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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전쟁과 예술은 상극이니 종군화가도 비현실적 단어다”

등록 2017-08-24 01:52수정 2018-11-08 14:32

[길을 찾아서] (31) 국방부 종군화가단의 활동

김병기는 1951년 6월 부산에서 국방부 정훈국의 요청을 받고 종군화가단 결성을 주도하고 부단장을 맡았다. 하지만 전란의 혼란 속에 예술인들의 종군 활동이나 전시미술 작품에 대한 기록과 증언은 엇갈리고 있다. 1952년 옛 부산시청 건물에 내걸린 대형 선전화 <자유의 여신>(왼쪽 사진)이 대표적으로, 외국 작품을 흉내 낸 그림을 종군화가단에서 그린 기억이 없다고 김병기는 증언했다.
김병기는 1951년 6월 부산에서 국방부 정훈국의 요청을 받고 종군화가단 결성을 주도하고 부단장을 맡았다. 하지만 전란의 혼란 속에 예술인들의 종군 활동이나 전시미술 작품에 대한 기록과 증언은 엇갈리고 있다. 1952년 옛 부산시청 건물에 내걸린 대형 선전화 <자유의 여신>(왼쪽 사진)이 대표적으로, 외국 작품을 흉내 낸 그림을 종군화가단에서 그린 기억이 없다고 김병기는 증언했다.
전쟁의 반대어는 평화이기도 하겠지만, 예술일 수도 있다. 전쟁은 예술가의 신체는 물론 정신까지 피폐하게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쟁은 무수한 예술작품을 파괴시킨다. 창작의 산실을 잃고 피난의 가시밭길에서 헤매야 했던 예술가들, 감수성이 예민한 그들의 고통은 남달랐다. 1951년 1·4 후퇴 이후, 화가들은 먼저 대구에서 모였다. 이름하여 ‘종군화가단’이었다. 이와 관련된 이마동의 증언은 이렇다.

“피난중 경황이 없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가운데 장발, 이선근, 나 이렇게 셋이 어느 날 저녁식사를 하던 중에 종군화가단을 만들어 전쟁 속에서나마 화가들을 한자리에 모아 뭉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것이 발단이었지요. 그 후 이선근(당시 국방부 정훈국장)씨와 최일(당시 육군 대위)씨 외 몇 명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피난지 대구에서 결성이 되었지요. 단장으로는 박득순씨가 처음으로 맡았었고, 월남화가 박성환, 윤중식씨 외 여러 명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일선 지역으로 많이들 파견되었습니다. 그 후 부산으로 내려와서는 내가 단장을 맡았는데, 부단장으로는 지금 미국에 가 있는 김병기씨와 이세득씨가 수고를 하며 광복동에 있는 허름한 다방 2층에 모여서 군복을 입고 마크도 달았지요.”(‘6·25와 한국작가의 작품’, <미술과 생활>, 1977년 6월)

대구 시절의 종군화가단은 본격적 체계를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백문기 중심의 공군종군화가단도 생겼고, 또 윤효중과 김환기 중심의 진해 해군종군화가단도 있었다. 체계 없이 여기저기서 종군화가단 비슷한 모임이 생겼기 때문에 지금도 가닥을 정리하기 쉽지 않다. 게다가 후일 관계자들의 증언이 일치하지 않아 더욱 혼란을 가중시키기도 했다. 예컨대 공군종군화가단 창단과 무관한 김병기가 공군본부에서 종군화가증을 받았다는 등 오류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병기는 1950년 10월 공보처에서 조직해 전선에 파견했던 종군문화반 가운데 서부전선·개성·평양을 담당한 제3대 소속이었다.(1950년 10월26일치 <동아일보>)
김병기는 1950년 10월 공보처에서 조직해 전선에 파견했던 종군문화반 가운데 서부전선·개성·평양을 담당한 제3대 소속이었다.(1950년 10월26일치 <동아일보>)
국방부에서 1951년 초 대구에서 먼저 조직했던 종군화가단인 ‘정훈국 선전과 미술대’의 기념사진. ‘고바우 영감’의 만화가 김성환은 젊은 화가 30여명이 활동했다고 증언했다.
국방부에서 1951년 초 대구에서 먼저 조직했던 종군화가단인 ‘정훈국 선전과 미술대’의 기념사진. ‘고바우 영감’의 만화가 김성환은 젊은 화가 30여명이 활동했다고 증언했다.
-임시정부가 부산으로 옮겨 가고, 많은 작가들이 부산에 모이면서 본격적인 종군화가단의 결성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는가?

