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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나는 왜 미국에서 살아야 합니까…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등록 2017-11-16 03:43수정 2018-01-08 10:15

【길을 찾아서】 (40회) 외쳐라, 뭐라고 외치리이까

1965년 49살 중년기에 김병기는 뉴욕주 북부 휴양도시 새러토가스프링스에 정착해 6년간 독신 생활을 하며 화가로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탐구했다. 김병기는 60년대 후반 20세기초 미국 최고 건축가 스탠포드 화이트가 설계한 빅토리안 양식의 대저택인 애넌데일의 ‘유령의 집’에서 살았다.
1965년 49살 중년기에 김병기는 뉴욕주 북부 휴양도시 새러토가스프링스에 정착해 6년간 독신 생활을 하며 화가로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탐구했다. 김병기는 60년대 후반 20세기초 미국 최고 건축가 스탠포드 화이트가 설계한 빅토리안 양식의 대저택인 애넌데일의 ‘유령의 집’에서 살았다.

―미국 정착은 뉴욕주의 새러토가스프링스에서 시작했다. 그 시절을 회고한다면?

“1960년대는 베트남 전쟁 찬반으로 미국 사회가 시끄러울 때였다. 특히 제인 폰다 같은 유명 배우를 비롯하여 많은 청년들의 반전운동이 날로 열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히피운동이 퍼져갔다. 히피는 아버지의 유산을 거부한 첫번째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는 히피의 도시로 유명했다. 뉴욕주의 수도 올버니 남쪽의 바드 칼리지에 가서 보니 스튜디오가 온통 쓰레기 더미처럼 어수선했다. 그런 쓰레기 더미 속에서 미대생들이 눈을 비비며 나왔다. 그들은 일상생활의 격식을 무시했고,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을 깨부수려고 했다. 청년들은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아시아를 재발견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아시아는 나름대로 유구한 전통도 있고 독자성도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특히 선불교(Zen)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선에서 말하는 시간의 단면과 사르트르가 말하는 시간의 단면을 겹쳐서 이해하려 했다. 어제는 지나갔다. 오늘에 의해 역사는 규정된다. 내일은 하나의 관념이다. 내일이 되면 또 오늘이다. 지금 현재가 중요하다. 천국은 지금 이 자리에 있거나 없거나 하는 현재의 문제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가 구원을 요청하니, 예수는 ‘너는 지금 나와 더불어 있다’라고 말했다. 바로 현재진행형이다. 나는 현재를 중요시하는 작품을 해야 했다. ‘지금, 여기’. 그게 바로 ‘현실’이었다.”

김병기는 새러토가 스프링스의 애넌데일에 있는 ‘유령의 집’ 시절 베트남전쟁 반전운동 열기 속에 등장한 히피세대 예술인들과 교유하며 자유를 만끽했다.
김병기는 새러토가 스프링스의 애넌데일에 있는 ‘유령의 집’ 시절 베트남전쟁 반전운동 열기 속에 등장한 히피세대 예술인들과 교유하며 자유를 만끽했다.
애넌데일의 유령의 집에서 가장 넓은 거실이었던 김병기의 방에 이웃 입주자인 젊은 히피 예술인들이 놀러와 작품을 구경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 벽에 <애넌데일>(1969년작)이 걸려 있다.
애넌데일의 유령의 집에서 가장 넓은 거실이었던 김병기의 방에 이웃 입주자인 젊은 히피 예술인들이 놀러와 작품을 구경하고 있다. 사진 오른쪽 벽에 <애넌데일>(1969년작)이 걸려 있다.

김병기는 <애넌데일>(1969년작)에 새러토가 스프링스의 애넌데일 시절 자유분망했던 열정을 과감하게 표현했다고 말한다.
김병기는 <애넌데일>(1969년작)에 새러토가 스프링스의 애넌데일 시절 자유분망했던 열정을 과감하게 표현했다고 말한다.
―새러토가 시절 ‘유령의 집’에서 히피들과 어울려 살았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 내용은 무엇인가?

