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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이야기는 끝났어요…이제 할 일은 오늘을 그리는 거예요”

등록 2017-12-19 22:58수정 2018-01-08 10:17

【길을 찾아서】 (45) 구술 연재를 끝내며

2017년 한해 동안 매주 <한겨레> 독자들에게 한 세기를 넘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 김병기는 앞으로 더욱 그림 작업에 몰두해 ‘오직 작품’으로 오늘의 삶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지난달 24일 김병기는 한강 상류 팔당과 조선시대 분원이 건너다보이는 경기도 광주시 이석리 강변에서 새해 102살 개인전에 선보일 새 작품 구상을 위한 스케치 촬영을 직접 했다.  사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2017년 한해 동안 매주 <한겨레> 독자들에게 한 세기를 넘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 김병기는 앞으로 더욱 그림 작업에 몰두해 ‘오직 작품’으로 오늘의 삶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지난달 24일 김병기는 한강 상류 팔당과 조선시대 분원이 건너다보이는 경기도 광주시 이석리 강변에서 새해 102살 개인전에 선보일 새 작품 구상을 위한 스케치 촬영을 직접 했다. 사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이야기는 끝났어요. 이제 묵묵히 그리는 게 내가 할 일이에요.”

지난 17일 서울 평창동 자택 겸 화실에서 만난 김병기 화백은 일년 동안 이어진 ‘길을 찾아서’ 구술을 끝내는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올해 들어 가장 머리가 가벼워요 지금. 실은 오늘 새벽 꿈을 꿨어요. 마누라가 나왔어요. 사별한 뒤로 뭔가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면 종종 집사람이 보여요. 생전에 늘 그랬듯이, 우린 말다툼을 하고 있었는데 평소와 달리, 내가 더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어요. ‘당신 때문에 내가 그림을 맘껏 그리지 못했다’고 소리치고 있었어요. 그런데 꿈에서 깨어난 순간 난 깨달았어요. 남 탓, 환경 탓이 아니었어요. 내가 그리면 되는 거였어요.”

지난해 12월 마지막 주부터 시작된 구술 인터뷰는 필자인 윤범모 교수의 바쁜 일정 탓에 주로 휴일인 일요일 진행됐다. 초저녁에 시작된 구술은 5~6시간을 훌쩍 넘겨 한밤중에 이르도록 끝날 줄 몰랐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목소리는 더 커졌고, 기억은 더 또렷해졌고,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 사람 이름? 가만있어 보세요. 조금 있으면 내가 생각해낼 수 있어요.”

그는 어쩌다 한순간 기억이 끊길 때마저도 결코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때로는 며칠 뒤까지 생각을 더듬어 기어코 답을 전해주곤 했다. 이날도 그는 불현듯 떠올랐다며,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만났을 때의 새 일화를 들려줬다. “한국전쟁 나기 전 신성모 국방부 장관의 아들이 운영한 한국문화연구소에서 선전국장을 맡았었다고 전에 말했죠? 그 무렵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찾아가 직접 만난 적이 있었어요. 그때 ‘계란이 영양가가 높은 식품이니 많이들 먹으라’고 했던 말이 생각나요. 계란이 얼마나 귀한 시절인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양반이라는 생각을 했더랬어요.”

지난 1985년 우연한 첫 만남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온 윤 교수는 30년이 지나도록 그의 기억력이 여전하다고 감탄했다. 그만의 특별한 기억법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는 뜻밖에도 ‘고독’이란 표현을 꺼냈다.

“49살에 홀로 미국으로 건너간 이래 반세기 동안 ‘옛 추억을 되새기며 버틴 세월’이었어요. 어쩌면 그 고독감과 그리움 덕분에 기억을 더 잘하게 됐는지도 몰라요.”

오랜 고독과 그리움의 바탕에는 잃어버린 고향 평양과 북녘땅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깔려 있다고 했다. “난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어릴 때부터 지금껏 남들과 싸운 적이 없어요. 상대를 먼저 이해하려고 들면 싸움이 되질 않아요. 물론 마누라는 남이 아니니까 예외예요.(하하하)”

김 화백은 또 한가지 귀띔한다면 부친에게 물려받은 ‘한량 기질’이라며 여성에 대한 사랑을 꼽았다. “늘 혼자만의 사랑을 품고 있어요. 그러면 늙을 수가 없어요. 어쩌면 그 열정이 내 작품의 원천인지도 몰라요.”

