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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추상 넘어 형상으로…면을 넘어 오브제로”

등록 2017-11-09 05:40수정 2018-01-08 09:35

【길을 찾아서】 (39) 미국 현대미술의 인상

1970년 10월 서울 경복궁 미술관에서 열린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상’ 공모전에 출품한 김병기의 <피에타>. 가족들이 미국으로 건너오기 이전으로, 둘째 아들 청익씨가 전시장에서 찍은 기념 사진이다. 뉴욕에서 김환기의 작품과 함께 포장해서 국제우편으로 배송해 전시 이후 한국은행에서 구입해갔으나 현재는 소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70년 10월 서울 경복궁 미술관에서 열린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상’ 공모전에 출품한 김병기의 <피에타>. 가족들이 미국으로 건너오기 이전으로, 둘째 아들 청익씨가 전시장에서 찍은 기념 사진이다. 뉴욕에서 김환기의 작품과 함께 포장해서 국제우편으로 배송해 전시 이후 한국은행에서 구입해갔으나 현재는 소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65년 미국 정착 이후 본격적으로 작가 생활에 들어갔다. 그때 미국 현대미술계의 첫인상은?

“국제무대의 현대미술 흐름은 약 20년을 주기로 크게 변화하는 것 같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즈음하여 현대미술의 중심은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겼다. 누구는 파리의 현대미술을 뉴욕이 훔쳤다고 표현했다. 아무튼 내가 1965년 뉴욕 미술계를 둘러보니 새로운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전쟁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 보였다. 형식과 내용에서 새로운 시도도 참 많았다. 미술의 영역이 확대되고 있었고, 그만큼 작가들이 다양한 활동을 개시하고 있었다. 현대미술이라면 추상미술이 총아처럼 각광을 받았으나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한국에서 추상미술 중심으로 현대미술 운동을 하던 내게 새로운 자극으로 돌아왔다. 추상미술 너머에 형상이 있는 미술이 새롭게 보였다. 미술의 지평이 넓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뉴욕에서는 바넷 뉴먼이 주목을 받고 있었고, 잭슨 폴록과 빌럼 더코닝(윌렘 드 쿠닝)이 추상미술의 쌍벽으로 우뚝 서 있었다. 원래 잭슨 폴록은 서부에서 베이비시터 노릇을 한 참담한 시간도 있었다. 그는 토머스 하트 벤턴의 제자로 초기엔 사회성 있는 리얼리즘 그림을 그렸다. 그런 그가 뒤에 ‘물감 뿌리기’(드리핑) 기법으로 미국 미술계의 대표 작가로 부상했다. 우발성의 효과를 본 것이다. 하기야 1945년까지 미국 미술은 ‘지역주의’에 속해 있었지, 현대미술의 메카는 아니었다.

1965년 미국에 정착한 김병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에서 뉴욕으로 중심을 옮겨온 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만끽한다. 특히 우크라이나 키예프 출신으로 ‘절대주의’ 추상미술 선구자로 꼽히던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화풍이 말년에 형상으로 다시 돌아간 것에 주목한다. 1915년 발표한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사진)은 1935년 그의 장례식이 열린 러시아미술가연맹의 벽과 운구차에도 휘장처럼 내걸릴 정도도 절대주의의 상징작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미술관 소장.
1965년 미국에 정착한 김병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파리에서 뉴욕으로 중심을 옮겨온 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만끽한다. 특히 우크라이나 키예프 출신으로 ‘절대주의’ 추상미술 선구자로 꼽히던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화풍이 말년에 형상으로 다시 돌아간 것에 주목한다. 1915년 발표한 <흰 바탕 위의 검은 사각형>(사진)은 1935년 그의 장례식이 열린 러시아미술가연맹의 벽과 운구차에도 휘장처럼 내걸릴 정도도 절대주의의 상징작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미술관 소장.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1915년 12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전위파 예술가들의 합동전시회 ‘마지막 미래주의전-0,10’에서 모두 39점을 선보이며 절대주의 회화운동을 선언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1915년 12월 페트로그라드에서 열린 전위파 예술가들의 합동전시회 ‘마지막 미래주의전-0,10’에서 모두 39점을 선보이며 절대주의 회화운동을 선언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자화상>(1933년). 스탈린이 장례식을 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사회주의 소련에서 탄압받았던 그의 작품은 196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새롭게 발견되면서 바우하우스와 미니멀리즘으로 부활했다. 국립러시아미술관 소장.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자화상>(1933년). 스탈린이 장례식을 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사회주의 소련에서 탄압받았던 그의 작품은 196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새롭게 발견되면서 바우하우스와 미니멀리즘으로 부활했다. 국립러시아미술관 소장.

