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기는 2015년 50년 만에 영구귀국해 한국 국적을 되찾았다. 서울 평창동 화실에 정착한 그는 2016년 100살 생일을 맞아 ‘백세청풍-바람이 일어나다’ 전시회를 열어 <살아야 한다>, <공간반응>, <돌아오다> 연작 등 신작 15점을 포함해 모두 50여점의 회화를 선보였다. 사진 가나아트센터 제공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이후 서울에서 계속 살고 있다. 2015년엔 미국 시민권자에서 한국 국적을 회복했다. 지난해는 가나아트센터에서 백살 기념전 ‘백세청풍(百世淸風)―바람이 일어나다’도 열었다. 백살 현역 화가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여서 대중적 관심도 뜨거웠다. 게다가 지난 7월에는 예술원 회원으로 영입되었다. 워낙 1954년 예술원 창립을 주도했는데 반세기 넘어서야 회원이 됐다.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근황은 어떠한가?
2016년 3월25일~5월1일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 ‘백세청풍-바람이 일어나다’는 세계적으로도 드문 최고령 현역 화가의 신작전으로 국내외의 뜨거운 조명을 받았다. 가나아트센터 제공
“가나아트의 도움으로 북한산 아래 평창동 화실에서 홀로 기거하면서 작업하고 있다. 건강은 염려할 만한 문제가 전혀 없다. 근래는 <한겨레> ‘길을 찾아서’ 회고록 연재 덕분인지 방문객도 많고,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도 끊어지지 않고 있다. 그 바람에 외출도 적지 않다. 하지만 나는 화가다. 특히 새해 4월 102살 생일에 맞춰 열기로 한 개인전 작품에 매진해야 한다. 신작 유화 20~30점을 그릴 계획이다. 마침 미발표 드로잉 250점도 있어, 함께 선보이려고 한다.
나처럼 백살이 넘으면 권리도 없고 의무도 없다. 모든 일은 후진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나는 덤으로 사는 여생이기 때문에 권한이 없다고 본다. 오늘의 한국에 대해 말한다면, 칭찬 이외 할 말이 없다. 큰 틀에서 보면 잘되고 있고 잘하고 있다. 계속 전진해야 한다. 우리 민족은 정말 우수하다. 특히 여성들이 대단하다. 골프나 양궁 같은 스포츠만 잘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한국 여성들이 잘하는 것은 우리 할머니들이 우수했기 때문이다. 정말 세계 최고의 여성들이다. 게다가 한국 여성들은 세계에서 제일 예쁘다. 얼굴만 예쁜 것이 아니라 정신성도 예쁘다.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다. 내가 오랫동안 밖에서 살다 들어와 보니 정말 잘하고 있더라. 감사할 따름이다. 위대한 대한민국이다. 이제 정치도 잘해 문화민족으로 세계 무대에서 대우받는 그런 한국이 되기를 빌 따름이다.
고향을 잃은 디아스포라의 처지에서 다만 걱정되는 것은 작금의 남북문제이다. 남북이 날로 경색되면서, 게다가 전쟁까지 운운하는데, 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 어떻게 쌓아올린 오늘의 조국인데, 전쟁으로 잿더미를 만들려 하는가. 전쟁은 남과 북 모두를 멸망하게 한다. 나는 전쟁을 반대한다면 그 어떤 세력과도 손잡을 준비가 되어 있다.”
지난 7월 대한민국예술원 최고령 신입회원에 선정된 김병기는 10월 서울에 이어 12월부터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제38회 예술원 미술전’에 2점의 신작을 발표해 ‘노익장’을 과시했다. 지난 8월 평창동 화실에서 윤범모 교수에게 미술전 출품작인 <공간반응-레드>(왼쪽)와 <공간반응-블루>(오른쪽)를 소개하고 있다. 사진 김경애 기자
김병기는 지난 12월 5일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예술원 특별전’ 개막식에 직접 참가해 특강을 했다. 문화창조원 복합6관에 전시된 출품작 <공간반응-레드> 앞에 선 김병기.
