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43) 국립현대미술관 초청 회고전
―미국 생활의 첫 터전이었던 새러토가를 떠나 1989년 뉴욕 맨해튼 가까운 곳으로 이주했다. 거기서 어떻게 생활했는가?
“1986년 서울 귀국전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미국의 거주지를 옮긴 것도 그중 하나이다. 오랫동안 살아 정들었던 뉴욕주 새러토가를 떠나 맨해튼 북쪽의 부촌인 웨스트체스터로 이사했다. 그곳은 허드슨강이 흐르고, 미국에서 긴 교량의 하나로 꼽히는 태펀지 다리가 있다. 나는 이 다리를 보면서 종종 아폴리네르의 시를 흉내 내 한마디를 읊었다. 사실은 나보다 먼저 이승을 떠난 아내(김순환)를 생각하면서 읊은 것이다. 즉 ‘태펀지 다리 아래 허드슨강은 흐르고, 우리들의 세월과 사랑도 흘러, 사랑해요, 사랑해, 사랑합니다.’ 1995년 6월 아내의 장례식을 치를 무렵 서울의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화가로서 뒤늦게 빛을 보기 시작하던 때, 아내는 서둘러 이 땅을 떠났다. 아내는 평생 고생만 하다가 현재 이역 땅에 외롭게 묻혔다. 풍광 좋은 웨스트체스터힐스의 뉴욕 시립공동묘지에 나를 위한 빈자리도 나란히 마련되어 있다. 뉴욕의 유명 인사들과 김환기·김향안 부부도 잠들어 있는 곳이다. 그 공간을 사용할지 어떨지 이제는 잘 모르겠다. 뉴욕의 한인동포 사회에서 이런 말이 있다. ‘허드슨강을 넘지 말라.’ 이 말은 허드슨강 서쪽의 백인 사회는 아시아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 푸대접한다는 뜻이다. 하기야 시골로 갈수록 보수적 분위기는 강한 편이다. 미 대륙의 동부인 뉴잉글랜드 지역은 ‘백인 아메리카의 원조’라는 자긍심이 강한 곳이면서도 문화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도가 비교적 높은 편이다. 아이비리그의 명문대학이 밀집되어 있듯 문화적 수준 또한 높은 곳이기도 하다.
태펀지 다리 부근 슬리피홀로에 네덜란드 계열의 오래된 교회가 있었다. 1977년 이 교회 건물을 한인장로회에서 인수해 웨체스터 제일교회(담임목사 김영)를 열었다. 나는 그 교회 장로로서, 문병기·손인실 부부를 인도하기도 했다. 교회 신자들끼리 화목하게 지내면서 여행도 많이 다녔다. 뒤늦게 운전을 배워 직접 차를 몰고 대륙의 많은 곳을 여행했다. 영광스럽게도 내가 웨체스터 제일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제작했다. 원래 교회 제단 정면에 첨아치형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었는데 유명한 루이스 티퍼니의 명품이었다. 교회 인계 때 매도자가 티퍼니 작품을 뜯어가는 바람에 빈자리로 남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은 화가인 나에게 소임이 맡겨졌다. 나는 롱아일랜드에서 온 전문가 도움을 얻어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을 디자인했다. 구도는 단순했다. 검은색 십자가 뒤에 구름 모양의 선을 반복시키고, 꼭대기의 원형 안에는 십자가를 맨 양을 그려 넣었다. 이 작품은 특히 아침 햇살이 비칠 때면 장관을 이룬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이 인도해서 만들었다’고 말해준 덕분에 유명해졌다. 물론 미술은 신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설명하는 것은 목사의 일이지 화가의 일은 아니라고 믿는다. 성경을 단순 도해하듯 그리는 행위는 내 체질과 맞지 않았다.”
