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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피난 시절 장준하와 친분 ‘사상계’ 창간에도 참여했다”

등록 2017-09-28 10:54수정 2018-01-08 09:37

[길을 찾아서] (35) 현대미술운동과 비평활동
1957년 서울대 미대에서 타의로 물러난 김병기는 미술평론 발표와 강연 등을 통해 현대미술운동에 나섰다. 50년대말~60년대초 아시아재단의 기금으로 전국을 돌며 ‘현대미술 오픈 렉처(공개 강좌)’를 다니기도 했다. 지역 화단의 반감 탓에 도망치듯 빠져나온 광주 강연 때 이세득·김병기·김영주의 모습.
1957년 서울대 미대에서 타의로 물러난 김병기는 미술평론 발표와 강연 등을 통해 현대미술운동에 나섰다. 50년대말~60년대초 아시아재단의 기금으로 전국을 돌며 ‘현대미술 오픈 렉처(공개 강좌)’를 다니기도 했다. 지역 화단의 반감 탓에 도망치듯 빠져나온 광주 강연 때 이세득·김병기·김영주의 모습.
“추상회화는 먼저 실재의 세계가 반영되는 회화와는 전혀 다른 공간을 의도하고 있으며, 새로운 공간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요소는 회화의 기본적인 것, 내부 현실에서 순수하게 나오는 것 혹은 표상으로까지 추상되는 형태와 색채로서, 공간을 결정하는 화면의 조직을 위한 구성뿐이다. 그리고 추상회화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유일한 요소가 또한 이 구성에 있다. 추상회화에서 구성이란 문제가 크게 나타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김병기, ‘추상회화의 문제’, <사상계> 1953년 9월)

“젊은 세대들의 비장한 부정적 자세는 현실의 모순과 대조하여 저항을 의도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세에 독자성이 부족하지는 않을까. 너무나도 판에 박은 듯한 작품들. 이를테면 너무나도 앵포르멜적이고 추상표현적인… 앵포르멜의 이데(id?e)가 지난 수십년간에 있어 마련된 모던아트의 뜻하지 않은 고정개념을 다시 한번 박차려는 과감한 부정이라 할진대, 이것을 하나의 유형으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미 앵포르멜의 기본태도에서 벗어나는 것이 된다. 채료(彩料)를 뿌리거나 흘리거나 문지른다는 것은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굳어버린 의식의 밑바닥에서 숨어 있는 의식을 끌어내 보자는 것일 것이며, 결코 뿌리는 기법의 체득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요컨대 작가와 작품과 현실과의 밀도가 어느 정도의 것이냐가 문제이다.”(김병기, ‘회화의 현대적 설정문제’, <동아일보> 1959년 5월30일)

-1950년대부터 도미하는 65년까지 현대미술 운동 혹은 미술이론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어떻게 하여 작가가 이론 분야에서까지 활동하게 되었는가?

“부산 피난지에서 ‘피카소와의 결별’을 발표한 이래 미술 이론가로 활동하게 되었고, 또 많은 글을 쓰기도 했다. 나의 주장은 한마디로 ‘현대미술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보수적 아카데미즘의 화단 풍토에서 추상미술 등 새로운 미술의 정착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현대미술 정착을 위한 조직 활동이나 집필을 많이 하게 되었다. 한국미술평론가협회 결성도 그와 같은 목적의 하나였다. 1960년 7월 나는 이경성, 김영주 등과 함께 협회 조직에 앞장섰지만, 창작을 위해 이내 탈퇴했다. 그때 한국미술평론가협회는 대표간사로 김영주, 간사에 김중업과 나 김병기, 감사는 김영기, 그리고 회원으로는 최순우 등 10여명이 참여했다. 이경성은 원래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지 않았고, 김영주와 내가 비교적 커다란 목소리로 미술이론을 말했다. 당시 현대미술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이론가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의 역할이 매우 컸다. 체계는 불투명했지만 그래도 김영주가 열심히 한 편이었다.

