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42회) 유럽 여행과 작품 세계
―젊은 시절의 파리 유학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70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여행하게 되었다. 그때 파리의 감회는 어떠했는가?
“일본 유학 시절 스무살 때 첫사랑에 실패하고 귀국한 아픈 기억이 있다. 프랑스 유학 계획도 자연스럽게 무너졌다. 집안 어른들이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게 했다. 파리 유학은 사라진 하나의 꿈이 되었다. 화가였던 부친(김찬영)이 도쿄가 부족하면 파리 유학까지 하라고 당부했던 그런 파리였다. 내가 파리를 처음 간 것은 1986년 서울 귀국전 이후였다. 20대의 꿈을 70대에 이르러 변죽만 울린 셈이다. 파리 시테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포함하여 3년 정도 유럽에서 체류했다. 가나아트센터 이호재 회장의 도움이 컸다. 인연이란 참 묘했다. 아무튼 내 미술의 정신적 기초는 프랑스와 연결되어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만큼 프랑스 미술은 내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파리는 유럽의 복판에 있다. 나의 유럽 여행 첫 기착지는 파리였다. 에밀 졸라 거리에서 여장을 풀었는데 미라보 다리와 가까운 곳이었다. 학생 시절부터 나는 아폴리네르의 시를 읊조리면서 파리를 상상했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흐른다.’ 하지만 막상 미라보 다리에 가보니 추억 속의 아름다운 다리는 아니었다. 센강도 생각보다 왜소한데다 미라보는 시멘트 범벅의 공사장이었다. 꿈과 현실의 괴리를 느껴야 했다. 그런 마음을 나는 <센강은 흐르고>(1992,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에 담았다. 직선과 사각형 같은 도형을 여러 군데 배치하고, 멀리 강을 표현했다. 여신 조각상을 거칠게 강조했고, 고철 더미 공사장과 크레인 같은 현대사회의 단면을 상징하듯 표현했다. 이 작품은 그해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원로작가 회화전’에 출품했는데, 전시 개막식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당시 미술계는 이대원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이대원의 영향력이 컸다. 그는 1950년대 내가 미술단체 일을 하던 명동의 같은 건물에서 무역회사 사원으로 일했다. 법대 출신으로 뒤에 화가가 되어 과수원 풍경을 많이 그렸고, 홍익대 총장과 예술원 회장 등을 지냈다. 과천 미술관의 전시 개막식에서 곁에 있던 화가 김영주가 한마디 했다. ‘자네 없는 사이에 세상은 이렇게 변했네.’ 그는 미술계의 중심 이동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사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 때 내 작품은 구석에 걸리는 등 ‘중심 이동’을 실감하게 했다.”
―파리에 이어 본격적으로 유럽 여행을 했다. 그 여행은 어떠했는가?
“유럽 여행을 하면서 북구와 남구의 환경적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남구는 태양과 가깝고 공기가 맑아서 그런지 시야가 넓었다. 사실적이고 고전적인 화풍으로 연결되었다. 반면 북구는 해가 일찍 지고 겨울도 길었다. 일찍 어두워지니 술집 같은 실내에 들어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토론을 즐기게 되었다. 그래서 지성적이고 관념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노르웨이에 가보니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1910)와 같은 분위기를 그대로 실감할 수 있었다. 붉게 노을 진 하늘 아래 강과 산이 있고, 다리 위의 인물이 불안한 듯 서 있었다. <절규>라는 그림이 화가가 꾸민 것이 아니라 환경 자체가 바로 그랬다.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마치 지구의 끝에서 고함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북구에서 <절규>를 실감할 수 있었다. 예술작품은 환경의 산물이 아닌가.