―미술가로 일생을 보냈다. 작품세계의 특징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나에게 다다이스트 같은 소년기가 있었다. 백남준이 다다이스트로 그쳤다면, 나는 다다를 한 번 더 부정하여 긍정의 세계로 왔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로비의 <다다익선>은 다다이스트 백남준의 세계를 상징하는 것 같다. ‘DADA’ 혹은 ‘多多’. 내 친구 이중섭은 소를, 문학수는 말을 즐겨 그렸다. ‘이중섭 신화’를 말하지만 중섭은 40년 남짓 살았다. 그는 추상의 입구에서 죽었다. 나와 다른 점이 있다. 나는 추상을 통과하고, 오브제를 통과하고, 다시 수공업적이고 원초적인 선으로 돌아왔다. 다 통과한 뒤 종합적인 단계가 지금의 내 세계다. 예술에 있어 ‘1+1’의 답은 2가 아니다. 3도 되고, 5도 되는, 모든 게 다 되는 세계이다. 복합성의 예술. 그것은 창의적인 복합이다. 2는 절충이다. 예술에 있어 제일 나쁜 게 절충이다. 노자의 세계는 0이다. 나는 노자 철학을 존중한다. 시간의 단면이라는 점에서 실존주의도 노자와 비슷하다. 동양의 선불교와 실존주의와 비슷한 점이 있다.
20세기는 양식을 만든 시대였고, 21세기는 그 양식을 부수기도 한다. 지금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들 한다. 나는 나대로 동양성을 가지고 포스트모던하려고 한다. 동양성을 가지고 기왕에 만들어진 것을 부수려고 한다. 서양에서 내려오는 것과 동양에서 내려오는 게 서로 마주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노자의 무위라는 개념은 흥미롭다. 하지 않는 게 하는 것.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는 것. 길이 길일 때 이미 길이 아니라는 노자 철학이 마음에 닿는다. 길이라는 하나의 ‘양식’이 됐을 때 벌써 그것은 양식이 아니다, 길이 아니다. 노자는 이 굉장한 이야기를 2천여년 전에 했다. 20세기에 길이라고 했던 것, 21세기에도 그대로 길인가. 숙성의 과정이 필요하다. 천재적인 작업을 하고 일찍 죽은 예술가들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오랜 기간 숙성해서 나온 예술을 좋아한다. 숙성된 예술. 오늘의 내가 염두에 두고 있는 개념이다.
2015년 한국 국적 되찾고 서울 정착
2016년 ‘백세청풍-바람이 일어나다’
올해 102살 예술원 최고령 신입회원
“백살이 넘으면 권한도 의무도 없다”
“중섭이 ‘추상의 입구’에서 멈췄다면
나는 추상·오브제 넘어 종합 단계”
천재적 요절보다 잘 숙성된 예술 추구
서울대 미대 제자인 화가 맏며느리
조각가 막내아들 청윤 ‘미술가 3대’ 이어
30여년 ‘특별한 인연’ 가나화랑 대표
“밤새워 신간 독파…누가 백살 믿겠나”
김병기·김순환 부부의 결혼 50돌 금혼을 맞아 1989년 뉴욕주 새러토가의 한 식당에서 3녀2남과 손주들까지 모두 모여 가족 사진을 찍었다. 큰딸 김주은-김용철 부부와 손자 형곤, 둘째딸 김주량-스탠리 싱어 부부, 세째딸 김주향-송기중(전 서울대 교수) 부부와 손자 영석·은석, 큰아들 김청익-백혜란 부부와 손자 유철·유진, 막내아들 김청윤-이인희 부부와 손녀 유나.(손자 유립 태어나기 전).
김병기(왼쪽)가 2013년 8월 로스앤젤레스 리앤리갤러리에서 열린 맏며느리 백혜란(오른쪽)의 개인전에서 전시작 <투 힐스>(두개의 언덕)를 보며 평을 하고 있다. 1974년 서울대 미대를 나온 백혜란은 결혼 뒤 도미해 꾸준히 그룹전 활동을 하다 스승이자 시아버지인 김경기의 격려에 힘입어 환갑을 넘어 첫 개인전을 열었다. 사진 <미주중앙일보> 제공.