김병기는 화실에 앉아서만 그리는 ‘직업화가’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다양한 예술세계와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오늘의 시대 정신을 표현하는 ‘작가’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군중 속의 자화상’(2015년 작).
김병기는 화실에 앉아서만 그리는 ‘직업화가’가 아니라 사회 속에서 다양한 예술세계와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오늘의 시대 정신을 표현하는 ‘작가’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군중 속의 자화상’(2015년 작).

일요일마다 평창동 화실 ‘심야회동’
김 화백 5~6시간씩 혼자서 ‘열변’
“벌거벗은 심정으로 최대한 솔직히”

마지막회 인터뷰 앞둔 새벽 ‘현몽’
“집사람과 다투는 꿈 깨어보니…”
남탓·환경탓 말고 그림 몰두하란 뜻

모두가 가장 궁금해하는 ‘장수 비결’
“사랑, 긍정적 사고, 타고난 낙천성”

‘회고록’ 연재 계기로 갖가지 화제
모르고 있던 남쪽 친척들도 ‘상봉’
예술원 회원 ‘이니쌀’ 선물에 감동

‘한국의 포레스트 검프’ ‘최고의 글’
필자 윤범모 교수 “힘들었지만 보람”

김병기는 연재 내내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했던 ‘장수 비결’에 대해 “내가 아나? 어쩌다 죽을 때를 놓쳤지?”라고 웃으며 말했다. 지난 8월 서울 평창동 화실에서 구술 녹취를 하면서 필자 윤범모(오른쪽) 교수와 와인을 나누고 있다. 사진 김경애 기자
김병기는 연재 내내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했던 ‘장수 비결’에 대해 “내가 아나? 어쩌다 죽을 때를 놓쳤지?”라고 웃으며 말했다. 지난 8월 서울 평창동 화실에서 구술 녹취를 하면서 필자 윤범모(오른쪽) 교수와 와인을 나누고 있다. 사진 김경애 기자

그는 부러 강조하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건강관리법’으로 이어졌다. “나만 보면 누구나 자꾸만 장수 비결을 묻는데, 나도 잘 몰라요. 알다시피 내가 건강을 위해 특별히 신경 쓰는 게 전혀 없잖아요?”

실제로 그의 일상을 보면, 오히려 건강에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요즘도 밤늦도록 책을 읽거나 밤새워 그림을 그리고 새벽에야 잠자리에 들곤 한다.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겸 점심으로 우유를 섞은 커피와 구운 식빵에 치즈를 넣은 샌드위치를 손수 만들어 먹는다. 미국으로 건너가 홀로 지내면서부터 생겨난 습관이라고 했다. 흔한 산책이나 손체조조차도 하지 않는다. 집 안엔 운동기구 하나 보이지 않는다. 저녁식사 때는 종종 와인이나 술을 한두잔 즐긴다. “술은 원래 한잔만 해도 얼굴이 붉어져서 잘 못했어요. 담배는 일본 유학 시절 배워서 환갑 즈음까지 골초 수준으로 피워댔어요. 전에 한번 얘기했죠? 어느 날 뉴욕 맨해튼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 올랐는데, 유난히 날이 맑아 풍광이 아름다웠어요. 그때 이 좋은 세상을 더 맑은 정신으로 즐기고 싶다는 생각에 그날로 담배를 끊었어요.”

2015년 영구 귀국 이래 서울대병원에서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고 있는 그는 최근에도 신체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물론 고혈압이나 당뇨 같은 지병도 전혀 없는 상태다. 가끔 좌골신경통으로 걷기에 불편할 때 지팡이에 의존하는 정도다.

오랜 세월 김 화백의 측근으로 지켜봐온 윤 교수 역시 주변에서 ‘101살 장수 비결’을 가장 궁금해한다며 ‘무비결의 비결’로 정리했다. “김 화백은 혼자 살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한다. 특기할 사항은 어느 집에나 있는 약봉지가 없다는 점이다. 남다른 점이 있다면, 적극적이고도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들어야겠다. 화백은 늘 지적 호기심을 놓지 않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을 때, 그에 대한 연구를 하고, 또 그의 당선을 예언했다. 최근에도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노벨문학상을 받자, 그의 일본어판 대표작을 구해 독파한 다음 나에게 작품 분석까지 해주었다. 한마디로 화백은 ‘늙을 새가 없다’. 무엇보다 화백은 자신이 나이 들었다는 의식을 하지 않는다. 오랜 유교문화 속에서 우리 노인들은 대부분 나이를 내세우면서 대접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화백은 가만히 앉아 대우받기보다 먼저 상대방을 챙긴다. 상대방의 나이와 관계없이 관심을 갖고 배려한다. 이는 몸에 밴 습관이다. 그래서 젊은 여성들도 김 화백과 함께하는 시간을 즐거워한다. 장수? 그조차 의식하지 않는 것이 비결이리라.”