남프랑스 여행도 인상적이었다. 나는 소년 시절부터 세잔을 존경했다. 자연스럽게 세잔이 살았던 마을을 찾았다. 아내와 함께 엑상프로방스에 갔다. 세잔이 그린 생트빅투아르 산을 보았다. 또 세잔이 걸었던 길을 나도 걸었다. 마차가 다니던 시절의 길 그대로였다. 아주 고적한 곳이고, 대여섯 채의 집이 있었다. 거기서 세잔은 걸작을 제작했다. 그는 추상회화를 시도하지 않았지만 형상과 추상의 틈새에서 현대미술의 길을 열어주었다. 요하임 가스케가 쓴 전기 <세잔-그가 내게 말한 것>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가스케가 세잔에게 뭐 하고 있느냐고 질문했다. 이에 세잔은 두 손을 깍지 끼면서 ‘이렇게 하고 있네’라고 대답했다. 앵그르·들라크루아·쿠르베·코로 등 고전을 섞어 새것을 만들고 있다는 의미였다. 세잔은 17세기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을 좋아했다. 그는 말했다. ‘푸생의 하늘에 눈물을 가하고 싶다.’ 이는 푸생의 고전적 작품에 감정을 넣고 싶다는 의미다. 세잔의 죽마지우로 에밀 졸라가 있다. 이들은 어려서 엑상프로방스에서 뛰어놀았다. 토목기사의 아들인 졸라는 뒤에 파리에서 신문기자를 지내면서 소설을 써 유명해졌다. 하루는 세잔이 졸라의 집에 놀러 가니, 졸라가 양탄자 깔린 저택의 회전의자에 앉아 있었다. 이 모습을 보고 세잔은 졸라가 타락했다며 돌아 나왔다. 작가는 결핍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물질적 풍요로움은 창작을 방해한다. 성공했다고 느꼈을 때가 위기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나는 세잔의 마을에서 <생트빅투아르 산에서의 독백>(1995)을 그렸다. 세잔을 생각하면서, 아니,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그림을 그렸다. ‘독백’만은 아니었다. ‘세잔 선생, 당신이 염원했던 좋은 그림은 추상화, 그것도 벽지 같은 추상화입니까?’ 나는 질문을 했다. 세잔은 대답했다. ‘아니요.’ 세잔의 예술정신은 두고두고 나로 하여금 반추하게 했다. 생트빅투아르에서 그린 내 작품은 풍경화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풍경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았다. 멀리 생트빅투아르 산 능선이 있고, 숲도 있고, 길도 있다. 거기에 직선이나 삼각형 같은 도형도 섞여 있다. 풍경을 내 나름대로 해석한 구성이다. ‘절제’라는 단어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인지 화면은 전체적으로 조용하다. 마치 동양의 수묵화처럼 투명한 세계와 연결되기도 한다. 원색의 강렬함보다 엷은 물감으로 절제하듯 풍경보다 ‘정신’을 표현했다. 사실 나는 세잔의 현지 풍경보다 세잔의 정신세계에서 그의 내면을 표현하려 했다. 그래서 나로서는 애착이 가는 작품이다. 작품 <엑상프로방스의 플라타너스>(1992)는 현지에서 그린 작품이다. 상하좌우의 수직구도를 기본으로 하여 복판에 수백년 묵은 커다란 플라타너스를 그렸다. Y자 형태로 벌린 나뭇가지가 마치 두 다리를 벌리고 거꾸로 서 있는 여자처럼 보였다. 생명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표현기법의 특징은 나무와 벽면을 밝게 처리하여 앞으로 튀어나오게 역전시켰다는 점이다. 세잔에 대한 오마주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
세잔은 대상을 그리는 것을 단념했다. 이를 발전적으로 실험한 것이 피카소와 브라크다. 이게 미술계 주류를 이루었고, 추상화의 기본을 이루었다. 1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16년 스위스에서 다다가 생겼다. 다다의 잿더미에서 1924년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가 나왔다. 추상주의는 외부적인 것이고, 초현실주의는 내면적인 것이다. 이들 상호간 영향을 주면서 발전해온 것이 현대미술이다. 추상주의를 몰고 나가면 미니멀리즘이 된다. 리얼리즘과 미니멀리즘의 삼각형 꼭짓점에 말레비치가 있다. 요제프 알버스는 꼭대기로 올라갔지만 말레비치는 형상을 다시 찾아 내려왔다. 재스퍼 존스는 형상과 추상의 틈새를 시도했다. 세잔과 같은 맥락이다. 세잔은 자연을 그린 것 같지만 자연을 그리지 않았다.
<르누아르 장원의 올리브>(1994)는 카뉴쉬르메르 올리브 언덕에 있는 르누아르의 장원을 그린 작품이다. 장원은 정원보다 큰 의미다. 르누아르 의자에 앉아 그의 정원을 보았다. 유럽 전역을 여행하고 난 뒤에 아내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르누아르 의자에 앉아 있을 때가 일생에서 최고로 행복한 순간이었다.’ 르누아르 장원에서 그린 내 작품은 고목 같은 올리브 나무를 전면에 크게 표현했다. 뚱뚱하고 풍만한 모습, 즉 르누아르의 표현 형식을 염두에 두었다. 올리브 뒤로 역삼각형 등 나의 ‘해석’이 들어 있다. 이 그림 속에 르누아르의 화풍상 특징을 담으려 했다. 나는 남프랑스에서 폴 발레리의 <지중해의 감흥>이라는 에세이를 생각했다. 발레리는 그 바닷가에서 범선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온 노란 오렌지를 실은 배와 그 뒤의 울트라마린 배경의 색채를 주목했다. 발레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푸른 파도에 붉은 포도주를 붓는다.’ 빨강과 파랑의 대비, 이는 상징성이 크다. 게다가 바다에 한 잔의 포도주를 붓는 행위, 이것이 예술행위이기도 하다. 바다에 한 잔의 포도주를 붓는 행위는 상징적이지 않은가. 레오나르도 다빈치, 에드가르 드가, 폴 발레리, 이들 3인은 유럽 정신사의 세모꼴 축으로 알려졌다. 나는 남불의 바닷가에서 폴 발레리를 생각했다.”
