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41) 20여년 만의 귀국전
“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들떠 있는 뉴욕시를 빠져나와 방향도 없이 캐나다 쪽의 고속도로를 달린 적이 있다. 맨해튼은 록펠러 센터의 장식등처럼 다소 음산하게 또 한편으로는 광란에 가깝게 저무는 한 해를 새삼스럽게 반추하고 있었다. 4시간가량 어둠을 헤치고 질주할 무렵, 핸들을 잡은 재미화가 김차섭씨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새러토가를 지나고 있군….’ ‘아, 새러토가. 김병기 화백이 칩거하고 계신 곳….’ 뚜렷한 목적도 없이 출발했던 겨울여행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망설임조차 없이 우리는 행선지를 바꾸었다. 자정 가까운 시각에 우리는 함박눈으로 덮인 한 적막 속의 아담한 집으로 인도되었다. 노화가와 필자의 만남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그날 밤 우리는 창밖이 환해질 때까지 철야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밤새 대화를 나누었다. (…) 새로운 세계를 찾아 안락한 보금자리를 떠났다. 이러한 결심은 드디어 ‘미국으로의 증발’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물론 그 뒤로 국내에서 그의 존재는 서서히 망각의 늪 속으로 잠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0여년, 고국을 떠난 뒤 단 한 번의 방문조차 용인치 않고 ‘자기 세계’와 겨루던 그는 어느덧 70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번 서울 전시를 주선하면서 필자는 노화가에게 구김살 없고 신념에 가득 찬, 때로는 예술에 대한 그리고 조국에 대한 편애에 가까우리만큼의 열정을 수시로 확인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기도 했다.”(윤범모, ‘20여년 만의 귀향’, 김병기 개인전 도록, 가나화랑, 1986년)
정말 그랬다. 1985년 겨울의 새러토가는 하얀 눈 속에서 뜨거운 열정을 반추하게 했다. 김병기 화백과의 만남. 첫 만남 이후 나는 혼자 새러토가를 다시 찾아가 일주일가량을 머물며 화백의 일대기를 녹취했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미술사였다. 또렷한 기억력과 풍부한 표현력,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 그것은 미술문화계의 중심에서 활동한 증언의 사료적 가치였다. 미시사의 극치였다. 그때 화가가 살던 링컨 애비뉴의 저택 한편에는 칩거의 산물, 즉 ‘미공개 작품’이 쌓여 있었다. 나는 그림을 하나하나 보면서 제작에 얽힌 뒷이야기를 들었다. 그 작품들을 서울에서 발표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화백은 이런 말을 들려주기도 했다. ‘서울의 제자나 후배가 새러토가까지 찾아온 적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왜 미국 외딴곳에서 은둔하고 있느냐’면서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큰소리일수록 실망으로 남게 했다.’ 몇 차례의 실망을 겪은 이후 이제 서울에서 화가가 온다면 걱정부터 든다고 했다. 이런 감회 뒤에 남는 씁쓸한 표정,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화백의 집 전화로 서울 가나화랑으로 연결했다. 그렇게 하여 20년의 칩거 생활을 접고, 김병기는 서울 화단과 다시 연결되었다. 1986년 5월의 귀국 개인전. 실로 감격스러운 자리였다.
1985년 12월 윤범모 ‘우연한 방문’
“겨울여행 도중 새러토가 지나다 들러”
일주일간 머물며 밤샘 구술녹취
“은거 20년 만에 ‘증발 화가’ 발견”
곧바로 서울로 전화해 전시 주선 1986년 5월 가나화랑 ‘첫 귀국전’
“대성공 자평…일부는 실망 눈치도”
예전 ‘추상성’ 더 강화 기대한듯 전시 호응 덕분에 ‘전국여행’ 감회
1987년 설악산·경주·제주도…
“인사동 옥상에서 ‘인왕제색’ 그려”
민주화 시위대 붉은 머리띠 ‘차용’ 조국 분단풍경 ‘산하재’ 연작으로
“내 고향 강서 고분벽화 떠올리며”
―20년 만의 귀국 개인전 소감은?