말레비치는 말년에 들어 <수확하는 사람들>(1929년·사진) 등에서 사실주의 화법을 구사했다. 1965년 미국 미술 순례를 통해 김병기가 인상 깊게 본 대표적인 작품이다. 국립러시아미술관 소장.
말레비치는 말년에 들어 <수확하는 사람들>(1929년·사진) 등에서 사실주의 화법을 구사했다. 1965년 미국 미술 순례를 통해 김병기가 인상 깊게 본 대표적인 작품이다. 국립러시아미술관 소장.
미국 미술계를 시찰하고 난 뒤 새롭게 주목한 작가는 말레비치였다. ‘절대주의’(수프레마티즘) 화가였던 말레비치는 칸딘스키와 더불어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추앙받았다. 칸딘스키의 기하학적 회화는 너무 관념적이어서 재미없었다. 말레비치는 절대주의를 주장할 만큼 형상 제거를 극단적으로 추구했다. 형상의 완벽한 제거, 그게 말레비치였다. ‘비형상의 대가’로 칸딘스키보다 더 인정받았다. 말레비치는 십자가 형태 하나를 그려놓고도 그림이라고 여겼다. 그런 그가 돌연 집 한 채를 그렸다. 형상이 있는 회화였다. 그 그림을 담은 카드가 미국 도처의 판매점에 깔려 있을 정도로 인기였다. 미국 미술계를 시찰하면서 나는 그 현상을 주의 깊게 보았다. 말레비치는 뒤에 러시아 농부를 그렸다. 농민 군상은 민중미술적인 요소도 있었다. 철저하게 형상을 거부하고 비형상을 주장하던 말레비치의 변화는 하나의 자극이었다. 새러토가 정착 이후 내가 추상에서 형상을 주목하게 된 배경에 말레비치라는 존재를 잊을 수 없다. 한국에서 말레비치를 주목한 화가는 유영국 정도라고 볼 수 있다. 나와 더불어 일본 문화학원 유학 시절부터 말레비치를 알고 있었다. 유영국의 산 소재 작품은 단순할 정도로 면(面) 중심의 표현 방법을 활용했다. 그의 작품은 절대주의와 관련하여 해석할 수 있다. 유영국은 말레비치의 직계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한국작가로 꼽히는 유영국의 <산>(1968년). 그는 “산은 내 앞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다”고 말하곤 했다. 개인 소장.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한국작가로 꼽히는 유영국의 <산>(1968년). 그는 “산은 내 앞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다”고 말하곤 했다. 개인 소장.
마크 로스코 작품은 하나의 면이다. 나는 선이 면이 되는 것을 하고 싶었다. 면은 사람이 되고, 거기에 사람의 존엄성을 강조하고 싶었다. 미술에 추상적 요소가 없지 않으나 결국 인간 이야기가 아닌가. 내 최근작 <공간반응>(2017예술원미술전 출품)은 추상을 거쳐 형상을 찾고, 또 인간 존엄의 사상을 염두에 두면서 제작한 작품이다. 특히 경색된 남북관계를 안타까워하며 붓을 들었다. 원래 그림에는 ‘뭔지 잘 모르는 부분’이 있다. 나는 폴 발레리의 콩트 <테스트 씨>를 일곱 번이나 읽었지만 아직도 내용을 잘 모르고 있다. 물론 일어 번역판으로 읽어서 한계도 없지 않겠지만, 예술의 속성에 완벽한 이해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화가’로 알려져 2015년 첫 한국전시 때 큰화제를 모았던 마크 로스코는 1913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미국으로 건너가 쉬르레알리슴의 영향 속에서 ‘색면추상’으로 일가를 이뤘다. 1960년 작품 ‘No.7’ 앞에 선 마크 로스코, 딸 케이트가 찍은 사진이다.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화가’로 알려져 2015년 첫 한국전시 때 큰화제를 모았던 마크 로스코는 1913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미국으로 건너가 쉬르레알리슴의 영향 속에서 ‘색면추상’으로 일가를 이뤘다. 1960년 작품 ‘No.7’ 앞에 선 마크 로스코, 딸 케이트가 찍은 사진이다.