1986년 이후 파리 레지던스 기회
90년대 중반까지 여러번 유럽 순례 일본유학 때 부친 권유했던 ‘파리’
“내 미술의 기초이자 영감 주는 곳”
공사현장 된 미라보 다리에 실망도
꿈과 현실 괴리 ‘센강은 흐르고’에 세잔-졸라 뛰놀던 엑상프로방스
소년 때부터 존경한 세잔과 ‘교감’
‘생트빅투아르 산에서의 독백’ 그려 남프랑스 해변서 폴 발레리 생각
‘푸른 파도에 붉은 포도주 붓는다’ 르누아르 말년 지낸 올리브 정원
“아내, 일생 최고로 행복한 순간”
처음이자 마지막 부부동반 여행
―유럽 여행은 여러모로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현대미술 등 다른 분야에 대한 인상은?
“유럽 여행을 하면서 물론 현대미술 작품도 많이 보았다. 마르셀 뒤샹과 요제프 보이스의 작품도 인상 깊게 보았다. 평면 작품에서 오브제로 넘어가는 현대미술의 다양한 면모도 느낄 수 있었다. 뒤샹의 작품에서 인간의 성(性) 같은 본질 문제를, 그리고 보이스의 작품에서 정치 문제를 생각하게 했다. 보이스는 항상 노트를 했다. 그만큼 이지적인 작가였다. 파리 퐁피두센터의 마지막 전시실에 있는 보이스의 작품들은 흰색 보자기로 덮여 있었다. 폐업이다, 이제 다 끝났다는 이야기 같았다. 독일의 쾰른은 아주 인상적인 도시다. 기차역 앞에 거대한 성당이 있고, 현대미술관도 있다. 쾰른에서 보이스의 의자 작품을 보았다. 의자 위에 삼각형으로 쌓은 치즈, 즉 치즈 의자는 상징성이 강했다. 일종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풍자적 의자 같았다. 요제프 보이스와 백남준의 인연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파리는 나의 가족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한마디로 우리 가족은 디아스포라(유민)다. 고향을 잃고 세계적 떠돌이가 된 유대인과 다를 바 없다. 고향 평양을 떠나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터전을 닦았기 때문이다. 내 가족은 미국에 정착했다. 하지만 형님네 가족은 모두 프랑스로 가 자리를 잡았다.
미국 생활과 유럽 여행은 나로 하여금 화가로서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도 했다. 원래 나의 성품은 아버지의 감각주의와 어머니의 청교도적 성향의 싸움 아래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랑과 증오의 공존이다. 증오는 반항심을 키웠다. 뭔가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욕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나는 신라 토기를 즐겨 그리기도 했다. 부서지기 쉬운 토기 옆에 망치를 그려 넣었다. 토기와 망치, 이는 내 성향을 상징한다. 토기는 전통이고, 나는 전통을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을 때려부수려는 충동이 있다. 그래서 망치가 필요했다. 평양은 남한 사람처럼 전통성이 강하지 않다. 오히려 진보성이 강해 새것에 대한 관심이 크다. 내 그림은 항상 수직과 수평이 기본을 이루고 있다. 사선도 좋아한다. 점, 선이 합쳐 면이 되고, 또 사선이 입체를 만든다. 중세는 평면으로 만족했지만 르네상스는 입체를 중시했고, 원근법도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법칙에 연연하지 않았다. 크게 말해 나의 예술 바탕에 흐르는 내면은 바로 휴머니즘이라 할 수 있다. 유럽 여행을 통해 이런 점을 더 실감할 수 있었다.”
