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38) 화가의 길 선택과 뉴욕 정착
-1965년 9월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마치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갔다. 그때 뉴욕에서 무슨 일을 했는가?
“무엇보다 미국 록펠러재단에서 제공하는 연구기금을 받는 행운이 있었다. 재단에 찰스 파스라는 간부가 있었는데, 그는 서울을 자주 오갔다. 브라질로 출발하기 전에 서울에서 그를 만나 ‘펠로’ 약속을 받았다. 그래서 상파울루 가는 길에 뉴욕에 들러 록펠러재단 사무실도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김환기의 부인 김향안의 안내로 맨해튼의 록펠러센터에 갔다. 고층 빌딩으로 뉴욕의 상징과 같은 건축물의 하나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그대로 재단 사무실이었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금발 여인이 안내를 했다. 영화나 잡지에서만 보던 ‘블론디 걸’을 직접 만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물론 흑발이 더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세월이 좀 흐른 뒤였다.
나는 록펠러재단에서 ‘미술 연구’ 주제로 연구기금을 받았다. 기금은 미국의 미술관과 미술대학을 시찰하는 비용으로 사용했다. 그때 김창열도 기금을 받게 되어 영국 런던을 거쳐 뉴욕으로 왔다. 자연스럽게 동행하게 되었다. 우리는 미국의 주요 도시 30군데를 방문했다. 잘 짜인 프로그램과 지원으로 여행은 알찼다. 다만 취향이 다른 김창열과 가끔 일정 조정 관계로 불편하기도 했다. 그래도 새로운 미술의 현장을 찾는 프로그램은 훌륭했다. 우리는 뉴욕을 출발하여 보스턴, 클리블랜드, 시카고, 미니애폴리스 미네소타,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캔자스시티, 워싱턴디시, 필라델피아 등의 도시를 순례했다.
보스턴미술관은 아시아 미술 컬렉션으로 유명했다. 일본인 컬렉터 오카쿠라 덴신의 기여로 그렇게 되었다. 나는 거기서 동양미술의 진수를 한자리에서 즐기는 안복을 누렸다. 그보다 더 인상적인 작품은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1897)였다. 이 그림은 고갱이 말년에 타히티의 오두막에서 그린 걸작이다. 중앙의 선악과를 따는 인물을 중심으로 오른쪽의 어린아이부터 왼쪽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의 인간상을 표현했다.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에서는 조르주 쇠라의 대작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1884~86)를 감동 깊게 관람했다. 점묘파의 대표작으로 미술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작품이었다. 신인상파 화가의 명작을 감상한다는 사실이 가슴을 흔들었다.
시애틀에 가니 ‘정 트리오’ 가족들이 환대해 주었다. 그 가족이 서울 명동에서 고려정이라는 식당을 운영할 때, 내가 달러 환전을 도와주기도 해서 잘 아는 사이였다. 그 부모는 자녀 교육을 위해 1962년 아예 시애틀로 이주하여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정명화·정경화·정명훈, 음악가 3남매의 세계적인 성공은 부모의 헌신과 공이 컸다고 본다. 그때 그 모친(이원숙)이 손수 운전하면서 나에게 시애틀 구경을 시켜주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아트인스티튜트에서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를 보았다. 좌파 활동을 했던 리베라는 벽화 속에 ‘신은 없다’라고 썼는데, 어떤 기독교도가 와 이를 지웠다. 그러자 리베라는 다시 그 말을 써넣었다. 그는 파리 유학 시절 피카소와 가깝게 지냈다. 뒤에 조국 멕시코로 돌아가 벽화운동을 했다. 그의 어린 부인 프리다 칼로는 오늘날 더 유명한 화가로 대우받고 있다. 이들 부부는 러시아에서 망명 온 트로츠키에게 집을 내주는 등 헌신하기도 했다. 나는 공공미술로서의 벽화운동에도 관심의 폭을 넓혔다. 미술의 기능은 매우 넓었다.