1989년 맨해튼 북쪽 웨체스터로 이사
95년 먼저 떠난 아내 시립공동묘지에
김환기·김향안 부부도 나란히 묻힌 곳
“태펀지 다리 아래 허드슨은 흐르고
~사랑해요, 사랑해, 사랑합니다” 한인교회 스테인드글라스 십자가 제작
“하지만 구원 설명은 화가의 일 아냐” 2006년 엘에이 ‘마운틴 이스트 시대’
“동부서 서부로 오니 동양 가까운 듯”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 개인전
80년대말 이후 100점 ‘감각의 분할’전
‘북한산 세한도’ 연작·‘분단풍경’ 등
“그림은 우리 인생처럼 늘 미완 상태”?
―2006년 동부 뉴욕에서 서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가?
“구십 노령으로 접어들고 게다가 혼자 살다 보니 자녀들의 걱정이 많았다. 건강 문제도 있어서 큰아들 내외가 사는 엘에이(LA)로 옮기게 되었다. 하지만 나 스스로 ‘시아버지 화가’는 용납할 수 없었다. 베벌리힐스 부근에 거처를 마련해 혼자 생활했다. 베벌리힐스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배우들을 비롯한 특수계층의 동네다. 나는 유명한 할리우드 사인이 건너다 보이는 그리피스 천문대 입구의 고층건물 2개 가운데 하나인 로스펠리즈 8층에서 살았다. 창밖으로 산이 보여 ‘마운틴 이스트’라 스스로 이름지었다. 엘에이에 자리를 잡으니 동양으로 가는 길의 절반쯤 온 것 같았다. 서부는 동부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나는 새로운 형식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얀 바탕에 검은 묵선을 이용한 그림이 그 시절 작품이다.
내 그림은 몇 개월 혹은 몇 년 이상 걸리기도 한다. 덧칠하고 또 덧칠하면서 수정한다. 하기야 누군가는 말했다. 자신의 작품을 보고 만족한다면 그때부터 더 이상 작가 자질이 없다고. 하기야 작가가 불만이 없다면 그게 어디 올바른 작가일까. 나는 내 작품에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다. 작품은 미완 상태에서 완성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다. 그림은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이다. 작품은 우리 인생처럼 항상 미완 상태이다. 특정 대상을 그렸는데, 몇 달 뒤에 보면 애초의 대상과 전혀 관계없는 그림이 되어 있기도 했다. 하나의 변모이다. 정물화가 풍경화가 되는 등.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특히 한국의 산야는 계속 변모했다. 헐벗은 산이 숲으로 바뀌든가, 아니면 아파트촌으로 바뀌기도 했다. 변모, 그 자체였다. 한국 현대 풍경은 마치 초현실주의의 한 방법론과 같았다. 예기치 못한 변모의 연속이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과 같았다. 이는 서울을 출입하면서 느꼈던 인상이기도 하다. 나의 <산하재> 연작과 <분단 풍경>은 분단 한국의 현대 풍경을 염두에 두고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붉은색은 면이 되고 때로 뜻하지 않은 추상형태로 이어지기도 했다.”
―2014년 12월 국립현대미술관 초청으로 회고전이 열렸다. 만시지탄의 느낌도 없지 않으나 조국은 뒤늦게나마 작가적 위상을 인정해 대규모 개인전을 열어준 셈이다. 그 소감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감각의 분할’이라는 제목으로 회고전을 열었다. 그 제목은 전시 담당자가 1980년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내 작품에서 그런 특징을 읽어내어 지었다. 회화 70여점과 드로잉 30여점을 소개했다. 그때 개막식에서 했던 말을 기억한다. ‘내가 이처럼 거창하고 이처럼 멋있는 나라를 두고 어디 있었나 하는 느낌을 지금 갖습니다. 제가 돌아왔습니다. 여러분은 내 객관이요, 주관입니다. 저는 여러분과 같이 있었습니다. 함께하는 한마음으로 여생을 살고자 합니다. 여생이랄 것도 얼마 안 남았지만(웃음). 한국을 떠난 지 49년이 됐습니다. 49살에 한국을 떠나 49년 만이니 98살입니다. 밸런스(균형)가 맞는다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서양만 생각했습니다. 서양에 가서는 동양만 생각했어요. 동양을 생각함은 나 자신을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김병기 회고전’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원로작가 초대전 행사의 하나였다. 미술관은 한국 미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장르를 안배해 원로작가를 30명을 선정했다. 공교롭게도 필자가 그때 작가 선정위원회의 위원장 소임을 맡았다. 한꺼번에 많은 작가를 선정하여 공개한 것은 설혹 관장이 교체되더라도 이 사업만큼은 지속성을 유지시켜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대미술사의 체계적 정리 사업은 역시(?) 일과성 행사로 끝나고 말았다. 아무튼 ‘김병기 회고전’은 국가가 원로작가를 예우하는 정중한 잔치였다. 그만큼 대중적 관심도도 높았다. 김병기 예술세계에 대한 본격적 재조명 작업의 단초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회고전 도록의 글에 이런 대목이 보인다. 화가 자신도 공감했다고 알려진 부분이다.