마크 로스토의 ‘색면화’들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그림’에 꼽힌다. 1970년 뉴욕에서 자살하기 직전 남긴 마지막 유작 ‘무제-레드’. 깊은 슬픔이 담겨 ‘피로 그린 그림’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미국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마크 로스토의 ‘색면화’들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그림’에 꼽힌다. 1970년 뉴욕에서 자살하기 직전 남긴 마지막 유작 ‘무제-레드’. 깊은 슬픔이 담겨 ‘피로 그린 그림’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미국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소장.

‘뉴욕이 파리에서 훔쳐온 현대미술’
바넷 뉴먼·잭슨 폴록·드 쿠닝…

‘절대주의’ 비형상 대가 말레비치
1960년대 집·농부 등 ‘형상’ 그려
“미국 순례 때 보니 엽서로 대인기”

이브 클라인 개인전 ‘오브제’ 발견
도료통 넣어 뒤틀린 캔버스가 작품
“추상-구상, 평면-오브제 경계 모호”

나치에게 추방당한 ‘제3 바우하우스’
미국·일본 등 산업디자인 큰 영향

수화 김환기 ‘점화’ 보여줘 첫 비평
“전쟁 때 없어진 친구들이 생각나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년 ‘한국미술대상전’ 대상 금의환향

프랑스 출신 이브 클라인은 1960년대 청색만으로 그린 모노크롬 작품을 선보이며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로 특허까지 내 누보 레알리슴의 대표주자로 꼽혔다. 그는 뉴욕 전시를 시작한 62년 심장마비로 34살에 요절함으로써 신화가 됐다. 김병기는 1965년 미국에 정착한 이후 뉴욕 맨해튼 5번가 유대인미술관에서 처음 이브 클라인의 전시를 보고 오브제에 대한 흥미를 느꼈다. <한겨레> 자료사진.
프랑스 출신 이브 클라인은 1960년대 청색만으로 그린 모노크롬 작품을 선보이며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로 특허까지 내 누보 레알리슴의 대표주자로 꼽혔다. 그는 뉴욕 전시를 시작한 62년 심장마비로 34살에 요절함으로써 신화가 됐다. 김병기는 1965년 미국에 정착한 이후 뉴욕 맨해튼 5번가 유대인미술관에서 처음 이브 클라인의 전시를 보고 오브제에 대한 흥미를 느꼈다. <한겨레> 자료사진.

―말레비치의 화풍 변화를 포착했는데, 다른 작가들은 어떠했는가?

“미국 정착 이후 나 자신 화풍의 변화를 추구한 것은 당연하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살다가 물질문명의 메카 뉴욕으로 환경이 바뀌었으니 어쩌면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더구나 새러토가에는 한국인이 거의 없었다. 철저하게 나 혼자 남아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을 해야 했다. 새롭게 주목한 화풍은 한마디로 ‘비형상에서 형상으로’ 그리고 ‘평면에서 오브제로’로 요약할 수 있다. 물론 내가 추구한 형상은 비형상을 통과한 뒤의 형상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추상화만 고집했던 여느 화가들과는 다른 면이 있을 것이다. 앤디 워홀은 코카콜라 병을 그렸다. 재스퍼 존스는 과녁·성조기·지도 등을 그렸다. 그것은 추상화인가, 구상화인가. 우리는 워홀의 작품을 보고 이런 경계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게 바로 현대미술의 특징이다.

이브 클라인은 1960년 파리의 국제현대미술갤러리에서 파란 물감을 벌거벗은 여성 모델 3명의 몸에 칠한 뒤 흰 종이 바닥에 눕게 하는 인체 프린팅 퍼포먼스로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현대 추상미술사에서 ‘청색시대의 인체측정학’으로 기록되는 첫 순간이었다.
이브 클라인은 1960년 파리의 국제현대미술갤러리에서 파란 물감을 벌거벗은 여성 모델 3명의 몸에 칠한 뒤 흰 종이 바닥에 눕게 하는 인체 프린팅 퍼포먼스로 화제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현대 추상미술사에서 ‘청색시대의 인체측정학’으로 기록되는 첫 순간이었다.
이브 클라인의 인체측정학 시리즈 무제.
이브 클라인의 인체측정학 시리즈 무제.
뉴욕의 뮤지엄 거리에 있는 유대인 미술관에서 이브 클라인(프랑스어 발음은 클랭) 개인전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캔버스를 자동차 도료 통에 그대로 넣었다가 건져냈다. 물감이 마르는 과정에서 캔버스가 뒤틀려 그 자체로 하나의 오브제가 되었다. 제1전시실에 들어가니 200호쯤 되는 캔버스에 ‘인터내셔널 클라인 블루’라는 군청색(울트라마린) 계통의 작품 등 열댓 점이 걸려 있었다. 표면만 보지 말고 찌그러진 오브제로 봐 달라는 뜻 같았다. 독창성 있는 작품이었다. 클라인은 벌거벗은 여자의 몸에 물감을 칠한 다음, 몸을 붓 삼아 캔버스에 ‘프린트’한 독특한 작업을 선보였다. 캔버스 위에 앉은 여체는 엉덩이 자국을 냈고, 심지어 치모까지 묻어 있었다. 인체 프린트 작업은 클라인 자신이 직접 붓을 들고 제작한 그림은 아니다. 게다가 구상과 추상의 경계선도 모호하다. 그러니까 뭔가 경계선이 무너지는 미술, 즉 평면과 오브제의 한계를 생각하게 했다. 클라인의 작품은 평면만 보면 회화이지만, 구겨진 부분만 보면 오브제가 된다. ‘틈새’를 생각하게 했다. 그는 프랑스 출신 청년으로 일본에서 유도를 배우기도 했다.”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개교한 바우하우스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1926년 데사우시로 옮겼다.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물.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개교한 바우하우스는 나치의 탄압을 피해 1926년 데사우시로 옮겼다.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물.