한번은 아시아재단의 기금을 받아 전국 순회 ‘현대미술’ 강연을 했다. 나와 김영주가 강연했고, 이세득이 슬라이드를 돌려주었다. 부산과 대구에서는 호응을 받았으나 전주에 가니 청중석 분위기가 달랐다. 광주에 가니 아예 노골적으로 반발심을 보여 간신히 강연회장을 빠져나온 기억이 있다. 전통을 중시 여기는 지역 특색 때문인지 추상미술과 초현실주의 미술 같은 현대미술에 반감을 보인 것이다. 그런 광주에서 세계의 현대미술과 호흡을 함께하는 광주비엔날레를 개최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그동안 아픔이 있었지만 경의를 표하고 싶다. 1957년 아시아재단 한국지부는 미술가들에게 미술재료를 공급하고 공보관에서 미술전시까지 열어 준 일도 있다. 약 90명의 출품작가 가운데 나도 참여한 적이 있다.”

1951년 부산 ‘피카소와의 결별’ 발표
현대미술 이론가로 집필활동도 계속

1952년 백낙준 발행 ‘사상’에 기고
이듬해 장준하 ‘사상계’로 재창간하자
“표지장정·삽화 맡고 평론도 발표”

1960년 이경성·김영주 등과 함께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앞장서 재결성

아시아재단 지원받아 전국순회 강연
부산·대구 호응…전주·광주에선 싸늘
“추상미술 ‘반감’에 도망치듯 나와”

1958년 뉴욕서 첫 ‘한국현대미술전’
프새티 교수 방한 ‘37명 107점’ 선정
“발표무대 없던 국내 화단에 큰 반향”

-2014년 12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김병기: 감각의 분할> 회고전 도록을 보면, 김 화백께서 발표한 글의 문헌 목록이 수록되어 있다. <사상>의 ‘현대미술의 형성과 동향’(1952년 9월)으로부터 ‘추상회화의 문제’(1953년), ‘전통이란 것과 새로운 것’(1956년), ‘모던아트의 반세기’(1960년) 등 40여편이 그것이다. 대부분 신문에 기고한 글이지만, 비교적 긴 글은 <사상계>에 주로 발표했다. 이 잡지와 특별한 관계가 있었는가?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는 나보다 두 살 아래인데 부산 시절 처음 만나 이내 친해졌다. 나는 장인(김동원)의 친구이자 문교부 장관이던 백낙준 선생에게 신년 세배를 즐겨 갔다. 그러면 그곳에서 으레 장준하를 만났다. 애초 백낙준이 발행하던 <사상>이 폐간당하자, 편집장을 맡았던 장준하가 백낙준의 자금 지원을 받아 재창간했는데 그게 <사상계>였다. 나는 그 잡지의 표지 장정과 본문 삽화 등 편집을 도와주었다. 서울대 미대를 떠나게 되면서, 시간 여유가 생기는 덕분에 본격적으로 미술론을 집필할 수 있었다. ‘모던아트의 반세기’도 <사상계>에 연재한 글이었다. 정말 글쓰기는 심혈을 기울이게 했고, 피 말리는 작업이었다. 아무튼 나는 현대미술론 보급을 위해 많은 글을 발표했고, 강의 또한 많이 했다. 신문지상에서 김창열과 논쟁을 하기도 했다. 김창열은 서울대 미대를 다니다 전쟁 와중에 마치지 못했지만 경찰학교 도서관에 근무하면서 독서량이 많아 나름대로 이론무장을 하고 있어 대화가 되었다.”

전후 작품 발표 무대가 절대 빈곤했던 한국 미술계는 58년 뜻밖의 첫 국외 진출 기회를 맞았다. 1957년 출품작 선정을 위해 한국에 온 엘렌 프새티 교수와 함께 한 이응로 도상봉 이마동 김영기.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전후 작품 발표 무대가 절대 빈곤했던 한국 미술계는 58년 뜻밖의 첫 국외 진출 기회를 맞았다. 1957년 출품작 선정을 위해 한국에 온 엘렌 프새티 교수와 함께 한 이응로 도상봉 이마동 김영기.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미국 조지아대 교수이자 동양미술 전공자인 엘런 프새티의 기획으로 58년 2월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전’의 포스터.
미국 조지아대 교수이자 동양미술 전공자인 엘런 프새티의 기획으로 58년 2월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전’의 포스터.
-1958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에서 ‘한국현대미술전’을 개최했다. 이 전시는 어떻게 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는가?