“올버니에서 30마일쯤 북쪽으로 올라가면 새러토가스프링스가 나온다. 오랜 휴양도시여서 그런지 19세기 영국식 3층 가옥인 빅토리안 하우스가 많다. 경마장과 카지노로도 유명했다. 그런 새러토가의 애넌데일에 ‘유령의 집’이 하나 있었다. 그 집은 비극적인 사연을 갖고 있다. 해리 켄들 소라는 철도·석탄 재벌의 상속자가 유명한 건축가인 스탠퍼드 화이트에게 집 설계를 부탁했다. 3층 건물에 방이 14개나 되는 대저택이었다. 문제는 소의 아내이자 당대 손꼽히는 ‘팜파탈’ 에벌린 네즈빗이 과거 화이트의 정부였다는 사실이었다. 급기야 소는 화이트가 설계한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옥상 식당에서 ‘아내의 옛 정부’를 권총으로 쏴버렸다. 그 결과 소는 살인범으로 감옥에 가고, 에벌린 역시 충격으로 새러토가를 떠나버렸다. 바로 1906년 뉴욕을 떠들썩하게 했던 ‘세기의 삼각관계 살인사건’이다. 그 뒤 새 저택은 침대 등 가구까지 들여놓은 상태에서 수십년간 비어 있었다. 그래서 ‘유령의 집’이 되었다. 그 집을 나와 가까이 지내던 히피 친구의 누나가 2만달러에 구입했고, 나에게 관리 책임자로 입주를 부탁했다. 나는 싼 렌트비로 제일 좋은 거실을 차지하는 대신 예술가들을 하나둘 입주시켰다.

1960년대 후반 새러토가 스프링스에서 김병기가 살았던 애넌데일의 유령의 집은 1906년 건축주인 ‘재벌 2세’ 해리 캔들 소(윗줄 맨 오른쪽)가 부인 에벌린 네즈빗(가운데)의 옛 정부였던 건축가 스탠퍼드 화이트(맨 왼쪽)를 쏴 죽인 ‘세기의 삼각관계 살인사건’ 이후 흉가로 유명했다. <워싱턴 타임스>(1906년 6월25일치) 보도 기사.
1960년대 후반 새러토가 스프링스에서 김병기가 살았던 애넌데일의 유령의 집은 1906년 건축주인 ‘재벌 2세’ 해리 캔들 소(윗줄 맨 오른쪽)가 부인 에벌린 네즈빗(가운데)의 옛 정부였던 건축가 스탠퍼드 화이트(맨 왼쪽)를 쏴 죽인 ‘세기의 삼각관계 살인사건’ 이후 흉가로 유명했다. <워싱턴 타임스>(1906년 6월25일치) 보도 기사.
이블린 네즈빗은 십대 때부터 빼어난 미모로 모델·가수·무용수·배우 등으로 활동한 20세기초 미국 최고의 팜므파탈이었다. 1906년 ‘세기의 삼각관계 살인사건’을 부른 비극의 주인공으로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1908년 나온 <빨간머리 앤>의 작가 루시 몽고메리가 앤의 모델로 삼았던 16살 무렵의 이블린 네즈빗 사진이다.
이블린 네즈빗은 십대 때부터 빼어난 미모로 모델·가수·무용수·배우 등으로 활동한 20세기초 미국 최고의 팜므파탈이었다. 1906년 ‘세기의 삼각관계 살인사건’을 부른 비극의 주인공으로 평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1908년 나온 <빨간머리 앤>의 작가 루시 몽고메리가 앤의 모델로 삼았던 16살 무렵의 이블린 네즈빗 사진이다.

20세기초 아메리칸 르네상스를 주도한 건축가 스탠포드 화이트는 자신이 설계한 뉴욕의 명소 메디슨 스퀘어 가든(사진)의 옥상 극장에서 치정 살인의 희생자가 되면서 훗날 호색한으로 오명을 남겼다.
20세기초 아메리칸 르네상스를 주도한 건축가 스탠포드 화이트는 자신이 설계한 뉴욕의 명소 메디슨 스퀘어 가든(사진)의 옥상 극장에서 치정 살인의 희생자가 되면서 훗날 호색한으로 오명을 남겼다.

