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36) 한국미술협회 창립과 이사장 취임
추사나 겸재의 선은 뼈와 살이 겸비된 점으로 보아 서화에 있어 드문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조형문화는 그 스케일에 있어 그리 크지도 못하고 강하지도 못하다. 고구려의 벽화에서 볼 수 있는 박력을 제외하고는 규모가 작다는 약점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그 반면 우리들의 것은 단순, 순수, 청초, 겸허, 침묵이란 동양의 특질과 더욱 가깝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질이 오늘의 세계적인 시야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할 것인가는 한번 다시 생각해 볼 일이지만, 그리고 이것들이 다소 서구적인 의미의 근대의 분위기 속에는 불충분하게 느껴질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근대의 국제적인 흐름으로 보면 오히려 이러한 성격이 주목되고 있기도 한 것이다. 특히 서구적인 합리주의가 비합리주의 영역의 개척으로 전환되는 오늘의 상황에서 볼 때 동양이 지녀온 특질은 합리주의의 막다른 길의 한 타개점으로 제시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무한공간에로 기하학적인 면의 추상에서 비기하학적인 필세의 추상으로 바꾸어져 가고 있는 움직임으로 볼 때, 동양은 그리고 그의 가장 순수한 상태로서의 한국의 조형적 특질은 오늘의 국제적인 흐름에 많은 기여를 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바이다.”(김병기, ‘전통과 현대의 조화’, <서울신문>, 1960년 1월15일)
앞서 1959년 12월 흥미로운 기사가 신문에 났다. 화단에 나타난 ‘행동파’, 이들은 추상 경향의 화가들 모임으로 이름하여 행동파라 했다. 원래 이들은 봄부터 ‘실존미술가협회’를 만들어 활동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연말에 들어 다시 ‘행동파’로 결집되고, 이듬해 1월 창립전을 준비한다고 밝혔다. 이들 행동파는 김병기를 비롯해 유영국, 한봉덕, 김훈, 박서보, 정창섭, 문우식, 이종학, 김청관, 전상범, 김영학 같은 중견·신예 작가들이다.(‘그룹을 통해 본 회화운동사’, <세계일보>, 1959년 12월7일) 사실 행동파도 실존미술가협회도 불발탄이 되었다. 시대는 바뀌고 있었다.
1960년 4월 혁명의 횃불이 높이 올랐다. 미술계도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서울대 미술대의 경우, 장발 학장은 ‘어용교수’라고 학생들에게 지탄의 대상으로 올랐고, 김종영과 박갑성 교수는 교수 시위 행렬에 참가하면서 혁명의 의의를 높였다. 혁명은 미술계 기득권 실세들의 입지를 좁혔고, 반면에 소외지대가 부상되기도 했다. 현대미술가연합은 이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단체였다. 물론 이봉상 같은 구제도의 실세는 이 단체에 대하여 비형상주의로 위장한 허위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대한미술협회는 임시총회를 거쳐 발전적 해체를 결의했다. 이마동 위원장과 윤효중·박영선 부위원장 등의 사표를 수리하면서 얻은 결과였다. 물론 즉각 해체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반면 한국미술가협회는 자유당 정권 아래서 탄압을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존속을 결정했다. 하지만 이 협회 역시 독재정권에 저항한 사실은 없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현대미술가연합의 창립대회가 열렸다. 같은 해 10월 중앙공보관에 모인 70여명의 미술가들은 유영국을 대표위원으로 선출하고 활동에 들어갔다. 이 단체는 현대미술가의 권익 옹호, 전위적 작품 활동과 예술사회환경의 유대 강화, 국제교류 참가 등을 선언문에 담았다. 이 단체는 신문 보도처럼 ‘국전을 관료적이고 보수적이라고 비판하던 전위적 재야미술인의 결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국전 등 미술계 혁신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논조였다. 김병기, 정창섭, 이세득, 서세옥 등은 장발의 한국미술가협회를 탈퇴하고, 현대미술가연합에 참여했다. 연합의 주요 회원은 유영국, 김영주, 한봉덕, 박서보, 김창열, 이항성, 윤명로, 황규백 등이었다.