이날도 김 화백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자신의 예술론을 전개하기도 했다. “가즈오는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5살 때 영국으로 이민 가서 영문학을 전공했다고 했어요. 일본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을 텐데, 작품에서는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고향 사람들의 고생스러운 삶을 미친 듯이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요. 나처럼 실향민인 셈인데, 결국은 고향을 찾고 있는 거예요. 마침 오늘 근처에 사는 후배 김창열 화백의 프랑스 정부 훈장 수여 축하연에 다녀왔는데, 그 역시 고향인 대동강 상류 맹산의 맑은 물에서 ‘물방울’의 영감을 얻었어요. 내 그리움의 원천도 평양 북쪽의 외가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그는 자신을 포함해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리는 고향은 실제로는 없는 고향이라고 했다. “저 산 너머 멀리에는 행복이 산다고들 말하건만~ 아, 남들과 함께 어울려 찾아갔건만~ 울면서 되돌아왔네.(카를 부세 ‘저 산 너머’) 명절 때마다 전국토를 뒤덮는 귀향 행렬을 보지만, 정지용이 노래한 ‘꿈엔들 잊히랴’ 했던 진짜 고향은 이미 없어요. 어쩌면 고향 상실의 시대여서 예술로나마 고향을 더 갈구하는지도 몰라요.”

지난 12월 5일 광주광역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예술원 회원 특별전’ 개막식에 직접 참석한 김병기는 최고령 신입 회원이자 창립 원로로서 ‘광주의 얼’을 주제로 특강을 했다. 사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지난 12월 5일 광주광역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예술원 회원 특별전’ 개막식에 직접 참석한 김병기는 최고령 신입 회원이자 창립 원로로서 ‘광주의 얼’을 주제로 특강을 했다. 사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제공.
김 화백은 지난 5일 다녀온 광주 이야기도 했다. “옛 전남도청에 자리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예술원 특별전’ 개막을 축하하는 연설을 했더랬어요. 1960년 무렵 김영주·이세득 등과 함께 ‘추상미술’ 강연을 하러 갔다가 쫓기듯 떠나왔던 광주에서 반세기 넘어 되돌아가 내 작품을 소개하는 자리여서 감회가 남달랐어요. ‘광주는 고향의 얼, 민족의 얼이 깃든 곳’이라고 했어요. 내 고향 평양과도 통하는 기질과 정신이 있어요.”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에게 고향은 곧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내가 새러토가에서 홀로 지낼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임종도 못 한 불효자예요. 그때도 꿈에 어머니가 오셨더랬어요. 서울의 장례식 날, 이국의 교회에서 혼자 울었어요. 내가 남다른 건강을 타고났다면, 순전히 어머니의 덕이에요. 귀한 산삼이며 대동강 숭어며 어릴 때 섭생을 잘해주신 게 건강의 큰 자산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평생토록 아버지의 사랑을 얻지 못해 슬픈 마음을 기독교 신앙에 의지하면서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셨다는 점이에요. 그 놀라운 낙천성을 내가 물려받았어요.”

실제로 김 화백은 평소 “나쁜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한다. 이번 회고록 연재를 시작할 때 그는 “벌거벗은 심정으로 최대한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놓겠다”고 했다. 설사 그로 인해 어떤 불유쾌한 파장이 생긴다 해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각오였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 가족사가 대표적이다. “일찍이 부친이 평양을 떠나 서울에서 따로 살림을 차리고 새 가족과 지낸 이야기는 감추고 싶을 수도 있어요. 우리 가족들 중에서도 굳이 공개할 필요가 있겠냐며 말리기도 했고 섭섭해하기도 해서, 마음에 걸렸어요. 하지만 그런 가족관계도 내 예술의 한 원천이기에 빼놓을 수가 없었어요.”

그런 만큼 그는 뒤늦게나마 지면을 통해 먼저 떠난 부인에 대한 진심을 전할 수 있었던 점과 가족사진을 소개했을 때가 회고록 연재 동안 가장 기쁘고 뿌듯했다고 했다.