유령의 집은 예술가의 집으로 바뀌었다. 한동안 입주 예술가들은 매일 밤 유령을 만난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나는 유령을 볼 수 없었다. 유령이 ‘영어 방언’을 쓰나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나는 3층 꼭대기의 타워에 올라가 보았다. 등골이 써늘했다. 그래도 용기를 갖고 오랫동안 서 있으니 드디어 ‘유령’이 나왔다. 유령의 정체는 바로 덩치 큰 ‘자동차’들이었다. 집 옆으로 지나는 도로에 자동차들이 달려 지날 때마다 유리창이 흔들리며 바람 소리가 났던 것이다. 히피 같은 생활 6년, 어쩌면 내 인생의 황금기였는지도 모른다. 50대 초반의 내 나이를 잊도록 젊은 히피들은 나를 친구처럼 대해 주었다. ‘히피 왕초’라면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완전 히피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1971년 어느 날 서울에서 아내(김순환)가 건너왔다. ‘가출한’ 남편을 찾아 어렵게 온 것이다. 아내가 오니, 서울 종로 사거리가 통째로 온 것 같았다.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 심정을 <깊은 골짜기에서 떠나오다>라는 작품에 담기도 했다. 제목은 토머스 스턴스(T. S.) 엘리엇의 소네트(Leaving the deep Lane)에서 따온 것이다. 새러토가 초기 ‘독신 생활’을 반영한 까닭에 성적인 암시도 들어 있다. 이런 형식은 앞서 <애넌데일>(Annandale·1969)이란 작품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붉은색 바탕에 격렬한 붓질을 했고, 그 속에 여성의 누드 같은 성적 이미지도 그렸다. 하지만 나는 ‘깊은 골짜기’를 떠나 새로운 현실을 맞아야 했다.”

1971년 서울에서 부인이 건너오면서 가장으로, 생활인으로 다시 돌아온 김병기는 그 소회를 <깊은 골짜기에서 떠나오다>로 그렸다.
1971년 서울에서 부인이 건너오면서 가장으로, 생활인으로 다시 돌아온 김병기는 그 소회를 <깊은 골짜기에서 떠나오다>로 그렸다.

지난 5일 서울 평창동의 화실에서 진행된 구술 인터뷰에서 1986년 첫 귀국 전시회 도록에 실린 <깊은 골짜기를 떠나오다>(1971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병기 화가. 사진 김경애 기자
지난 5일 서울 평창동의 화실에서 진행된 구술 인터뷰에서 1986년 첫 귀국 전시회 도록에 실린 <깊은 골짜기를 떠나오다>(1971년)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병기 화가. 사진 김경애 기자

1965년 뉴욕주 새러토가 스프링스 정착
베트남전쟁 반대운동 열기 한창
“쓰레기 더미 속에서 히피들 등장”

1906년 ‘세기의 삼각관계 살인사건’ 얽혀
수십년 방치 애넌데일 ‘유령의 집’ 입주
유령찾기 소동 끝에 바람소리 확인
6년간 독신생활에 ‘히피왕초’ 소문도

1971년 가족들 합류해 ‘가장’ 복귀
‘깊은 골짜기에서 떠나오다’ 소회 그려

의학 해부도·건축사무소 제도 등 ‘생업’ <> “훗날 작품에 날카로운 직선으로 반영”
72년 보스턴서 첫 개인전 ‘미국화단 데뷔’
78년부터 10년 지역대학에서 강의도

“1965년 미국으로 올 때 내 나이 49살이었고, 아내는 6년 동안 서울에서 홀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나이에 새 생활을 개척하기는 무리였다. 한번은 ‘김병기가 미국 가더니 히피 왕초가 됐다’는 소문이 퍼져 아내가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때 새러토가는 업스테이트 뉴욕 히피들의 집결지였다. 아내가 오고 아이들이 오며 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했는데, 대신 생계의 방편으로 기계와 건축 제도를 하기도 하고 동맥 해부도 같은 의학 삽도를 그리기도 했다. 10년 넘게 했던 제도 드래프팅이 내 작품 속에 자를 댄 것처럼 그어진 직선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은 미국이란 기계화된 자연을 그리는 데 하나의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 자신을 조용히 돌아볼 시간을 갖고자 늦은 나이에 고국을 떠나 새러토가에 칩거하며, 들꽃도 그리고, 끝없는 지평선, 외로운 시골 농가도 그렸다. 72년에는 보스턴 폴리아츠 갤러리에서 초대 개인전을 열고 78년부터 10년간 엠파이어 스테이트 칼리지에서 미술지도 교수를 지내기도 했다.”(김병기, ‘사랑과 반항의 화가’, <뉴욕한국일보>, 1993년 10월23일)

1971년 이후 가족과 합류한 김병기는 생활 방편으로 뉴욕주 올버니의 메디컬 칼리지에서 해부도 등 의학 삽도를 그리기도 했다. 60대 초반까지 소문난 ‘골초’였던 그는 어느해 뉴욕 맨해튼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옥상에서 불현듯 금연을 결심하고 스스로 끊었다.
1971년 이후 가족과 합류한 김병기는 생활 방편으로 뉴욕주 올버니의 메디컬 칼리지에서 해부도 등 의학 삽도를 그리기도 했다. 60대 초반까지 소문난 ‘골초’였던 그는 어느해 뉴욕 맨해튼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옥상에서 불현듯 금연을 결심하고 스스로 끊었다.