바우하우스는 바이마르, 데사우, 베를린을 거쳐 1933년 문을 닫았지만 창설한 마이스터들이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1960년대 현대미술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다. 사진은 1926년 데사우 건물의 옥상에서 함께한 마이스터들로, 요제프 알버스(맨 왼쪽), 발터 그로피우스(왼쪽 일곱째), 파울 클레(오른쪽 넷째), 오스카 슐레머(맨 오른쪽).
바우하우스는 바이마르, 데사우, 베를린을 거쳐 1933년 문을 닫았지만 창설한 마이스터들이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1960년대 현대미술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다. 사진은 1926년 데사우 건물의 옥상에서 함께한 마이스터들로, 요제프 알버스(맨 왼쪽), 발터 그로피우스(왼쪽 일곱째), 파울 클레(오른쪽 넷째), 오스카 슐레머(맨 오른쪽).

2008년 금호미술관에서 재현한 데사우 바우하우스 시절 마이스터 오스카 슐레머의 방.
2008년 금호미술관에서 재현한 데사우 바우하우스 시절 마이스터 오스카 슐레머의 방.

―독일의 바우하우스 운동에도 새롭게 주목했다고 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바우하우스는 바이마르에서 시작해 데사우로 옮겼다가 나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옮겨왔다. 나치는 바우하우스를 타락한 예술활동으로 보았다. 추방당한 바우하우스는 시카고에서 제3 바우하우스 시대를 열었다. 그 뒤 그로피우스 교장은 하버드대학으로, 케페시는 매사추세츠공대(MIT)로, 알버스는 예일대로 갔다. 제3 바우하우스는 추상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고민했다. 그래서 나온 책이 죄르지 케페시의 <시각언어>(랭귀지 오브 비전)라는 조그만 책이다. 이는 추상미술을 해석하는 사전과 같았다. 서울대 미대 시절에 장발 학장 이름으로 교과서를 집필할 때 ‘시각언어’ 일본어 번역판을 활용하기도 했다. 그래서 도안이란 명칭 대신 디자인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썼다. 물론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산업미술)이란 용어도 사용했다. 물론 미대 교과목으로 바우하우스를 개설하기도 했다.

공방 같은 바우하우스는 1919년 독일 패망 이후 경제적으로 무일푼 상태에서 생겨났다. 그래서 내건 구호가 ‘무장식의 장식’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 바우하우스의 철학이었다. 그때 파울 클레와 칸딘스키가 시도한 것이 추상화였다. 본격적 추상미술의 단초라고 볼 수 있다. 미국과 일본도 바우하우스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산업제품 부문에서 영향이 컸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 패전국 일본의 부흥에 바우하우스와 미술의 역할을 연구해볼 만하다.”

1960년대 뉴욕 화단의 추상미술 주류 속에서 화풍의 전환을 시도한 김환기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1970년 한국일보사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으며 큰성공을 거둔다. 사진 환기미술관 소장
1960년대 뉴욕 화단의 추상미술 주류 속에서 화풍의 전환을 시도한 김환기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1970년 한국일보사 주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으며 큰성공을 거둔다. 사진 환기미술관 소장

1970년 제1회 한국현대미술대상전 팜플릿.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1970년 제1회 한국현대미술대상전 팜플릿.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앞서 뉴욕에 정착한 김환기는 어떤 작품을 시도하고 있었는가?