4·19혁명 횃불로 미술계도 새바람 불어
대한미협 발전적 해체-한국미협 존속
‘국전 비판 재야파’ 현대미술가연합 창립
대표에 유영국…김병기도 한국미협 탈퇴 5·16쿠데타 ‘모든 사회단체 해체’ 포고령
1961년 12월 3개 단체 통합 ‘한국미협’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첫 참가 결정
2대 이사장 김환기 커미셔너 맡고 출품도
김병기는 ‘도록’에 한국작가 소개문 집필
“김흥수 소개문 빠져 사이 멀어지기도” 1965년 3대 이사장…박서보·정창섭 도움
“해방 이후 꼬박 20년간 미술행정 봉사” 서울예고 시절 백문기와 ‘교표’ 디자인
“천재보다 예술가 만드는 교육 더 어렵다”
1961년 5월의 군사 쿠데타는 미술계의 지형을 바꿔놓았다. 군부정권은 사회단체 등록에 관한 법률을 공포했다. 더불어 포고령은 모든 단체를 해체시켰고, 새로운 단체를 구성하도록 했다. 미술계에서도, 새 단체 구성을 위해 계파별 주요 작가들이 모였다. 대한미협의 이봉상·김정숙·김경승·박래현, 한국미협의 박세원·임응식·박석환, 현대미협의 김병기·김영주·조용익·이항성, 무소속의 김흥수·장두건·서세옥 등이었다. 계파별 발기인은 김병기·김세중·김환기·김흥수 등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2월 들어서야 통합 미술단체인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가 결성되었다. 초대 이사장 박득순, 부이사장 김환기, 김세중이었다.
-1960년 전후의 미술계는 변화의 시대 같다. 단체 활동도 그렇고, 또 현대미술 운동도 새로운 국면을 맞은 것 같다. 당시 어떻게 지냈는가?
“나는 서울대를 퇴직하고 또 장발 학장과 결별하면서, ‘조선일보 초대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현대미련 결성에 참여하게 되었다. 반국전파라 할 수 있는 김창열, 박서보, 윤명로 등이 앞장섰다. 5·16 쿠데타 이후 혁명정부는 포고령으로 단체 통합을 명령했다. 그래서 결성된 것이 한국미술협회였다. 초대 이사장 박득순은 사실 도쿄 유학생 출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미술에 대한 뚜렷한 견해가 있는 작가도 아니었다. 같은 구상회화라 해도 오지호나 김주경은 자신의 논리가 있었지만 박득순은 그렇지 않았다. 국전파는 현실과 거리를 둔 구상회화를 선호했다. 그림 소재도 단순했는데, 그 가운데 여인좌상이 인기였다. 당시가 어떤 시대인데 여인좌상으로 국전을 휩쓸 수 있는가. 여인좌상 풍토는 일본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일본 미술은 프랑스와 달리 아카데미즘이 주류를 이루었다. 구상회화라 하더라도 어떤 내용이냐가 중요한 문제이지만.”
-한국미협의 제2대 이사장은 김환기였다. 어떻게 김환기가 이사장으로 선임되었고, 또 그는 어떤 일을 했는가?
“김환기 이사장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새로운 미술에 관심을 갖고, 또 에세이도 발표하면서, 폭넓은 인간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가 미협 이사장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시대적 추세라고 볼 수 있다. 당시는 분열되었던 미술계 풍토를 하나로 묶는 데 노력을 기울이게 했지 특별한 사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은 아니었다. 김환기 이사장 하면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가라는 기록이 있다. 사실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가는 미술계의 대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한국 미술의 국외전 최초 참가라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가를 결정했고, 이 행사를 미협에 위임했다. 그래서 미협 이사장은 일종의 프리미엄처럼 스스로 커미셔너가 되었다. 사실 비엔날레 커미셔너는 평론가나 큐레이터의 몫이다. 하지만 김환기는 이사장 신분이면서, 비엔날레 커미셔너를 맡고 출품작가 명단에까지 자신의 이름을 올렸다. 국제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난센스였다. 그때 우리 미술계는 그만큼 분업화되지도 못했고, 또 국제 행사에 익숙하지도 않았다.