―가족들이 새러토가로 온 이후 상황은 어떠했는가?

“아내가 새러토가에 왔을 때는 유령의 집이 아니라 마이클 스틸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마이클은 뉴욕시티발레단의 최고령 무용수였다. 그는 여름에만 새러토가에서 지냈기 때문에 나와 집을 공유할 수 있었다. 6년 만에 만난 첫날 밤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내 볼을 한 대 때렸다. 그동안 가족을 돌보지 않은 ‘가출 가장’에 대한 질책이었다. 그것으로 나는 용서를 받고 새로운 가정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새러토가는 여름의 도시다. 뉴욕시티발레단의 여름 본거지였다. 7월 발레단이 오면 여름이 시작되었다. 8월 초가 되면 유진 오르먼디 지휘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왔다. 그러면 미국에서 제일 큰 경마도 시작했다. 사실 미국의 경마는 새러토가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새러토가는 유명 호텔도 많아서 작가들이 장기 투숙하면서 작품을 쓰기도 했다. 새러토가 카지노는 마차 시절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다. 서부 사막의 라스베이거스 혹은 동부의 애틀랜틱시티 등 비행기 시대 이후 새러토가의 명성은 시들해졌다. 그렇다고 그 명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포테이토칩이란 말도 새러토가에서 나왔다. 여행용 커다란 가방을 ‘새러토가 트렁크’라고 부르는 전통도 남아 있다.

그땐 작품 판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뭔가 돈벌이를 해야 했다. 글렌데일 건축회사에 나가 평면도를 보고 완성된 집 모양을 그려주는 일을 했다. 일종의 조감도이다. 완공 이후의 집 모습을 상상하여 근사하게 그려주니 회사는 나를 특별대우했다. 웬일인지 미국인들은 평면도만 보고는 완공 상태의 집 모습을 입체적으로 그리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화가라는 생각을 잠시도 놓을 수 없었다. 하루는 새러토가의 한 화상이 와서 20여장의 내 작품을 매입했다. 헐값으로 팔아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 작품을 미국인에게 판다는 사실이 흐뭇하기도 했다. 그때 내 그림은 플로리다의 마이애미 지역에서 주로 판매됐다고 들었다. 당시 내 그림에는 역삼각형 모습이 자주 등장했다. 십자가도 일종의 역삼각형이었다. 세잔보다 불안한 시대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김병기는 1972년 10월 보스턴의 폴리아츠 갤러리에서 초청 개인전을 통해 미국화단에 데뷔했다. 전시회 소식은 <깊은 골짜기에서 떠나오다>를 배경으로 찍은 그의 사진과 함께 유력 지역 신문에 크게 소개되기도 했다.
김병기는 1972년 10월 보스턴의 폴리아츠 갤러리에서 초청 개인전을 통해 미국화단에 데뷔했다. 전시회 소식은 <깊은 골짜기에서 떠나오다>를 배경으로 찍은 그의 사진과 함께 유력 지역 신문에 크게 소개되기도 했다.

1972년 보스턴의 폴리아츠 갤러리에서 ‘미국 데뷔’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때 유력한 지역신문( 1972년 10월16일)은 내 얼굴 사진과 함께 한 면 가득 대서특필했다. 기사는 56살의 화가가 ‘내 생애에서의 거대한 드릴’이라면서 <깊은 골짜기에서 떠나오다> 등 14점의 그림을 진열했다고 소개했다. 더불어 기사는 추상주의와 참된 현실 사이의 미술을 주목한다면서, 젊은 미술가들의 독자성을 언급했다. 즉 물질주의에서 정신주의로의 이동에 따른 세대 차이에 대한 것이었다. 더불어 ‘나의 시작은 곧 나의 종말’이라면서, 현대미술은 세계로 뻗어가고 있기 때문에 한 나라가 중심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김병기(왼쪽)가 없는 6년 동안 서울에서 2남3녀를 혼자 키웠던 부인 김순환(오른쪽)은 1971년 새러토가 스프링스로 건너온 뒤 수년 만에 링컨 애비뉴의 집을 장만해 가정을 안정시켰다. 오른쪽 이젤에 걸린 작품은 <설악산>(1988년작)이다.
김병기(왼쪽)가 없는 6년 동안 서울에서 2남3녀를 혼자 키웠던 부인 김순환(오른쪽)은 1971년 새러토가 스프링스로 건너온 뒤 수년 만에 링컨 애비뉴의 집을 장만해 가정을 안정시켰다. 오른쪽 이젤에 걸린 작품은 <설악산>(1988년작)이다.