“만 20년이 넘어 귀국하니 얼마나 감동적이었겠는가. 살아생전 서울 구경이라도 다시 할 수 있을까, 거의 포기 상태에서 ‘윤범모의 발견’ 덕분에 고국 땅을 밟으니 가슴이 벅차지 않을 수 없었다. 가나화랑에서의 개인전은 대성공이었다고 자평하고 싶다. 금의환향이라는 단어는 쓰고 싶지 않지만. 다만 현대미술 운동을 하던 화가들은 내 개인전을 보고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극단적 추상화를 기대하고 전시장에 왔으나, 내 작품은 비형상을 거친 형상성의 그림이었다. 게다가 캔버스 그림이면서 물감을 진하게 칠하지도 않고, 거기다 여백같이 비어 있는 부분도 있어 ‘그리다 만 그림’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도미 이전의 그림은 전시 출품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완성도를 중요시 여겼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작품은 출품을 의식하지 않고 그렸기 때문에 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이는 미완성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유화라 하면, 캔버스 전면을 물감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는 제작 방식도 하나의 고정관념에 불과했다. 아무튼 1986년의 서울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눈물을 많이 흘리게 했다.”
“동포들과 함께 목욕하는 즐거움을 그대는 아는가// 이십여 년 만에 고국을 방문하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온 노화가의 상기된 표정// 서울 도착 직후부터/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줄기찬 눈물/ 가는 데마다 흘려야 했던/ 그 눈물// 살아생전 다시 밟을 수 없을 거라고 체념했던/ 고국 땅/ 이십여 년 만에 다시 찾았으니/ 그까짓 눈물쯤 흘리지 않을 수 있겠나/ 하지만 부끄러웠지/ 눈물의 원천은/ 고국 방문의 감동 때문이 아니라/ 서울 시내를 감싸고 있는/ 최루탄 가스 때문이라는 것을// 서울을 거쳐/ 고향인 평양까지 여행하는 것이/ 마지막 꿈인 노화가의 눈/ 아직도 붉게 충혈되어/ 맨하튼의 어둠을 물들인다”(윤범모 시집 <불법체류자> ‘눈물’, 열화당, 1988년)
―첫 귀국 개인전 이후 한국 방문 기회도 늘고 체류 기간도 점점 길어졌다.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가나화랑 전시에서 그림이 제법 팔린 덕분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다.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내는 내 손을 잡으면서, ‘이 손이 돈을 다 만들 수 있다니!’ 하면서 놀라워하기도 했다. 나는 설악산, 경주, 제주 등 여행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조국의 풍경을 화면에 담으니 새로운 감회가 샘솟았다. 인사동(관훈동) 가나화랑 12층 테라스에서 보이는 인왕산 풍경을 그렸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仁王霽色)을 염두에 두면서 나만의 <인왕제색>(1988,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을 그렸다. 비 온 뒤의 청신한 바위산의 모습, 인왕산은 감동적으로 내게 다가왔다. 하지만 인왕산과 인사동 사이는 고층빌딩으로 가득 차 있어, 이를 붉은 띠로 지워버렸다. 옛 조선총독부(중앙청) 건물도 아직 남아 있을 때였다. 붉은 띠는 1987년 6월 민주화 시위대가 거리를 가득 메운 풍경과도 연결될 수 있다. 겸재는 인왕산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그렸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시위가 드세던 시국에서, 마냥 자연 예찬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인왕산을 부정적으로 그렸다. 정말 20년 만에 귀국한 서울은 시위대를 향한 최루탄 가스 때문에 눈물 천지였다. 정말 괴로운 풍경, 괴로운 인왕산이었다.
인왕산은 경복궁 서쪽의 백호(白虎)에 해당한다. 백호는 상상의 서수(瑞獸)여서 그런지 호랑이보다 용의 모습에 가깝다. 인왕산은 혈(血)을 지키는 산이다. 혈은 여자의 중심부다. 잘났거나 못났거나 인간은 모두 혈에서 나오고 죽으면 다시 그 자리로 간다. 한강은 강남 신도시 때문에 남쪽 끝이 아니라 서울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파리의 센강은 한강에 비하면 개천에 불과하다. 한강과 북한산은 서울의 상징이면서 최고의 명당자리임을 증명한다. 한강과 같은 맑은 물이 도시 중앙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축복이다. 채색 또한 풍수지리와 관계가 있다. 서울이 그런 곳이다. 인왕산을 그리면서 내 고향의 강서 고분벽화를 생각했다. 강서대묘는 사신(四神)을 오방색으로 그렸다. 나는 강서 고분의 그림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남벽에 퇴색되지 않은 주색(Vermilion·버밀리언)의 주작(朱雀)이 있다. 벽화의 버밀리언 색깔 위로 흐른 흙탕물 자국은 강한 인상으로 계속 남아 있다. 새러토가에서 그린 <애넌데일>(1969) 작품의 흘러내린 물감 자국은 추상표현주의의 물감 뿌리기 기법이라기보다 강서 고분벽화의 흘러내린 빗물 자국과 연결된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은 미국 시절에도 이어졌다고 본다.