당시 나는 비엔날레 도록에 유영국, 김영주 등 한국 작가 소개문을 썼다. 그런대 김기창·박래현 부부가 나를 찾아와 출품작가인 자신을 언급하지 않았다고 항의했다. 사실 나는 그의 출품작을 본 적도 없고, 또 잘 알지도 못했다. 그만큼 비엔날레 준비가 엉성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무튼 비엔날레 글 사건 이후 나와 김기창 사이는 벌어졌다. 나는 워낙 부인 박래현과 원래 가깝게 지냈다. 처녀 시절 그는 평양 우리 집에도 놀러 올 정도였다. 그때 청각장애가 있는 화가가 청혼을 해서 고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기창에게 있어 박래현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동료였다. 그 밖에 서세옥, 한용진, 유강열 등이 출품했다.”
-김환기에 이어 김 화백께서 미협 제3대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나는 특별하게 선거운동을 하지도 않았는데 투표에서 당선되었다. 현대미술을 옹호하는 작가들, 즉 박서보, 정창섭, 서세옥 같은 작가들이 도와주어서 그렇게 되었다. 국전 중심의 아카데미즘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미술계에서 현대미술을 선택한 작가들은 존재감 드러내기가 절실했다. 그래서 ‘미술단체 장악’이라는 방편을 활용하려 했던 것 같다.
사실 미협 이사장 자리는 작가로서 마이너스였다. 화실에 있어야 할 작가가 행정을 위해 사무실로 출근하는 일은 타락이나 다름없다. 1945년 해방 때부터 도미하는 65년까지 꼬박 20년간, 나는 미술행정의 일선에서 ‘봉사’했다.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작업하기 위해 미국을 선택했고, 거기서 또 꼬박 20년간 청순한 공간에서 살았다. 경제적으로는 고생이었지만 작가로서는 풍요롭기도 했다. 렘브란트나 세잔의 이력에서도, 밑바닥 생활을 할 때의 작품이 더 아름답다. 베르나르 뷔페는 곤경에 처했을 때 좋은 작품을 만들었고 그 뒤 자살했다. 마크 로스코 역시 그림이 잘 팔릴 때 자살하지 않았는가. 한평생 살다 보면, 기복이라는 것이 있다. 문명도 흥망성쇠가 있는데 하물며 개인의 삶에 어찌 기복이 없겠는가. 성공했을 때가 위기이다. 거꾸로 실패했을 때가 기회이다. 나의 삶도 우여곡절이 있고, 높낮이가 있다. 기복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 할 수 없다. 기복이 인생이다.”
-서울대 미대를 퇴직하고 서울예술고등학교에서 일했다. 예고 시절은 어떠했는가?
“1953년 이화여고에서 서울예고가 출범했다. 뒤에 맞은편 러시아대사관 자리에 건물을 신축해 이전했다. 모태인 이화여고는 기독교 학교여서 음악과 가까웠다. 예고는 영재교육을 염두에 둔 교육기관이었다. 음악 분야에서 천재라는 말은 쉽게 쓰이고 있다. 작곡 분야가 아닌 대개 연주자에게 해당하지만. 미술이나 문학은 소년 천재가 있을 수 없다. 세상을 보는 연륜이 뒷받침되지 않고 어떻게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겠는가. 미술은 모방예술이 아니다. 그래서 10대의 소년 천재는 나올 수 없다. 14살의 피카소가 벨라스케스 수준의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피카소를 천재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알베르토 자코메티가 이런 말을 했다. ‘피카소는 예술가인 줄 알았는데 그냥 천재이다.’ 이 말은 천재 위에 예술가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천재 되기보다 예술가 되기가 더 어렵다는 뜻이다. 교육적 측면에서, 천재보다 예술가 만드는 교육이 더 어렵다. 나는 이런 말을 서울예고 전교생 앞에서 한 적도 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음악과 학부모의 반응이 너무 싸늘해 나를 당황하게도 했다. 한국은 과도할 정도로 ‘천재병’에 걸려 있다. 예술은 재주나 기능보다 정신적 깊이가 더 중요하다.