로스앤젤레스(LA)에서는 화가 김봉태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는 60년미술협회 창립 회원이기도 했다. 엘에이는 코리아타운이 잘 되어 있었다.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의 절반이 엘에이에 있다고 할만큼 한인 밀집 도시였다. 그러고 보니 엘에이를 한국인에게 주었다면, 샌프란시스코는 중국인에게, 시애틀은 일본인에게 준 것 같았다. 한번은 워싱턴디시에서 가까운 볼티모어의 유흥가에서 우연히 흑인 여성의 스트립쇼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함께 갔던 김창열이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하느님은 공평하다. 흑인에게는 육체를 주었고, 백인에게는 두뇌를 주었고, 동양인에게는 마음을 주었다.” 특히 기억나는 일은 <미국의 소리>(보이스 오브 아메리카) 방송과 인터뷰한 사실이다. 미국에서 말한 내 목소리를 정릉 토막집의 우리 가족들도 들었다는 것이다. 세상은 좁아지고 있었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에서 마르셀 뒤샹의 <위대한 유리> 같은 작품을 감동 깊게 보았다. 작품 운송 도중 유리 액자가 깨졌는데, 이를 복구하고 나니, 뒤샹은 ‘이제야 작품은 완성되었다’라고 유명한 말을 남겼다. 뒤샹의 작품을 열심히 보고 있을 때 젊은 백인 여성들이 우리에게 질문을 해서 한참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런 사실 자체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훗날 뉴욕 맨해튼 거리에서 누군가 인사를 했다. 수녀복을 입고 있었다. 필라델피아에서 만났던 일행 중 한 여성이 그 사이에 수녀원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인연이란 참 묘했다.”
1965년 상파울루에서 뉴욕으로
록펠러재단 기금 받아 ‘미술 연구’
김창열과 전미 30개 도시 ‘순례’ 보스턴미술관, 폴 고갱 ‘우리는…’
시카고, 조르주 쇠라 ‘그랑드자트…’
샌프란시스코, 디에고 리베라 ‘벽화’
필라델피아, 마르셀 뒤샹 ‘위대한…’ 시애틀 이민 ‘정트리오’ 가족 ‘환대’
록펠러 파티에서 백남준과 첫 만남 ‘전임 김환기 이사장 선례’ 부담에도
“해방 뒤 미술행정 20년 봉사했으니…”
뉴욕북부 새러토가 스프링스 정착
스키드모어대학 방문교수 비자로
교회 관사 머물며 청소·관리일도
-1965년 결국 귀국하지 않고 뉴욕에서 정착했다.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되었는가?
“나는 해방 이후 문화예술계에서 계속 감투를 쓰는 등 예술행정의 일선에서 일했다. 20년 봉사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한국미술협회 이사장까지 했으면, 이제 화실로 돌아갈 때였다. 전업 작가의 길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했다. 나는 숱한 번민 끝에 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서울에서는 미술비평도 많이 썼지만 이제 글쓰기도 접고 싶었다. 귀국을 포기하려고 보니 황무지 같은, 그러나 현대미술의 현장인 뉴욕이 다가왔다. 물론 귀국해서 상파울루 비엔날레 관련 출장보고를 해야 도리였지만, 전임 커미셔너 김환기의 길을 반복한 셈이 되었다. 김환기 역시 대학교수 자리와 미협 이사장 지위를 버리고 뉴욕에 정착하지 않았던가. 그때 현직 미협 이사장이 돌아오지 않는 바람에 서울에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런 일을 나 역시 반복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한국 여권과 미국 비자 받기가 하늘의 별 따기 같던 시절, 나는 창작 전념을 위해 뉴욕 체류를 결정했다. 작품을 위해서는 ‘고독한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화가다. 화가는 작업을 해야 한다. 작가의 길은 세속적 행복을 포기해야 한다.
마침 줄리아드 음악학교 출신인 처제(김주환)가 뉴욕주 새러토가스프링스의 스키드모어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었다. 그의 독일계 남편은 피아노과 과장을 지냈다. 나는 처제의 주선으로 같은 대학의 방문교수 초청장을 받았다. 그래서 1년간 머물 수 있는 비자 문제를 해결했다. 결국 나는 새러토가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새러토가는 경마장이 있는 등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칼리지라는 독특한 주립대학도 있었다. 교실이 없는 대학으로 교수와 학생이 상호 방문하면서 수업을 했다. 직장인을 위한 대학이었다. 나는 본부 소속의 교수로 10년 동안 일했다. 맨해튼의 파크 애비뉴 전시장에서 열리는 학생 전시회 때면 작품을 심사하기도 했다.
숙소는 처제가 유서깊은 교회(새러토가 스프링스 뉴잉글랜드 회중교회)의 목사관에 딸린 관사를 얻어주었다. 월세를 내기는커녕 매월 150달러를 받는 좋은 조건이었다. 주일 예배를 위해 교회를 청소하고 종지기 소임을 맡는 일의 사례였다. 그래서 주중에는 맨해튼에서 미술관 순례를 할 수 있었고, 주말에는 교회 관리를 했다. 힘든 일은 여름에 잔디 깎기와 겨울에 눈 치우기였다. 새러토가는 겨울이 긴 고장이다. 눈이 오면 현관문이나 대문을 열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쌓였다. 눈 치우기는 정말 큰일이었다. 그럴 때면 스키드모어대학의 학장인 모즐리가 와서 도와주었다. 나는 신경쇠약에 걸린 그의 아들을 미술 레슨으로 고쳐준 적 있었다. 그 아들은 뒤에 볼티모어대학의 판화과 교수가 되었다.”