녹취·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김병기는 1986년 첫 귀국전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일찍이 유학을 꿈꿨던 파리를 비롯해 유럽 곳곳을 여러차례 순례했다. 그 가운데 소년시절부터 좋아했던 폴 세잔의 고향인 남프랑스의 엑상프로방스에서 가장 많은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세잔이 가장 즐겨 그렸던 생트빅투아르 산과 지금은 박물관이 된 아틀리에를 둘러보며 <생트빅투아르 산에서의 독백>(1995년)을 그렸다.
세잔은 “나 자신은 생트빅투아르의 의식”이라고 할 만큼 1880년대 중반부터 죽는 날까지 20여년간 생트빅투아르 산을 그렸다. <커다란 소나무와 생트빅투아르 산>(1887년)은 세잔이 비평가이자 훗날 전기를 쓴 요하임 가스케와 그 아래에서 대화를 나눴다는 소나무를 그린 것이다.
김병기는 1992년 가나아트센터 후원으로 파리 시테섬의 예술인 레지던스에서 머물며 20대부터 꿈꿔온 프랑스와 유럽의 미술를 탐구했다.
1992년 파리의 센강변에 나가 미라보 다리를 그리고 있는 김병기를 제자에서 큰며느리가 된 화가 백혜란이 찍었다.
김병기는 아폴리네르의 시에서 노래했던 낭만 대신 공사장으로 변한 미라보 다리와 파리의 현실을 <센강은 흐르고>에서 조형적으로 표현했다. 1992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원로작가 회화전’에 소개됐다.
세잔은 1885년 무렵 엑상프로방스 외곽 마을에 정착해 말년 20여년간 생트빅투아르산을 그려 수십장의 작품을 남겼다. 1895년 무렵의 자화상.
세잔이 그린 20대 중반 에밀 졸라의 초상(1864년). 엑상프로방스에서 나고 자란 죽마고우 졸라와 수십년간 편지를 주고 받으며 우정을 나눴던 세잔은 정작 졸라가 소설가로 성공한 이후 절교를 했다. 엑상프로방스 그라넷미술관 소장.
세잔이 그린 요하임 가스케의 초상(1896~97년작). 생트빅투아르산 시절 말년의 세잔과 절친했던 비평가 가스케는 훗날 <세잔-그가 내게 말한 것>을 썼다. 프라하국립미술관 소장.
엑상프로방스의 고향 마을에 있는 생트 빅투아르 산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세잔은 1906년 10월 쓰러지던 날까지도 이 산을 그렸다. 1906년 마지막까지 그린 <생트 빅트아르 산>. 타이슨 콜렉션 소장.
김병기는 1994년 예술 밸트로 유명한 남프랑스의 프로방스 해안지대를 돌며 카뉴-쉬르-메르에 있는 르누아르의 대정원에서 올리브 나무 작품을 여럿 그렸다. 미발표작으로 미국 뉴욕의 웨체스터에 있는 화실에 걸려 있다.
르누아르는 1905년 남프랑스의 해변 휴양지 카뉴-쉬르-메르에 있는 올리브 나무 정원에 정착해 말년까지 인상파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색채의 향연을 구가했다. 말년까지 살았던 집을 그린 <클레트의 농가>.
지금도 르누아르 기념관 앞에 있는 천년생 올리브 나무 고목은 여러 화가들의 ‘모델’로도 유명하다.
김병기는 <르누아르 장원의 올리브>(1994년)에서 르누아르에 대한 오마주로 풍만한 올리브 나무를 표현했다.
90년대 중반까지 여러번 유럽 순례 일본유학 때 부친 권유했던 ‘파리’
“내 미술의 기초이자 영감 주는 곳”
공사현장 된 미라보 다리에 실망도
꿈과 현실 괴리 ‘센강은 흐르고’에 세잔-졸라 뛰놀던 엑상프로방스
소년 때부터 존경한 세잔과 ‘교감’
‘생트빅투아르 산에서의 독백’ 그려 남프랑스 해변서 폴 발레리 생각
‘푸른 파도에 붉은 포도주 붓는다’ 르누아르 말년 지낸 올리브 정원
“아내, 일생 최고로 행복한 순간”
처음이자 마지막 부부동반 여행
김병기의 부인 김순환은 칠순 말년에 생트빅투아르 산과 르누아르의 장원 등을 돌아보며 가장 행복해했다. 부인은 1995년 6월 작고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부부동반 유럽 여행이 됐다.
김병기는 자신의 내면에 공존하는 ‘아버지의 감각주의와 어머니의 청교도적 성향’ ‘사랑과 증오’의 갈등이 창작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전통을 사랑하면서도 때려부수고 싶은 충동을 토기와 망치 등으로 표현한 <공방정물>(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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