그 뒤 아파트를 전전하다 경마장 부근의 집 한 채를 구입하게 되었다. 아내와 둘째 딸이 나 몰래 추진한 ‘거사’였다. 새러토가의 링컨 애비뉴 135번지에 있는 주택. 원래 이 집은 새러토가 출신의 <뉴요커> 기자이면서 소설가였던 프랭크 설리번의 소유였다. 유명한 사람이 살던 집이라고 가끔 관광버스가 우리 집 앞에 서기도 했다. 다만 불편한 것은, 우리가 동양인이라고 옆집 백인 가족이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태도였다. 그들은 개인주택인데도 미국 국기인 성조기를 늘 게양했다. 그래도 나는 이웃의 과시적인 경시 태도에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성조기가 휘날리는 국기 게양대는 나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 강렬한 인상을 그림에 담기도 했다. 물론 성조기는 그리지 않고 게양대만 그렸다. 그러고 보니 몬드리안의 수직선처럼 표현되기도 했다.

뉴욕주 새러토가 스프링스 출신 ‘경마 전문기자’이자 작가로 이름났던 프랭크 설리번의 옛집에 살던 링컨 애비뉴 시절, 뒤뜰을 그린 <능금나무>(1981년작)를 김병기는 추상을 부정한 뒤 다시 형상을 추구한 대표작으로 꼽는다. 고려대박물관 소장.
뉴욕주 새러토가 스프링스 출신 ‘경마 전문기자’이자 작가로 이름났던 프랭크 설리번의 옛집에 살던 링컨 애비뉴 시절, 뒤뜰을 그린 <능금나무>(1981년작)를 김병기는 추상을 부정한 뒤 다시 형상을 추구한 대표작으로 꼽는다. 고려대박물관 소장.
우리 집 뒤뜰에 능금나무가 있어 운치가 있었다. 능금나무는 한 해씩 걸러 꽃을 피웠다. 꽃이 필 때면 나뭇가지 가득 만발해 장관을 이루었다. 능금이 떨어진 나무를 사실적으로 그려보았다. 일종의 계산된 사실화라고 할 수 있다. 추상 형식으로 그림을 시작했지만 결과적으로 구상 형식으로 완성되었다. <능금나무>(1981년·고려대박물관 소장)는 언뜻 보면, 참한 풍경화처럼 보인다. 숲이 있고, 숲 사이에 집이 보이는 안정적 구도이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부정을 한 번 더 부정한 결과로 나온 작품이어서 애착이 많았다.

화가로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찾아 미국으로 떠났던 김병기는 귀국에 대한 기약도 없이 광활한 땅에서 고립감에 혼자 통곡하기도 했다. 20여년 은둔 시절 소회를 상징하는 작품 <광야>(1982년작).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화가로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찾아 미국으로 떠났던 김병기는 귀국에 대한 기약도 없이 광활한 땅에서 고립감에 혼자 통곡하기도 했다. 20여년 은둔 시절 소회를 상징하는 작품 <광야>(1982년작).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미국 대륙은 하나의 거대한 벌판이다. 황량한 광야이다. <광야>(1982년·국립현대미술관 소장)라는 작품도 그런 심경을 표현한 것이다. 광야에서 바람처럼 와, ‘외쳐라. 무어라고 외치리이까.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이사야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염두에 두면서 그림을 그렸다. ‘나는 왜 서울에서 살지 못하고, 한국인이 하나도 없는 새러토가에서 살아야 합니까.’ 광야의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길가에 사람 키보다 큰 갈대 같은 풀이 무리지어 자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톨 그라스는 무리를 지어 살면서 바람에 흔들렸다. 갈대는 마치 한국인 같았다. 민족을 생각하면 괜히 눈물이 났다. 아내가 마트에 물건 사러 갈 때면, 나는 차에서 기다리며 눈물을 흘리곤 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오는지 몰랐다. 눈물이 바람처럼 자꾸 왔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아내는 참회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좋아했다. 성서를 읽고 있으면, 아내는 자기 때문에 회개하는 줄 알고 더 좋아했다.”

녹취·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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