“1957년 조지아대학 동양미술사 교수이자 기획자인 엘런 프새티(코넌트)가 서울에 왔다. 다음해 2월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에서 ‘한국현대미술전’을 개최할 목적으로 출품작 선정을 하기 위해서였다. 프새티는 나를 찾아와 전시를 위한 자문과 협조를 구하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 화랑이나 미술관 같은 발표 무대가 없을 때여서 서울의 미술가들은 바짝 긴장했다. 그래서 각 미술단체들은 프새티의 작품 선정을 도와주기 위해 한자리로 작품을 모았다. 대한미협은 숙명여고 체육관, 한국미협은 서울대 미대, 그리고 무소속 작가들은 코리아하우스에서 작품을 진열했다. 300여점의 작품을 둘러보고 프새티는 37명의 출품작 100여점을 선정했다. 이중섭 이외 박수근, 도상봉, 장욱진, 윤중식, 최영림, 변종하, 류경채, 문학진, 이세득, 정창섭, 박서보, 이응노, 김기창, 박래현, 장우성, 박노수, 성재휴, 김영기 등이었다. 프새티의 작가 선정 작업은 한국화단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이에 프새티는 작품 선정 기준을 발표했다. 지나친 전통 위주의 작품과 모방 작품을 배제하고, 거기다 감상자인 미국인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뽑았다고 했다. 이러한 프새티의 발언에 대하여 ‘안하무인’이라고 비판하는 화가도 적지 않았다. 미국에서의 첫 한국미술전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반향은 컸다.

뉴욕 메디슨가에 새로 문을 연 월드하우스 갤러리에서 ‘한국현대미술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뉴욕 메디슨가에 새로 문을 연 월드하우스 갤러리에서 ‘한국현대미술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제공

프새티가 선정한 37명의 작품 107점 가운데 하나인 김병기의 <가로수>.
프새티가 선정한 37명의 작품 107점 가운데 하나인 김병기의 <가로수>.

미국 뉴욕 줄리아드음대에서 유학한 피아니스트 처제(김주환)가 1958년 당시 월드하우스 전시장에 걸린 <가로수>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미국 뉴욕 줄리아드음대에서 유학한 피아니스트 처제(김주환)가 1958년 당시 월드하우스 전시장에 걸린 <가로수>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뉴욕 전시에 나는 <가로수> 작품을 출품했다. 그런데 전시 이후 작품 반환이 제대로 되지 않아 문제가 되기도 했다. 다행히 내 작품은 미국의 처제가 찾아 보관해둔 덕분에 뒤늦게 내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맨해튼 5애비뉴 화랑가의 상업갤러리에서 어찌해서 한국미술을 다루었지는 궁금하기도 하다. 아무튼 한국미술의 뉴욕 진출은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될 만했다.”

-조선일보사 주최 ‘현대작가 초대미술전’은 어떻게 성사되었는가?

“전후 국전의 보수적 아카데미즘에 반발하는 일군의 현대작가들이 있었다. 드디어 ‘반국전’ 기류가 서서히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나는 <조선일보> 주필 홍종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우리 집안의 종손인 사촌형(김병선)과 평양고보 동창생이어서 나를 동생처럼 가깝게 대해 주었다. 홍종인은 나와 더불어 유영국과 김영주를 대접하면서 어울렸다. 그 결과로 자연스럽게 현대미술 전시라는 연례행사와 현대미술연구소 개설로 이어졌다. 연구소는 서울 광화문 사거리 부근에 자리해 후학들에게 현대미술을 가르쳤다. 지도교수는 우리 3명이었지만, 유영국은 남 앞에서 이론적인 이야기를 한 적 없어 현대미술론은 주로 내가 담당했고, 김영주가 거들었다. 연구소는 입시 미술학원이 아니라 그야말로 현대미술 보급의 전진기지 같은 구실을 했다. 교습생은 방혜자 등 젊은이들이 많았다.