―부친(김찬영)이 한국의 세번째 서양화가로 근대미술사를 기록한 예술인이다. 가업을 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3대에서는 어떤가?
“맏아들(김청익)은 로스앤젤레스(LA)에서 부동산업으로 잘 살고 있다. 며느리(백혜란)는 원래 내 제자였는데 서울대 출신의 화가이다. 막내인 작은아들(김청윤)은 뉴욕에서 살면서 조각가로 활동하고 있다. 순수 작품으로는 돈벌이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생활 방편으로 치과에서 기공사로 ‘조각기술’을 활용했다. 치아를 만드는 것도 하나의 조각과 같았다. 그런데 최근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고 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배우 더스틴 호프먼이 주연한 영화(<마이어로위츠 이야기>·노아 바움백 감독·2017)인데, 세 남매가 조각가 아버지의 회고전을 준비하기 위해 오랜만에 모이면서 가족 갈등을 풀어가는 이야기라고 했다. 영화 제작에 필요한 조각 작품을 살피다가 청윤의 작품을 주목했단다. 그래서 영화 제작팀에서 아들의 작품을 다 구입해 갔다. 영화 덕분에 조금 유명해졌다고 한다. 막내는 원래 목조각을 했는데 지금은 철조 작품을 하고 있다. 내가 뉴욕에 갈 때면, 아들은 카지노에 같이 가자고 했다. 카지노와 경마를 좋아했던 엄마 생각이 나서 그러는 것이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나는 아들에게 예술론을 강의하곤 했다. 아들도 어눌하지만 나름대로 예술론을 가지고 있다.”
김병기는 둘째 아들이자 막내인 김청윤이 뉴욕에서 조각가로 활동하면서 선친 김찬영에 이어 ‘미술가 3대’를 잇고 있다. 김청윤의 작품은 올 칸영화제 초청작인 영화 <마이어로위츠 이야기>에서 주인공인 조각가 더스틴 호프만의 작품(소품)으로 등장해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영화 <마이어로위츠 이야기>는 원로 조각가 마이어로위츠의 세 남매인 엠마 톰슨, 밴 스틸러(사진 왼쪽), 아담 샌들러(사진 오른쪽)가 아버지(더스틴 호프만)의 회고전을 열면서 가족 갈등을 풀어가는 내용이다. 영화 속 전시장에 마이어로위츠의 작품으로 소개된 김청윤의 철제 조각품(사진 맨왼쪽)이 보인다.
―1986년 귀국전 이후 다섯 번의 개인전을 열었는데, 모두 가나아트에서 주최했다. 물론 처음 인연을 맺도록 내가 매개자 노릇을 하기도 했지만 참 끈끈한 인연 아닌가?
“가나의 이호재 회장과는 그저 작가와 화랑의 관계가 아니다. 혈연관계 이상이다. 일종의 고등수학 수준이다. 한국 전시는 오로지 가나아트에서만 했다. 인연을 맺은 초기에는 전속작가처럼 매월 생활비와 제작비를 지원해주어 내 일생에서 처음으로 그림만 그리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서울이나 파리를 오가며 여행도 하고 그림을 그린 것도 다 가나의 덕이다. 1990년대 파리에서 머물 때, 에콜 데 보자르(미술학교) 앞에 있는 클로드 베르나르 갤러리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내 또래 작가들에게는 일종의 로망처럼 선망하는 곳이다. 프랜시스 베이컨, 자코메티 같은 대작가들이 전시했던 곳이니까. 마침 여성 화랑 주인과 대화를 나누게 됐다. 그는 내 그림에 관심을 갖더니, 개인전 개최를 약속했다. 꿈에라도 그려 볼 수 없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 화랑 주인이 돌연 사망하는 바람에 불발탄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회장이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위로해주고, 훗날 파리에 가나-보부르(Gana-Beaubourg·1995년)를 통해 다시 개인전을 주선해주었다. 1996년 파리 샹젤리제 마티뇽 거리에 있는 베나무-그라비에(Benamou-Gravier) 화랑에서 25점을 전시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가나 회장의 도움 덕분에 평창동 독거 시대를 이어가고 있다. 매일같이 가사 도우미를 비롯해 가나 직원들이 내 화실에 들러 보살펴주고 있다. 작품 제작에만 열중하라는 배려다. 고맙고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가나와의 인연을 맺게 해준 윤범모 교수는 내 평생 은인이다.”
