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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 뚫고 잡은 카메라, 80살 할머니 돼도 들 겁니다

등록 2021-03-08 04:59수정 2021-03-08 14:37

[여성 촬영감독 3인의 고군분투기]
‘디바’ 김선령 “촬영은 무에서 유 창조”
‘해빙’ 엄혜정 “죄다 남자인 곳에 도전”
‘결혼전야’ 이선영 “기회 잡고 버텨냈죠”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촬영장비 대여업체 프로캄 사무실에서 이선영·엄혜정·김선령 촬영감독(왼쪽부터)이 <한겨레>와의 인터뷰에 앞서 사진을 찍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촬영장비 대여업체 프로캄 사무실에서 이선영·엄혜정·김선령 촬영감독(왼쪽부터)이 <한겨레>와의 인터뷰에 앞서 사진을 찍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영화판은 예로부터 남초의 영역으로 여겨져왔다. 현장이 거칠고 힘들어 여성은 버티기 어렵다는 편견 탓이다. 이런 편견이 가장 심한 분야가 촬영감독이다. 무겁고 복잡한 카메라를 다루는 건 남자의 영역이라는 인식이 똬리를 틀고 있어서다. 최근 영화계에 여성 인력이 늘고 있는 흐름 속에서도 여성 촬영감독은 극히 드문 까닭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지난달 발표한 ‘2020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서 실질 개봉작 165편의 핵심 스태프 여성 참여율을 보면, 감독 38명(21.5%), 제작자 50명(24.0%), 프로듀서 50명(25.6%), 주연 67명(42.1%), 각본가 43명(25.9%), 촬영감독 19명(8.8%)이었다. 전반적으로 이전보다 늘어난 수치지만, 촬영감독의 성비 불균형이 유독 두드러진다.

순제작비 30억원 이상 상업영화 29편을 분석한 결과를 보다가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했다. 2016~2019년 내내 0%였던 여성 촬영감독 비율이 지난해 3.4%(1명)로 증가한 것이다. 수치를 끌어올린 그 한 사람이 바로 영화 <디바>의 김선령 촬영감독이다. 지난달 26일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동료 촬영감독들과 수심 6m 잠수풀에서 수중촬영 훈련을 마친 직후였다. 그중엔 다른 2명의 여성 촬영감독도 있다고 했다. 그들과 만남을 청했다. 그리고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촬영장비 대여업체 프로캄 사무실에서 김선령·엄혜정·이선영 촬영감독을 마주했다.

김선령 촬영감독. 본인 제공
김선령 촬영감독. 본인 제공
“한국영화촬영감독조합(CGK) 회원이 100명 좀 넘는데요, 그중 여성이 7명이에요. 우리 말고도 지윤정·김길자·이지민·조정희 촬영감독이 있죠.” 2017년부터 한국영화촬영감독조합 공동대표를 맡아온 김 감독이 설명했다. 그는 “국내 1호 여성 촬영감독으로는 김윤희 선배가 있다. 1999년 개봉한 <연풍연가> 촬영감독을 했는데, 이후 결혼과 육아를 하면서 현장을 떠났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이후 끊긴 여성 촬영감독의 명맥을 2006년 개봉작 <마음이…>로 다시 이은 이가 김 감독이다.

그가 처음부터 촬영감독을 꿈꾼 건 아니었다. 영화감독의 꿈을 품고 연출부에서 일을 시작한 그는 “배고프고 전망도 잘 안 보여서” 2년 만에 그만뒀다. 이후 제일기획에 들어가 방송 피디로 7년을 일했다. 영화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못한 그는 32살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영화를 함께 공부하던 동기가 그에게 졸업작품 촬영을 부탁했다. “남의 작품을 망칠 수 없어 촬영을 독학하면서 깨달았어요. 스토리도 중요하지만 이를 영상으로 만들어내는 촬영감독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걸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에 매력을 느꼈죠.” 그는 아예 미국영화연구소(AFI)에 촬영 전공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공부했다.

공부를 마치고 미국에 남을지 한국에 돌아올지를 고민하던 그는 한국행을 택했다. “한국 영화판에서 성별의 벽이 이렇게 높을지 몰랐거든요. 돌아오니 다들 말리더라고요. 한국에선 여자가 촬영감독 못 한다고요.” 그래도 운이 좋았다. 촬영감독을 보조하는 카메라 오퍼레이터를 하다가 얼마 뒤 <마음이…>로 촬영감독 데뷔를 하게 된 것이다. “제작사 대표님이 여성에게 열려 있었어요.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인 유승호군과 6살 김향기양, 그리고 강아지가 주인공인 영화여서 현장에서 제게 엄마 같은 역할을 기대했다고 하더라고요.”

이선영 촬영감독. 본인 제공
이선영 촬영감독. 본인 제공
이 감독은 학원 강사를 하다가 우연히 신문에서 한겨레문화센터 영화제작학교 광고를 보고 흥미를 느낀 게 계기가 됐다. 거기서 만난 노동석 감독의 독립영화 <마이 제너레이션>(2004)에 촬영감독으로 참여하면서 재미를 붙였다. 이후 한국영화아카데미와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영상원 전문사 과정에서 촬영을 공부했다. 독립영화판에서 알게 된 김곡·김선 감독이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 <무서운 이야기>(2012)의 한 에피소드 촬영을 맡은 뒤 <결혼전야>(2013)로 장편 상업영화 촬영감독 데뷔를 했다. 그는 “<무서운 이야기> 당시 제작사 대표가 상업영화 경험이 없다며 반대했지만, 감독이 밀어붙였다고 한다. 처음에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고 떠올렸다.