‘현대작가 초대미술전’은 국전 반대파인 나를 비롯해서 유영국, 김영주 등이 주동했고, 화가 출신으로 <조선일보> 기자였던 한봉덕이 실무를 맡았다. 물론 홍종인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1957년 11월 제1회 전시를 덕수궁미술관에서 30여명의 작품으로 개막했다. 출품작가는 이응노, 박생광, 서세옥, 권영우, 김경, 정규, 전혁림, 최영림, 김영주, 김창열, 문학진, 박서보, 이세득, 정창섭 등이었다. 당시 전시 목적으로 내건 내용은 국전 주류에의 대항과, 전위적 모던아트의 지향이었다. 국전에 맞선 민전의 본격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홍종인은 외국에서 본 현대미술 작품 이야기를 했다. 그때만 해도 외국 여행은 하늘의 별 따기와 다름없었다. 그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을 홍종인이 기자들 앞에서 나에게, 서양 현지에서 직접 미술작품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서 망신을 주었다. 그래서 홍종인에게 ‘선생님은 신문 일이나 하시지요’라고 불쾌한 심정을 표하기도 했다. 그의 호사 취미는 전문가 이상으로 자신을 과시하려 했다. 사실 나는 도쿄에서 간헐적으로 서양미술 원작을 보았지 대부분은 도판을 보고 공부한 처지였다. 현대작가 초대전을 열 무렵 나는 장발 학장에 의해 서울대에서 나와야 했기에 정신적으로 많이 위축되었을 때였다.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절실했다. 초대전도 서너 번 참여했을까, 오래가지는 못했다. 미국행의 조건이 그렇게 서서히 쌓이고 있었다.”

-현대미술의 불모지에서 ‘전도사’처럼 현장에서 많은 활동을 펼쳤다. 그렇다면 현대미술론은 어떻게 정리할 수 있는가?

“나는 현대미술의 출발지점에서 세잔을 중요한 화가로 보았다. 사실 세잔은 추상회화 한 점도 그리지 않았다. 그는 형상성을 버리지 않은 화가였다. 하지만 무엇이 형상성인가. 재스퍼 존스를 보자. 그는 과녁, 성조기, 지도, 숫자 등을 즐겨 작품에 담았다. 구체적인 형상이 있는 오브제들이다. 하지만 재스퍼 존스의 작품을 구상화라고만 볼 수 있는가. 그의 작품은 ‘틈새’의 작품, 즉 현대미술이다. 훗날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세잔과 재스퍼 존스 2인전을 개최한 적이 있다. 이 둘의 한자리 동석은 대단한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시를 보고 나는 형상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추상화가처럼 작품 활동을 했지만, 사실 나는 체질적으로 형상성을 떠날 수 없었다. 형상과 비형상은 동전의 앞뒷면에 불과했다. 형상의 유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메시지다. 작품에서 ‘무제’는 있을 수 없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형상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완전 추상이란 존재할 수 없다. 형상은 자연이다. 예술가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연스러워야 한다. 형상을 버려야 한다는 추상화가의 독단이 염려스러울 따름이다. 추상을 안일하게 되풀이할 때 현대미술은 타락하기 시작한다. 추상은 관념이다. 구상회화는 아무리 반복해도 똑같아질 수 없다. 나는 국내에서는 추상미술을 했지만 도미 이후 형상성을 되찾았다. 이런 의미에서 요즘 유행하는 이른바 단색화는 자기복제 같아, 관념의 과잉 같아, 우려스럽기도 하다. 미술창작품은 공장 제품이 아니다. 창작이라기보다 장인 같은 기교 중심의 추상회화는 문제가 많다.

예술은 과학적 단계를 밟아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변화할 따름이다. 성경에도 나와 있지만 태양 아래 새것은 없다. 해석이 다를 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4년에 걸쳐 <모나리자>를 그렸지만, 계속 미완성으로 여겼다. 예술의 본질은 미완성이다. ‘미완성의 미학’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작품은 인간처럼 미완성이다. 인간에게 있어 완성은 없다.”

녹취·구술/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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