나는 경주 계림에서 고목을 그렸다. <경주의 나무>(1987)는 두 팔을 벌린 채 서 있는 고목을 그린 것이다. 나무는 죽은 것처럼 서 있지만 사실 죽지 않았다. 마치 우리네의 할머니 같은 모습이었다. 커다란 구멍의 상처를 보이면서 거친 풍상의 껍질을 보이고 있다. 죽은 듯하나 죽지 않은, 아니 죽을 수 없는, 마치 한국의 역사를 보는 듯했다. 나는 계림의 고목을 열심히 그렸다. 황혼의 단풍 든 나무, 팔 벌리고 서 있는 계림의 ‘할머니 나무’를 그렸다. 전쟁을 치르고 분단된 조국을 생각하면서, 나는 <산하재>(山河在) 작품을 여럿 그렸다. 당나라 두보의 시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나라는 망했는데 산과 강은 여전하구나. 성터에 봄은 왔는데 초목은 짙구나’(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그림은 사분오열의 현실을 표현했다. 19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의 <산하재> 연작은 분단 풍경을 염두에 두고 그린 작품이다. 그래서 엑스(X)자 형태의 직선을 사용하기도 했다. 빨간색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이는 벽화의 남주작과 연결되기도 한다.”
“일찍이 몬드리안은 ‘여기서는 정서로서의 예술 따위는 존재치 않을 것이다. 예술은 하나의 효용적 가치로서 전개되어 나갈 것이다’라 말했다. 몬드리안의 이 예견은 형식의 의미에서는 옳았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서는 옳지 않았다. 새로운 조형예술, 특히 순수미술의 변모는 그들이 지향했던 ‘합리’에서가 아니라, 보다 절실한 현실적 정신욕구에 의하여 전개되어왔기 때문이다. ‘다다’와 ‘초현실’의 출현과 ‘미니멀’의 궁지를 거친 ‘오브제’와 근래의 ‘반예술’ 같은 것의 등장을 보더라도, 조형예술이 본원적인 형식이 아닌 보다 현실성에 입각한 내용으로서의 새로운 이야기에 그 동인을 얻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순수한 ‘정신의 상태’로서의 예술들이 ‘장식’이란 효용적 가치로 전락하고 있는 현상을 본다. 그것이 어떠한 내용이든지 효용적인 ‘디자인’으로 결부되어 다시 하나의 ‘합리’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서울, 그 놀라운 변화를 50년 전의 폐허―마치 ‘아들의 주검을 안은 어머니의 연민’과도 같았던 북한산의 기억을 도외시하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멀리 남면의 한강을 바라보는 왕궁의 자취를 도외하고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산 동리와 획일적인 빌딩 숲이 대조를 이루고, ‘부기우기’의 간판과 네온이 희미한 매연 속에서 명멸하는 곳. 이 괴이하게 부풀어 오른 파노라마 안에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시각현장이 있다.