“1951년 6월25일로 기억한다. 국방부 정훈국의 강경모 대위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국방부 산하에 본격적인 국군 종군화가단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미술동맹, 50년미술협회 등 평양과 서울에서 조직의 경험이 있는 나를 주목했던 것 같다. 많은 작가들이 길에서 헤매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망설일 수 없었다. 우선 피난지 화가들의 신분 보장을 위해서라도 종군화가단 조직이 중요했다. 이를 위해 이마동을 단장으로 추대하고, 나는 부위원장을 맡았다. 하지만 모든 일은 내가 처리해야 했다. 이세득을 사무장으로 하여 실무를 맡겼다. 이마동을 위원장으로 추대한 것은 그와 친분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나는 간송(전형필)과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고미술 수집가로서 부친(김찬영)과 인연이 남달라서 특히 그랬다. 이마동은 간송이 운영하던 보성고등학교의 교감을 지냈다. 그래서 우리 3인은 자주 어울렸다. 간송은 미술 유학중이던 아들(전성우) 자랑을 많이 했다. 그만큼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컸다. 그렇다고 내가 이마동 작품까지 좋아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이마동이 홍익대 학장 하던 시절, 나는 홍대 특강에서 학생들에게 ‘이마동 같은 그림을 그리면 안 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보수적 화풍은 내 취향과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1951년 부산에서 조직된 국방부 종군화가단의 단장 이마동이 그린 간송 전형필의 초상화(1956년작). 보성고 교장과 교감으로 인연을 맺은 전형필과 이마동은 김병기보다 10년 연배였지만 피난시절 자주 어울렸다. 간송미술관 소장.
1951년 부산에서 조직된 국방부 종군화가단의 단장 이마동이 그린 간송 전형필의 초상화(1956년작). 보성고 교장과 교감으로 인연을 맺은 전형필과 이마동은 김병기보다 10년 연배였지만 피난시절 자주 어울렸다. 간송미술관 소장.
아무튼 나는 미술계 전체를 아우르는 국방부의 종군화가단 조직에 앞장섰다. 단원은 김흥수, 도상봉, 박득순 같은 화가부터 서울대를 막 나온 김세중, 문학진, 권영우 같은 신인 등 50~60명 이상이 참여했다. 국방부 소속의 공식 종군화가단이라 할 수 있지만, 사실 화가들에게 특별한 혜택은 없었다. 군복 정도를 지급했지 무슨 월급이나 미술재료를 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신분 보장을 책임지는 단원증을 주어, 이른바 ‘빨갱이’ 소리는 듣지 않게 했다. 피난 생활이었기 때문에 작가들 모두가 어려운 처지였다. 어느 날 나는 중앙동 항구 근처의 해변을 걷다 쓰러져 있는 이중섭 가족을 발견했다. 굶주리다 허기져 그렇게 된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나는 이중섭 가족에게 쌀 배급증을 얻어주었다. 그리고 용두산 근처 천막촌에 자리를 잡게 했다. 우정의 표현이었는데, 쌀 배급을 해주었다는 소문이 나 곤욕을 치러야 했다. 다른 화가들도 나를 찾아와 쌀 배급을 받게 해달라고 항의했기 때문이다. 사실 종군화가라 하여 물품을 배급한 사실은 없었다. 게다가 이중섭은 종군화가단과 특별한 관계도 없었다.”