“김병기의 선은 단순한 사물의 윤곽선이 아니다. 그것은 대상의 입체적인 묘사에 봉사하는 해칭선도 아니며, 캔버스의 표면을 덮은 피상적인 장식선은 더더욱 아니다. 심지어 그의 선은 단지 선이라고만 부를 수도 없는 그런 선이다. 그것은 내려치는 획이자 쓰다듬는 붓질이며 나아가 무의식의 자동기술이자 확고한 자아의 표현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러한 선의 운용에 주목하여 김병기의 그림을 ‘촉지적 선묘’(觸地的 線描)라 칭하고 그 고유한 특징을 살펴보려 한다. 촉지적 선묘는, 후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그의 선이 두 가지의 상이한 특징, 즉 선적인 양식의 촉각성과 회화적인 양식의 시각성을 포괄하는 ‘촉지적(haptic) 특징과 동양 수묵화의 출발이자 문인화의 요체인 골법(骨法)과 용필(用筆)이 두드러지는 ‘서체적인’(calligraphic) 특징을 복합적으로 지니고 있음을 감안한 것이다. (...) 김병기가 자신의 회화를 단순한 ‘현실’(reality)이 아니라 하나의 ‘실현’(realization)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의 작업은 그 자신이 언급한 대로 자연과 형상의 ‘절충이 아니라 사이’(in-between)에 놓여 있으며 그 사이 자체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형상과 비형상의 사이, 혹은 구상과 추상의 사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연과 정신이 서로 얽히고 더듬으며 교차하고 관통하는 그 감각의 과정을 회화적으로 구현한다는 의미에서, 결코 영원히 완성되지 않을 ‘사이의 실현’이며 결코 완전히 메꾸어질 수 없는 ‘간극의 표현’이다. 그의 ‘촉지적 선묘’는 바로 이 자연과 정신의 얽힘과 만짐, 교차와 접속이 전개되는 방식이자 그 기록이라 할 수 있다.”(정은영, ‘감각의 분할’ 전시 도록, 2014,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출품작 가운데 스스로 인상적인 작품은?
“북한산을 소재로 하여 그린 작품은 다 ‘세한도’ 계열이라고 볼 수 있다. 잘 알려졌다시피 <세한도>는 제주 유배 시절 추사 김정희가 그린 걸작이지 않은가. 고통의 시간을 추사는 <세한도>에 자신의 심경을 담았던 것이다. 나는 90년대 후반 서울 장기체류를 통해 조국의 산천을 새롭게 인식하는 기회를 얻었고 특히 인왕산과 북한산을 주목했다. 그 무렵 광화문의 숙소 18층에서 인왕산을 보면서 몇 장의 작품을 만들었다.