-1960년대 중반 뉴욕에서 활동하던 한국 화가는 누가 있었는가?
“그때 뉴욕에서는 김환기·김향안 부부, 한용진·문미애 부부, 김창열 그리고 나까지 다섯이 주로 모였다. 모두 청운의 꿈을 안고 뉴욕에 오기는 했지만, 영어가 유창한 것도 아니고,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현대미술에 익숙한 시절도 아니었다. 나는 원래 컬럼비아대학 출신으로 대학도서관에 한국실을 설치하게 한 조카(김주봉)의 집에서 신세를 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집에 가보니 이미 김창열이 선점하고 있어 난감했다. 그래서 새러토가로 가게 된 것이었다. 낯선 뉴욕에서 화가로 살아남기는 그야말로 혈전과 같았다. 호구지책을 위해 뭔가 일을 해야 했다. 김창열과 한용진은 도배하는 일을 했다. 뒤에 김환기와 김창열은 김보현의 소개로 유대인 운영의 넥타이 공장을 다녔다고 했다. 그때 스프레이로 물감을 뿌려 넥타이에 물방울을 그렸던 김창열은 뒤에 캔버스로 옮겨 와 자신의 독특한 ‘물방울 시리즈’로 연결되었는지 모른다. 원래 김창열은 데생 실력이 뛰어났다. 그는 이쾌대의 성북회화연구소에 다닐 때부터 이미 인체데생 실력으로 주목받았다고 했다. 콧등을 하얗게 칠해 강조하는 하이라이트 기법을 잘 썼는데, 이렇게 하얗게 점찍는 기법이 뒤에 물방울의 하이라이트로 발전한 것 같다. 미국 전역 미술관 순례를 마친 그해 연말 록펠러재단 초청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백남준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는 일본을 거쳐 독일에서 왔다고 했다. 예술계의 상식을 깨는 일을 잘 해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 성장할 줄 그때만 해도 아무도 몰랐다.”
-새러토가 정착 이후 인상적인 기억은?
“새러토가의 초기 시절, 한번은 지역의 볼스턴스파 여자고등학교 미술대회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적 있다. 그때 수상자로 데비와 버지니아라는 학생에게 상을 주었다. 그 무렵 나는 뉴욕주의 청사가 있는 올버니에서 발행하는 <타임스 유니언> 신문과 인터뷰를 했다. 대서특필된 기사의 제목은 ‘예술가는 투사였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공산주의와 싸운 이야기를 했더니, 기자가 ‘투사’라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그 미술대회 시상식 때 데비가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면서, 나에게 ‘싸우지 말라’(돈 파이트)고 말했다. 나는 미국과 함께 싸운 건데, 막상 미국의 학생은 싸우지 말라고 해서 순간 놀랐다. 게다가 그는 ‘사랑하라’(저스트 러브)고 말했다. 어떻게 공산주의자를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런데 또 한번 놀라운 인연이 생겼다. 최근에 그 여고생 데비가 어느덧 60대 후반의 할머니가 되어 나한테 장문의 편지와 사진을 보내왔다. 50년도 훨씬 전에 내가 줬던 선물도 간직하고 있었다. 고교 동문들 사이에 인터넷을 통해 나의 ‘길을 찾아서’ 연재 기사 소문이 돌아, 가나아트 쪽에 이메일을 보내 내 주소를 찾았다고 했다.
미술관 일주의 마지막 도시인 필라델피아에 도착했을 때, 록펠러재단에서 주선한 인터뷰를 했다. 그때 기자가 ‘미국을 둘러본 첫인상’을 물었다. 나는 “자동차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그 차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운전하는 사람도 잘 모를 겁니다.” 대답을 하고 보니, 일종의 문명비판 같은 느낌이 들었다. 폐허의 나라에서 온 내 눈에 미국은 정말 자동차가 많았다. “그런데 자동차들은 모두 어디로 가고 있는가.”
녹취·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1965년 브라질의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대표로 참가한 뒤 김병기는 화가로서 창작에 매진하기 위해 귀국 대신 미국에 남기로 결단을 내렸다. 뉴욕주 북부 새러토가 스프링스에 정착해 66~67년 1년에 걸쳐 완성한 ‘산학도’는 고향 평양시절 여름마다 어머니와 휴양갔던 금강산을 그리워하며 그린 7폭짜리 병풍형 대작이다. 삼성미술관리움 소장
1965년 김병기의 록펠러재단 펠로를 추천해준 찰스 B. 파스 박사. 1936년 도쿄제국대학을 나온 동양학 전문가인 그는 46~61년 록펠러재단 인문과 극동아시아 책임자에 이어 62년부터 재일본 미대사관의 공사참사관으로 도쿄에서 근무하며 수많은 한국 문화예술인들에게 미국 연수 기회를 주선해줬다. 사진 록펠러재단 누리집.