<한겨레> 연재를 계기로 김병기는 모르고 있었던 사촌 동생의 세딸과 상봉했다. 지난 5월 광주시 이석리에 있는 한옥 함양당에서 큰조카(김지영·권대섭) 부부의 3살 외손녀(김부훤·왼쪽)와 1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모습이다. 사진 김경애 기자
<한겨레> 연재를 계기로 김병기는 모르고 있었던 사촌 동생의 세딸과 상봉했다. 지난 5월 광주시 이석리에 있는 한옥 함양당에서 큰조카(김지영·권대섭) 부부의 3살 외손녀(김부훤·왼쪽)와 1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모습이다. 사진 김경애 기자
김 화백은 연재를 계기로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친척들과 만나는 뜻밖의 상봉도 경험했다. “우리 할아버지 삼형제 중에 둘째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한겨레>에서 내 얘기를 보고 연락을 해왔어요. 둘째 숙부의 손자이니 나로선 사촌동생(김응명)이 해방 언저리에 월남해서 대전에 정착했다고 들었는데, 내가 미국으로 가면서 연락이 아예 끊겼더랬어요. 이번에 그의 세 딸, 내겐 조카들을 찾았어요. 마침 큰조카의 남편이 달항아리로 이름난 도예가(권대섭)여서 더 반가웠어요.”

이번 회고록이 화제를 더해가는 동안 그의 일상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대한민국 예술원의 최고령 신입 회원으로 추대되면서, 신작 발표와 특강 등으로 대외 활동 기회가 더 많아졌다. 지난 추석 때는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이른바 ‘이니쌀’ 선물을 받고 감개무량해하기도 했다. 초창기 서울대 미대 교수 활동도 새삼 부각되면서 서울대 총동창회 특별전 등에도 최고 원로로 참여했다. 새러토가 정착 초기에 가르쳤던 미국 제자들까지도 인터넷을 통해 기사를 보고 60여년 만에 연락을 해오기도 했다.

필자로서 윤 교수의 소감도 궁금했다. “올해는 ‘김병기 왕국’에서 보낸 일년이었다. 주3일은 꼬박 구술 녹취와 집필에 매달렸다. 회가 갈수록 이야기가 많아져 압축하는 작업이 더 힘들었다. 누구는 ‘디아스포라 화가의 절규’라고도 했고, ‘한국의 포레스트 검프 같다’고도 했다. 당대 존경하는 한 문학평론가는 ‘올해 읽은 최고의 글’이었다고 지인들을 통해 전해오기도 했다. 한 개인사 속에 지난 한세기 문화사가 다 깃들어 있다. 북한 정권에서 지워버린 초대 미술협회 서기장 기록을 비롯해 한국과 일본 아방가르드 미술사의 유일한 산증인으로서 학술적인 평가 작업도 활발해지고 있다. 그 복합적인 서사를 통해 화가 자신만이 아니라 앞으로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까지 제시할 수 있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긴 연재를 마친 김병기는 새해 4월 102살 생일에 맞춰 ‘회고록’ 출간과 개인전을 할 계획이다. 그는 지금 세계적으로도 드문 ‘최고령 신작’을 그리고 있다.
긴 연재를 마친 김병기는 새해 4월 102살 생일에 맞춰 ‘회고록’ 출간과 개인전을 할 계획이다. 그는 지금 세계적으로도 드문 ‘최고령 신작’을 그리고 있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인근에 있는 화실에서 신작 준비 작업을 하고 있는 김병기 화백.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인근에 있는 화실에서 신작 준비 작업을 하고 있는 김병기 화백.
이날 김 화백과 윤 교수는 앞으로 해야 할 작업도 함께 구상했다. 당장은 새해 4월 화백의 102살 생일에 맞춰 <회고록> 출간과 기념 신작 발표회 준비를 서두르기로 했다. 또 새해 11월 윤 교수가 기획을 맡은 창원비엔날레에서 김 화백의 그림과 막내 아들 김청윤의 조각 작품을 함께 소개하는 ‘부자전’도 추진할 계획이다.

김 화백에게 마지막으로 <한겨레> 독자들에게 남기고 싶은 한마디를 요청했다. “설사 잘못되거나 부끄러운 과거라 해도 그 과정을 거쳤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긍정해야 해요. 대륙 문명과 해양 문명이 공중으로 교류하는 한반도가 새 문명의 중심이 되고 있어요. 서양은 더이상 새로울 게 없어요. 오래 산 사람으로서,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란 사실을 피부로 느껴요.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세계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순결한 자연이 있어요. 세계적으로 가장 의식 수준이 높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건강한 나라예요. 죽음은 그저 따끔할 뿐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이니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 어떤 초월적인 힘이 나를 살게 해요. 그림으로 남기라는 소명을 다하고 싶어요. 맑고 큰 한강을 그리겠어요.”

‘나는 오늘을 살고 있고 언제나 오늘을 그린다’는 101살의 김병기 화백은 ‘영원한 현역’일 수밖에 없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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