<북한산 세한도>(2001·2002) 연작은 평창동 화실에서 지내며 북한산을 화면 가득 표현하고 하단부에는 마침 화실에 있던 나무기러기 조각을 그려 넣었다. 북한산 풍경 아래 웬 기러기인가. 기러기는 앞장서서 계절을 인식하고 또 앞장서서 멀리 날아간다. 그런 기러기가 날지 못하는 현실, 나무기러기 신세. 나는 북한산 풍경에 그런 상징성을 담고자 했다. 풍경 속의 목안(木雁)은 나의 상징 코드이다. 날지 못하는 새. 분단 조국을 염두에 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인왕산>(2005)은 화면 상단에 인왕산의 능선을 원경으로 표현했고, 산 아래는 경계선을 표시하여 남북 분단을 암시했다. 그래서 인왕산 아래 풍경은 사각형 도형과 직선 그리고 빨간색 장애물 등을 넣었다. 옥상 위의 설비를 장애물로 바꿔 분단 상황을 상징했다. 빨간색과 브라운 톤이 잘 어울리게 했다. 위의 인왕산 작품보다 또 다른 <인왕산>(2005)은 비교적 산을 가까이 끌어왔고, 경계선 아래의 도형은 단순화시켰다. 그림 아래쪽 사각형의 파랑과 빨강은 남대문 단청에서 끌어온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의 사각형은 광화문에서 본 경찰청 건물 모습이다. 자연을 배경으로 인간사회의 단면을 상징화했다고 볼 수 있다. 아내를 먼 곳으로 보내고 서울에 와서 그린 작품들이다.”
녹취 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김병기는 2014년 12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주최한 ‘김병기 회고전-감각의 분할’ 전시회를 통해 화단 안팎의 화려한 조명을 받았다. 한국현대미술 원로작가 30인을 선정한 초대전의 첫번째 작가로, 미국 이주 49년 만인 ‘98살의 금의환향’이었다. 회화 70점과 드로잉 30점 등 모두 100여점을 선보인 대규모 전시회의 포스터에는 <성스러운 삼각>(1999년작)이 실렸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90년대 뉴욕주의 한인장로교회인 웨체스터 제일교회에서 장로로 신앙 생활을 한 김병기는 교회 제단의 첨아치형 스테인드글라스 검은 십자가상을 디자인해 제작하기도 했다. 사진 웨체스터 제일교회 누리집 갈무리
1989년 미국 뉴욕주 새러토가에서 맨해튼 북쪽의 웨스트체스터로 이사한 김병기는 95년 부인과 사별한 뒤에도 10여년 이곳에서 홀로 살았다. 스카스 데일의 자택 화실 벽에 <바람 속의 삼각>이 걸려 있다.
95년 먼저 떠난 아내 시립공동묘지에
김환기·김향안 부부도 나란히 묻힌 곳
“태펀지 다리 아래 허드슨은 흐르고
~사랑해요, 사랑해, 사랑합니다” 한인교회 스테인드글라스 십자가 제작
“하지만 구원 설명은 화가의 일 아냐” 2006년 엘에이 ‘마운틴 이스트 시대’
“동부서 서부로 오니 동양 가까운 듯”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초대 개인전
80년대말 이후 100점 ‘감각의 분할’전
‘북한산 세한도’ 연작·‘분단풍경’ 등
“그림은 우리 인생처럼 늘 미완 상태”?
2006년 김병기는 큰아들네가 사는 서부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으나 베벌리힐스 부근 로스펠리즈 화실에서 여전히 혼자 살며 왕성한 그림 작업을 했다. 그 시기 대표작인 <액션 인 마운틴 이스트>, 2016년 10월 서울대 개교 70돌 기념전에 출품했다.
김병기는 2014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 개막일인 12월2일 기자간담회에서 직접 <가로수>(1956년작)를 비롯한 전시작을 돌아보며 설명해 노익장을 과시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5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추상의 실험-형상과 비형상의 공존-감각의 분할-미완의 미학’ 4부로 정리한 2104년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에서 김병기는 <북한산 세한도>(2000년작·사진) 연작 등 한국 현실을 담은 작품에 역점을 두었다.
김병기는 2000년 개인전 이후 한동안 서울 평창동의 화실에서 지내며 <북한산 세한도>(2001년작·사진) 연작을 그렸다. 아래쪽에 그려넣은 나무기러기 조각은 자유롭게 날지 못하는 분단 현실을 상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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