장발 학장과 나와의 결별 때문이겠지만, 초기의 서울예고 출신은 서울대 미대 입학에 애를 많이 먹었다. 예고 선생으로 백문기·정창섭·문학진·서세옥 그리고 뒤에 김창열 등이 있었다. 이들은 일종의 반장발파여서, 장발 퇴임 이후 서울대 교수가 될 수 있었다. 서울예고 교표는 내가 디자인했고 백문기가 거들었다. 교표 안의 사각형은 무대를 기본으로 하여 상징한 것이다. 이 형식은 내가 도쿄 유학 시절 도쿄학생예술좌 기관지였던 <막>(幕)의 표지 디자인을 연상해서 만든 것이다. 무대는 예술가의 활동공간이 아닌가. 그러면서 사각형은 그림의 액자와 같아 예고의 성격과 맞았다.”
녹취·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1963년 9~10월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가는 한국 미술의 첫 국제무대 진출이었던 까닭에 ‘화단의 대사건’이자 김병기의 인생에도 커다란 반전의 기회가 된다. 브라질이 1951년부터 남미 최초이자 최대 예술축제로 시작한 상파울루 비엔날레는 이비라푸에라 공원에 있는 비엔날레 전용 전시관에서 열린다. 한국미협 주도로 모두 7명이 첫 한국 출품작가로 뽑혔다.
대한미협 발전적 해체-한국미협 존속
‘국전 비판 재야파’ 현대미술가연합 창립
대표에 유영국…김병기도 한국미협 탈퇴 5·16쿠데타 ‘모든 사회단체 해체’ 포고령
1961년 12월 3개 단체 통합 ‘한국미협’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첫 참가 결정
2대 이사장 김환기 커미셔너 맡고 출품도
김병기는 ‘도록’에 한국작가 소개문 집필
“김흥수 소개문 빠져 사이 멀어지기도” 1965년 3대 이사장…박서보·정창섭 도움
“해방 이후 꼬박 20년간 미술행정 봉사” 서울예고 시절 백문기와 ‘교표’ 디자인
“천재보다 예술가 만드는 교육 더 어렵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국가재건위의 명령에 따라 12월29일 9개 협회로 구성된 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가 창립됐다.
1961년 12월20일 ‘대한미협·한국미협·현대미술가연합’은 한국미술협회로 통합해 박득순을 초대 이사장으로 뽑았다.
한국미협 2대 이사장이자 커미셔너 자격으로 1963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한 김환기(맨 오른쪽)가 자신의 출품작 <구름과 달> 앞에서 비엔날레 첫 개최자이자 대회장인 치칠로 마타라조(맨 왼쪽) 등과 함께했다.
1963년 제 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의 <도록>. 김병기는 미술비평가로서 도록에 실린 한국 출품작가들에 대한 소개글을 집필했다.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도록>에 실린 한국 출품작가 김환기의 <구름과 달>.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출품작가 가운데 동양화 부문 3명 중에 뽑힌 김기창(왼쪽)은 부인 박래현(오른쪽)과 더불어 김병기와 친밀했으나 <도록> 소개글을 써주지 않았다’고 오해하면서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다.
김병기는 1965년 1월 한국미협 정기총회에서 김병기는 3대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부이사장 겸 상임이사로 뽑힌 서세옥 등 현대미술 작가들의 압도적인 지지 덕분이었다.
김병기(아랫줄 맨왼쪽)는 1953년 서울예고 창립 초기부터 산파 노릇을 하다 58년부터 미술부장을 맡아 65년 미국 이주 때까지 재직했다. 김흥수(윗줄 왼쪽 둘째), 백문기(윗줄 맨오른쪽), 김창렬(아랫줄 왼쪽 둘째) 등도 미술부 교사로 함께 일했다. <서울예고 30년사>에 실린 사진.
1963년 신축 이전한 서울예고의 정동 교사. <서울예고 30년사> 중에서.
김병기가 디자인한 서울예고 교표.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