“그때 수화(김환기)는 물감을 흘리는 작법의 화가를 좋아했다. 파리 시절까지만 해도 그는 서울의 연장선상에서 달, 매화, 학, 항아리 같은 문인화적 소재를 즐겨 그렸다. 하지만 뉴욕에서는 그런 ‘서울의 달’이 보이지 않았다. 뭔가 전환이 절실했다. 하지만 무엇을 그려야 할지 주제는 못 찾고 있었다. 마음이 답답할 때면 수화는 뉴욕의 지하철을 타고 종점까지 갔다 돌아오곤 했다. 그러다 달항아리 대신 점을 찍기 시작했다. 물감의 번지기 효과를 이용해 자꾸만 점을 찍었다. 화면 가득 점으로 채우다 심심하면 구성에 변화를 줬다. 초보적 구성이기는 하나 점과 점 사이의 번지기 기법은 수화의 특기라 할 수 있다. 평소 수화는 그림을 완성할 때마다 나에게 보여주면서 평가를 부탁했다. 그 덕분에 수화의 점화(點畵)를 보고 처음으로 의미를 부여한 게 바로 나였다. ‘마치 전쟁 때 없어진 친구들이 생각나네. 스님이 목탁 두드리는 것처럼 목탁 소리가 들려’ 그랬다. 수화의 점 그림은 마치 수행승이 목탁 두드리는 소리를 조형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느껴졌다. 1970년 수화는 국전에 대항해 한국일보사에서 주최한 민전인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한다면서 나에게도 권했다. 그래서 나는 <피에타>를 출품했는데, 누구 하나 작품 주제를 주목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반면 수화는 김광섭의 시 ‘저녁에’ 구절에서 따온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감각적인 제목의 작품으로 대상을 받았고, 화려하게 금의환향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뉴욕 화단에서는 수화의 그림을 그렇게 주목하지 않았다. ‘정말 아름답다’는 평이 많았다. ‘정말’을 강조하는 것은, 겉모습에 비하여 에스프리가 없다는 뉘앙스이기도 했다.

사람이 달라져야 새 시대가 온다. 사람이 달라져야 새 그림이 나온다. 문제는 사람이다. 분단조국 출신인 나로서는 디아스포라 개념이 중요하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는 사라졌다고 누군가 말했지만, 단순 서정의 시대에만 머물 상황은 아니었다.

김병기가 뉴욕주 새러토가 스프링스에 살며 그린 <새러토가 콤퍼지션>(1972년). 말레비치의 영향으로 추상을 넘어 다시 형상을 시도하던 무렵이다.
김병기가 뉴욕주 새러토가 스프링스에 살며 그린 <새러토가 콤퍼지션>(1972년). 말레비치의 영향으로 추상을 넘어 다시 형상을 시도하던 무렵이다.
“나는 무엇을 첨가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미술이라는 커다란 흐름 속에 나라는 인간은 무엇을 첨가할 수 있는가. 그것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사실 도미하기 전에 많은 비평문도 쓰고 강단에도 섰기 때문인지 나를 두고 ‘지성적인 체질의 작가’라는 평을 하기도 했다. 감성보다는 지성이 앞서는 작가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와 같은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좋은 작품을 생산해내는 데 지성은 하나의 조건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감성과 같이 창작의 공간을 이루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세잔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세잔의 지적인 면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세잔이 자연과 형상의 중간에서 허덕이는 고뇌와 회의의 정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세잔 이후에 입체파나 차가운 추상이 태동해 세잔의 지성적인 면만 강조된 듯한 느낌을 갖고 있다. 사실 요즘의 나는 뜨거운 것을 좋아한다. 반 고흐 같은 작가를 두고 일컫는 것이다. 몇년 전 유럽 여행 당시 파리의 분위기보다도 표현주의적 작품을 활발하게 만들어내는 독일에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그것은 천만다행이었다. 한때 미국에서는 미니멀리즘이 득세하지 않았는가. 가령 네모꼴 하나만 그린다거나, 혹은 네모꼴 안에 네모꼴을 또 그린다거나… 하여튼 질식할 것 같은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바넷 뉴먼 같은 이는 무슨 담벼락 같은 그림을 그렸는데 이는 한국의 작가에게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고 있다. 생명력이 빠져 있는 그림에서, 그리고 획일화되는 세계에서 무엇인가 꿈틀거리는 창작 태도가 아쉽다.”(‘김병기-윤범모 대담’, <개인전 도록> 중에서, 1990년, 가나화랑)

녹취·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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