윤범모(왼쪽) 교수와 이호재(오른쪽) 가나아트센터 회장은 1986년 뉴욕주 새러토가를 방문해 김병기의 첫 귀국전을 주선한 이래 30년 넘게 화가와 각별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김병기는 팔순이던 1996년 가나의 주선으로 파리의 베나무-그라비에 화랑에서 개인전을 한 뒤 이듬해 서울에서 유럽 작품 활동을 소개하는 초대전을 열었다. <매일경제> 1997년 4월19일치 기사.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이호재 회장의 김 화백에 대한 ‘봉양’은 정말 부모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회장의 소감을 물어봤다.
“김 화백에게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작가는 돈을 밝히면 안 된다’라는 철학이다. 당신의 입으로는 단 한번도 그림값을 말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개인전을 열 때마다 신기하게도, 꼭 생활할 만큼 작품이 팔렸다. 물론 부인 생전에는 모든 살림을 사모님이 관리했다. 86년 첫 귀국전 때 작품이 제법 팔렸는데 대금 대신 아틀리에 제공을 요청했다. 서울에 머물면서 조국산천 여행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북한산 자락 평창동 단독주택 2층에서 4년쯤 작업을 했는데, 그 지하에는 김구림 화백의 아틀리에도 있었다. 초기 1년간 북한산과 인왕산 등 30여점을 그려 87년 ‘산하재’ 전시회를 했다. 그때도 작품 대금 대신 파리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중반까지 파리 14구역과 시테의 가나 국제레지던스에서 3년 남짓 장기 체류할 수 있게 했다. 그때 이미 칠십대 고령이어서, 급한 마음에 거의 해마다 개인전을 열었다. 가나아트 역사에 없었던 일이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세월이 갈수록 더 건강해지는 것 같다. 1995년 부인 별세 소식을 듣고 뉴욕 장례식에 달려갔다. 워낙 생활의 모든 것을 부인에게 의존하고 있었기에 걱정을 많이 했다.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기운을 빨리 회복해 다시 그림에 몰두했다. 노익장이란 말이 딱 들어맞았다. 지금도 처음 만나는 이들은 화백의 나이를 제대로 알아맞히지 못한다. 피부도 그렇고, 신체도 그렇고, ‘늙었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이후 서울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처음 반년 남짓 평창동 우리 집에서 함께 살기도 했다. 우리 가족은 화백을 ‘아버님’으로 모시려 했다. 놀라운 기억이 하나 있다. 한밤중에 일어나 어쩌다 화백의 방을 보면, 늘 불이 켜져 있었다. 그래서 문을 살짝 열어 보면, 화백은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안경도 쓰지 않고, 거의 매일 책 한 권씩 읽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아침 식탁에서 화백은 늘 간밤에 읽은 책 이야기를 해주었다. 날카로운 서평이었다. 화백은 그렇게 우리 집 서가에 꽂힌 수백 권의 책을 거의 다 읽었다. 그 뒤부터는 수시로 신간 서적을 배달해야 했다. 화백 덕분에 우리 가족은 간접독서를 많이 하게 되었고, 또 지식 수준도 제법 올라갔다. 화백의 지식욕은 엄청나다. 누가 김 화백을 백살 넘은 노인이라고 부르겠는가.”
녹취 기록/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