엄 감독은 영화 잡지를 보고 촬영감독의 존재를 알았다. “촬영감독 인터뷰 기사를 보니 죄다 남자더라고요. 여자가 도전해봐도 좋겠다고 생각해 한예종 영상원 학부 과정에 들어갔어요.” 촬영 전공으로 졸업한 뒤 현장에서 일하려 했으나,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영상원 전문사 과정에 들어가 공부를 계속했다. 영상원에서 만든 단편 <핑거 프린트>로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촬영상을 받은 뒤, 2006년 상업영화 데뷔까지 할 뻔했으나 감독과 함께 중도 하차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이후 <해빙>(2017)으로 데뷔하기까지 11년이나 걸렸다.

엄혜정 촬영감독. 본인 제공
엄혜정 촬영감독. 본인 제공
이들이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은 건 촬영감독에 대한 오해다. 카메라가 무거워서 여성은 하기 힘들다는 편견이 대표적이다. 엄 감독은 “카메라가 무거워도 보통 삼각대로 받치고 찍기 때문에 문제 되지 않는다. 카메라를 손으로 들고 찍는 ‘핸드헬드’ 촬영이라 해도 옆에 보조가 있는데다 촬영할 때만 잠깐 들면 되기 때문에 여자 힘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촬영감독은 단순히 촬영만 하는 기술자가 아니다. 감독 다음가는 2인자로서 활자를 영상으로 구현하는 모든 일을 책임진다. 시나리오 해석부터 조명·미술 스태프와 소통·조율하는 능력까지 종합적으로 필요로 하는 예술가다”라고 강조했다.

할리우드에서도 여성 촬영감독이 소수이긴 하지만, 한국보다는 훨씬 더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2018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머드바운드>로 여성으로는 처음 촬영상 후보에 오른 레이철 모리슨이 대표적이다. 그는 마블 히어로 영화 <블랙팬서>에도 참여했다. 실사판 <뮬란> <콰이어트 플레이스> 등도 여성 촬영감독의 영화다. 엄 감독은 “레이철 모리슨의 에스엔에스를 보면, 임신 6개월에도 핸드헬드로 촬영하는 모습이 있다. 한예종 영상원 학생들에게 강의할 때 이 사진을 꼭 보여준다”고 말했다.

임신 6개월에도 핸드헬드 촬영을 한 레이철 모리슨. 에스엔에스 갈무리
임신 6개월에도 핸드헬드 촬영을 한 레이철 모리슨. 에스엔에스 갈무리
하지만 한국에선 여성 촬영감독이 힘들게 데뷔를 해도 다음 영화를 하는 게 쉽지 않다. 김 감독은 “남자 촬영감독은 작품을 마치고 곧바로 다음 작품에 들어가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제의도 많지 않은데다, 준비하던 영화가 엎어지는 경우도 다반사다. 기회가 적으니 경험이 안 쌓이고, 그래서 더 기회를 못 얻는 악순환이 계속된다”고 털어놨다. 엄 감독은 “사다리에 오를 때 다음 칸까지 간격이 남자들에게 3m라면, 우리에겐 5~6m는 되는 것 같다. 그럼에도 떨어지지 않고 잘 버틸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말했다.

엄 감독의 말처럼 이들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비결은 ‘버티기’다. “‘여자 촬영감독은 안 된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 더욱 치열하게 했어요. 그래선지 우리와 한번 일해본 사람들은 꾸준히 다시 찾아요. 문제는 그들도 기회가 많지 않다는 거죠.” 김 감독이 말했다. 이들은 일이 없는 동안 운동을 하며 체력을 기르고 모여서 수중촬영 훈련을 하는 등 준비에 만전을 기한다. 엄 감독은 지난해 넷플릭스 시리즈 <인간수업> 이후 새 작업을 기다리고 있다. 이 감독은 촬영을 마쳤으나 코로나19 사태로 개봉이 연기된 변요한·김무열 주연 영화 <보이스>가 개봉하기를 기다린다.

김선령 촬영감독. 본인 제공
김선령 촬영감독. 본인 제공
김 감독은 동서대 임권택영화예술대학 영화과 교수로 후학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그는 “요즘 영화과 학생 비율을 보면 남녀가 비슷하거나 여자가 더 많고, 성평등 의식도 높다. 촬영에 관심 갖는 여학생들도 많다. 이들이 현장에 나가면 앞으로 10년 안에 많이 변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전에는 차별을 받아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조용히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당당하게 목소리를 내야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다고 마음을 바꿨어요. 우린 맨땅에 헤딩하며 이 길을 헤쳐왔지만, 학교에서 꿈을 키우는 친구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방법도 알려주고 싶어요.” 이들이 2019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여성 촬영감독 서사 인 시지케이(in CGK)’라는 포럼을 연 것도 그래서다.

이들의 꿈은 촬영감독으로 계속 일하는 것이다. 김 감독은 “80살 할머니가 돼도 촬영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여성으로만 제작진을 꾸려서 작품을 연출하는 꿈도 꾼다. 요즘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고도 했다. 이를 들은 엄 감독이 말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는 제작자, 연출자, 작가, 촬영감독, 미술감독 등 모든 핵심 스태프가 다 여성이에요. 프랑스 여성 촬영감독 아녜스 고다르는 70살에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고요. 우리도 꿈만으로 그치진 않을 거예요.”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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