1965년 말 김병기(왼쪽)는 록펠러재단에서 연구기금을 함께 받은 김창열(오른쪽)과 미국 내 30군데 미술관과 미술대학을 순례했다.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제공
1965년 미국 미술 순례에 나선 김병기가 보스턴미술관에서 가장 인상 깊게 본 폴 고갱의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1897년).
김병기의 가슴을 설레게 한 신인상파의 대가이자 점묘화의 창안자,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자트섬의 일요일 오후’(1884~86). 1886년 파리에서 ‘제8회 인상주의 화가전’에 전시됐으나 홀대받았던 ‘그랑드자트…’는 한 부호에 의해 미국으로 건너와 1920년 이래 시카고의 상징이 됐고, 오늘날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를 세계 최고의 미술관으로 만들어주고 있다.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 누리집.
김병기는 샌프란시스코 시티 칼리지의 도서관에 걸린 디에고 리베라의 거대한 벽화 ‘팬 아메리칸 유니티’를 보고 공공미술의 가능성을 알게 됐다. 1939년 샌프란시스코 국제박람회 때 의뢰받아 40년말 완성된 벽화는 가로 22.56미터 세로 6.71미터에 이른다. 샌프란시스코 아트인스티튜트 누리집.
디에고 리베라는 ‘팬 아메리칸 유니티’ 벽화 속에 이혼한 부인 프리다 칼로를 여신으로 그려 놓았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재결합했다. 사진은 1931년 결혼식 때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김병기는 미국 미술 순례 마지막 지역인 필라델피아 미술관에게 만난 마르셀 뒤상의 작품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샘’과 더불어 뒤샹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위대한 유리’(1915~23년)는 유리판을 캔버스 삼아 그린 것으로, 위쪽은 신부를 아래는 신랑을 표현했다. 운반 중 깨져 다시 붙인 흔적 그대로 작품이 됐다.
록펠러재단 기금 받아 ‘미술 연구’
김창열과 전미 30개 도시 ‘순례’ 보스턴미술관, 폴 고갱 ‘우리는…’
시카고, 조르주 쇠라 ‘그랑드자트…’
샌프란시스코, 디에고 리베라 ‘벽화’
필라델피아, 마르셀 뒤샹 ‘위대한…’ 시애틀 이민 ‘정트리오’ 가족 ‘환대’
록펠러 파티에서 백남준과 첫 만남 ‘전임 김환기 이사장 선례’ 부담에도
“해방 뒤 미술행정 20년 봉사했으니…”
뉴욕북부 새러토가 스프링스 정착
스키드모어대학 방문교수 비자로
교회 관사 머물며 청소·관리일도
김병기가 1965년 귀국 대신 미국 체류를 결단하는 데는 63년 먼저 뉴욕에 정착한 김환기 전임 미협 이사장의 선례도 큰 자극이 됐다. 68년 뉴욕 화실에서 함께 한 김환기·김향안 부부. 사진 환기미술관 제공
김병기는 뉴욕주 북부의 작은 도시 새러토가 스프링스에 있는 유서깊은 뉴잉글랜드 컨그리게이셔널 처치의 관사에 살며 스키드모어대학 교수로 일했다. 1914년 엽서에 실린 뉴잉글랜드 컨그리게이셔널 처지의 전경.
김병기는 1965년 말 록펠러재단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백남준과 처음 조우한다. 독일에서 먼저 전위작가로 이름을 알린 백남준은 그해 여름 뉴욕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샬럿 무어먼과 누드 퍼포먼스 ‘24시간 해프닝’으로 체포 소동까지 빚어 이미 유명세가 자자했다. 사진 백남준아트센터 제공
김병기는 1965년 뉴욕주 새러토가 스프링스에 정착한 뒤 주도 올버니에서 발행하는 신문 <타임스 유니언>에 인터뷰가 실려 지역사회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자료 삼성미술관리움 제공
김병기가 1960년대 후반 뉴욕주 새러토가 스프링스의 미술대회 심사위원을 맡았을 때 시상식에서 ‘싸우지 말라’고 말했던 여고생 데비 피터슨. 최근 50여년만에 자신의 사진과 함께 소식을 전해왔다.
미국 엘에이 근처에 살고 있는 데비 피터슨은 최근 인터넷을 통해 ‘은사’ 김병기의 <한겨레> 회고록 연재 소식을 들었다고 전해왔다. 거실에 김병기의 사진을 붙여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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