과학과 테크놀로지가 지배하는 시기의 예술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본다. 미술은 이미 수세대 전에 ‘벤처’를 시작하였고, 그로 인해 우리들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생활환경과 그 기구들이 새로운 환경의 패턴으로 바뀌어왔다. 물론 앞으로도 계속 바뀌어나갈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생활환경의 변화 그 자체보다는 새로운 시각환경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다.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지배는 무서운 속도로 우리들의 삶을 바꾸어나가며 우리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가져오겠지만, 한편으로 인간성의 위기와 자연의 파괴라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 후자의 상황을 의식하며, 이에 저항한다. (…) 회고전을 맞이하며 나는 황홀한 약함 속에 있다. 예술이 새로운 신화의 창출이라 할진대, 신화는 역시 ‘현실’과 ‘시간’이라는 강한 타자적 능력에 의하여 결정될 것이다. 나는 다만 새로운 신화라는 그 표적을 향해 조준을 맞출 뿐이다.”(김병기, ‘비형상을 넘은 새로운 형상 추구’, 개인전 도록, 가나아트센터, 2000)
녹취·집필 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1985년 연말 필자 윤범모에게 ‘우연히 발견’된 김병기는 햇수로 22년 만인 1986년 마침내 한국 화단에 복귀했다. 귀국 첫 개인전의 호평 덕분에 자주 한국을 방문하게 된 김병기는 1987년 서울 인사동 가나화랑 옥상에서 ‘인왕산’을 그리던 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지러운 빌딩 숲과 민주화 시위를 진압하는 군부정권의 최루탄 가스에 눈물을 흘리며 그려야 했기 때문이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오마주한 <인왕제색>(사진)에 남대문의 단청색이자 시위대의 머리띠에서 영감을 받은 붉은색이 주조로 쓰인 연유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삼성의 호암갤러리 큐레이터를 거쳐 1985년 미국 뉴욕대 대학원에서 예술학을 전공 중이던 윤범모(왼쪽)는 뉴욕주 북부 새러토가의 김병기(오른쪽)를 찾아가 1주일간 머물며 ‘70년 인생사와 20여년 은둔사’를 처음으로 녹취했다. 김병기가 60년대 후반 살았던 ‘유령의 집’도 함께 답사했다.
윤범모 기획으로 1986년 5월23일부터 31일까지 서울 관훈동 가나화랑에서 열린 22년만의 귀국 개인전 <김병기 작품전> 도록의 표지.
1986년 귀국 첫 개인전 <김병기 작품전> 도록에 실린 김병기의 사진과 프로필. 오른쪽 작품은 <깊은 골짜기를떠나오다>(1971년)의 부분도이다.
“겨울여행 도중 새러토가 지나다 들러”
일주일간 머물며 밤샘 구술녹취
“은거 20년 만에 ‘증발 화가’ 발견”
곧바로 서울로 전화해 전시 주선 1986년 5월 가나화랑 ‘첫 귀국전’
“대성공 자평…일부는 실망 눈치도”
예전 ‘추상성’ 더 강화 기대한듯 전시 호응 덕분에 ‘전국여행’ 감회
1987년 설악산·경주·제주도…
“인사동 옥상에서 ‘인왕제색’ 그려”
민주화 시위대 붉은 머리띠 ‘차용’ 조국 분단풍경 ‘산하재’ 연작으로
“내 고향 강서 고분벽화 떠올리며”
1986년 5월 70살 김병기의 귀국과 첫 개인전은 ‘은둔 화가의 복귀’라는 화제 속에 주요 언론의 관심을 모았다. ‘김병기옹’ ‘원로서양화가’로 소개한 <동아일보> 5월21일치 기사.
1986년 김병기의 귀국 첫 개인전에서 소개한 20여점 가운데 <헛간>(1973)은 50년대 후반 이화여대 미술반에서 그에게 그림 지도를 받은 인연이 있는 이명희 신세계백화점 회장이 소장하고 있다. 뒤늦게 미국 보스턴미술관 쪽에서 이 작품과 똑같이 그려달라고 주문했지만 김병기는 ‘자기복제를 하지 않는다’는 소신에 따라 거절한 일화도 있다.
1985~87년 뉴욕 유학시절 3년간의 미국 체류 경험을 담은 시집 <불법체류자>(1988년·열화당)에서 윤범모는 김병기의 귀국 소회를 ‘눈물’이란 작품으로 표현했다.
1985년 귀국 전시회 이후 몇년 동안 김병기는 설악산, 제주도, 해운대 등 전국을 돌며 오랫동안 그리워만 했던 고국 산천 스케치 유람을 다녔다. 1987년 경주에서 야외 사생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1987년 경북 경주에서 그린 김병기의 <경주의 나무>는 ‘죽은 듯 살아있는 고목처럼 우리네 할머니의 강인하면서도 푸근한 인상’을 표현한 작품이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의 진통 중에 귀국한 김병기는 전쟁과 분단과 군사정권의 조국 현실을 실감하며 <산하재> 연작을 여럿 그렸다. 중국 당나라 두보의 ‘국파산하재’ 시구절에서 따온 <산하재>(1987)는 분단을 상징하는 엑스(X)자와 고향 평양의 강서고분 벽화에서 따온 적색을 주조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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