 포구 민박집이나 게스트 하우스에서 하룻밤 머무는 것도 좋다.

한밤 파도 철썩이는 항구와 방파제를 서성이다 보면 바다 저편 가로등처럼 환히 등을 밝히고 있는 고기잡이배의 불빛이 장관을 이룬다.

자구내 포구에서 머문 뒤 이른 아침 당산봉으로 향한다. 당산봉은 신당이 있었던 데서 연유한 이름이다. 당산봉은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산방산과 용머리 해안과 더불어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체의 하나다. 당산봉은 다시 15분 정도 걸리는 짧은 A 구간와 40여 분이 걸리는 B 구간으로 나뉜다.

오름의 매력은 눈높이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에 있다. 조금만 더 가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 하는 궁금증이 결국 정상까지 오르게 만드는 힘이다.

당산봉은 그 오름의 특성을 최대치로 보여주는 곳이다. 오르다 보면 남쪽으로는 수월봉과 고산리 유적, 산방산 등 제주 남서부의 경관이 펼쳐지고 북으로는 신창 풍차 도로가 이어진다. 풍광을 즐기며 정상에 오르면 웅장한 한라산과 맞닥뜨린다. 구름에 그 신비한 봉우리가 가려진 거대한 한라산 외에는 더는 시야를 막는 것은 없다.

지질트레일☞지질트레일은 제주의 독특한 지질자원과 인근 마을의 역사·문화·신화·생활 등 다양한 이야기를 접목시켜 만든 도보길이다. 2014년 4월 산방산·용머리해안 지질트레일 개발을 시작으로 수월봉 지질트레일과 만장굴 지역의 김녕·월정 지질트레일, 성산일출봉 지역의 성산·오조 지질트레일 등이 있다.

글 박영률 기자 ylpak@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jsk@hani.co.kr

수월봉 지질트레일 노선도.  제주특별자치도 제공
수월봉 지질트레일 노선도. 제주특별자치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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