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대를 의미하는 30년 이상을 영업하고 있는 노포(老鋪)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빛을 발한다.
제주도 상권이 집중된 제주시에서 20세기의 화려한 중심지는 중앙로였다. 1970~1980년대 한국 경제 전체가 활황이었던 시기에 이곳은 제주 교통, 경제의 중심지였다. 배후에 패션 거리였던 칠성로와 재래시장인 동문시장이 인접해 있었고 인구 밀집 지역인 속칭 무근성 등의 거주지가 불과 10분 거리이다. 특히 1983년 제주시 최초의 지하상가가 동서로 들어서면서 제주 유행을 선도하는 핫 플레이스이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연동, 노형 지역에 ‘신제주’가 조성되며 거주지와 행정기관 등이 대거 이전하고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면서 중앙로 상권은 서서히 침체의 길을 걸어야 했다. 동시에 1990년대를 정점으로 유명 업소들이 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몇몇 식당만이 버텨내고 있는 형국이다.
■ 제주의 위생영업허가 1호- 함흥면옥
1962년 식품위생법이 공포되었지만 일반 음식점들이 위생 허가를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였다. 함흥면옥은 제주에서 1호로 위생 허가를 받은 식당이다. 그러나 실제 개업 일자는 현재 업주도 확신하지 못한다. 한국전쟁 당시 이북에서 피란 온 창업주가 1950년대 중반에 장사를 시작했고 20여 년 후 현재 업주의 아버지가 인수한 것이 1970년대 초반이었다. 이후 부자가 45년을 이어오고 있다.
한반도 가장 남쪽의 섬에서 이북의 음식으로 식당영업허가 1호점으로 등록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부터 제주의 마을마다 전분 공장이 존재했던 시대적 상황을 보면 북한의 ‘농마국수’의 재료인 전분을 밀가루보다 더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제주 사람들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 북한 냉면을 일찍 맛보았다.
함흥냉면, 평양냉면과 찐만두가 대표 메뉴다.
제주시 관덕로 43 / 064-722-2837
■ 제주 해장국의 전설- 미풍해장국
제주 천주 교구의 본당인 중앙성당이 자리한 길은 이면 도로이지만 40대 이상의 중년들에게 이 길은 아직도 잊지 못할 추억의 길이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터줏대감은 미풍해장국이다. 영업 인가는 76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장사를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이라 한다. 카운터에는 젊은 새댁이 앉아 있는데 2대 업주의 며느리이다. 창업자에게 기술을 오롯이 물려받아 그 맛을 이어가고 있어 단골 또한 여전하다. 음식평론가 1세대였던 백파 홍성유 선생이 선정한 맛집으로 소개되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누리기도 했다. 여전히 허름한, 그래서 더 친숙한, 느낌이 편안한 집이다. 칼칼하고 진한 고추기름을 듬뿍 사용하는 해장국도 유명하지만 단골들을 사로잡는 것은 곁들여 나오는 물 깍두기이다. 새콤달콤하고 아삭한 국물 깍두기가 고추기름의 느끼함을 잡아주며 입맛 돌게 한다.
제주시 중앙로 14길 13 / 064-758-7522
■ 소리 소문 없이 꾸준한 맛집- 왕김밥
중앙성당에서 1분 정도만 북쪽으로 걸어 내려오면 유난히 큰 글씨의 간판이 눈에 띈다. 색이 바랬지만 왕김밥이라는 세 글자는 선명하다. 1980년대 이 길가에는 속칭 보세 의류를 파는 양품점과 인문학 전문 서점, 문구 도매점 등 젊은이들을 상대하는 점포들이 늘어서 있었다. 당시 그들을 대상으로 분식점이 대여섯 곳에 이를 때도 있었지만 다 사라지고 이제 이곳만 남아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동네 분식집처럼 음식 종류가 다양하고 식사 메뉴도 많은 편인데 바로바로 말아주는 온기가 남은 김밥은 집에서 만 것 같은 친숙함이 전해진다. 점심시간에는 단골로 늘 가득 찬다.
제주시 관덕로8길 5 / 064-752-0554
■ 20년 전 가격 그대로 받고 싶다는- 에바다 식당
왕김밥 맞은편에 유난히 허름해 보이는 작은 식당이 있다. 테이블 4개를 다닥다닥 붙여놓은 품새가 좁지만 정겹다. 찌개류와 국수로 이루어진 메뉴판은 모두 4000원 이하 가격이다. 백발의 아주머니 혼자 주방에서 분주한데 언제부터 장사하셨냐고 물으니 1990년에 창업한 식당인데 자신은 20년밖에 안 되었다고 손사래를 친다. 작고 허름한 식당이지만 내부는 깨끗하고 음식도 옛날 반찬이지만 정갈하다. 볶은 애호박을 얹어 내온 국수 한 그릇은 예전 내 할머니의 느낌과 맛이 살아난다. 연세 지긋하신 동네 어르신들이 꾸준하게 드나드는 이유가 있었다.
제주시 관덕로8길 8 / 064-753-9672
글·사진 양용진 제주향토음식보전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