김병기는 부산 피난 시절 떠돌던 이중섭 가족을 발견해 쌀배급증과 천막집을 마련해주고 종군화가단에도 참여시켰다. 캔버스 살 돈이 없어 담뱃갑 속 은박지에 골펜으로 새겨 은지화를 그리던 시절이다. 1952년 겨울 부산 광복동 루네쌍스 다방에서 <기조전> 동인전을 열던 무렵으로 왼쪽부터 이중섭·박고석·한묵.
김병기는 부산 피난 시절 떠돌던 이중섭 가족을 발견해 쌀배급증과 천막집을 마련해주고 종군화가단에도 참여시켰다. 캔버스 살 돈이 없어 담뱃갑 속 은박지에 골펜으로 새겨 은지화를 그리던 시절이다. 1952년 겨울 부산 광복동 루네쌍스 다방에서 <기조전> 동인전을 열던 무렵으로 왼쪽부터 이중섭·박고석·한묵.
1951년 6월25일 정훈국 대위 찾아와
국방부 공식 종군화가단 조직 요청해
이마동 단장 추대하고 부단장 맡아
사무장 이세득과 38선 대치 전선까지

거리 헤매던 50여명 ‘신분보장’ 혜택
모두 6차례 전시회…‘해변가족’ 등 출품

“해변에 쓰러져 있는 이중섭 가족 발견”
쌀배급증·천막촌 ‘특혜’ 소문나 항의도

“공군화가증 받았다는 기록은 오류”
부산청사 걸린 ‘자유의 여신’도 무관
“외국 명화 흉내 작업 참여할 리가…”

여러 화가단 ‘증언’ 달라 검증 필요
전쟁현실 외면한 작품도 많아 ‘논란’

이세득의 1950년대 초반 대표작으로 꼽히는 <거리에서>.
이세득의 1950년대 초반 대표작으로 꼽히는 <거리에서>.
-종군화가단은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했는가?

“일선 시찰과 작품 제작 그리고 전시 등이 중요한 활동이었다. 나는 강경모 대위가 직접 운전하는 차에 올라 일선을 방문했다. 이마동은 대개 빠졌고 이세득과 함께 다녔다. 우리는 강원도 인제, 양구 같은 최일선에도 달려갔다. 우리는 군복에 군모까지 썼다. 다만 모자에 달 계급장이 없어 국방부 마크를 달았다. 국방부 마크는 배의 닻 모양 위에 빛나는 별 하나가 있다. 멀리서 보면 별 하나의 준장 계급장처럼 보였다. 그래서 군인들은 우리들을 장군인 줄 알고 경례했다. 거기다 후방의 문관이 일선 지구 시찰을 왔다고 군단장은 정성어린 대접을 했다. 최일선에서는 바로 코앞에서 아군과 적군이 총을 겨누면서 대치하고 있었다. 전쟁터를 실감할 수 있었다. 어쩌다 참호에 가면, 국군과 미군이 함께 잠자고 있었다. 화가들은 전선의 광경을 그림에 담았다.

종군화가단 사무실이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만남의 장소는 다방이었다. 용두산공원 부근의 ‘금강다방’이 예술인 집합의 중심 다방이었고, 그다음이 김동리 소설에도 나오는 ‘밀다원’이었다. 종군화가단 전시는 대략 여섯 번 정도 개최한 것 같다. 6회(1953년) 전시에서는, 고희동 노수현 박노수 서세옥 권영우 도상봉 이마동 윤중식 황염수 박득순 한묵 김흥수 이준 권옥연 문학진 등이 출품했다. 나는 미군 보급창의 잡지 폐지 경매에서 혜택을 준 <타임> 기자 출신 길버트를 초청하여 종군화가단 전시를 안내하기도 했다.

국방부 종군화가단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6회의 전시미술 전람회를 열었다. 김병기도 여러 차례 출품했으나 작품은 남아 있지 않다. 대신 훗날 한국전쟁 체험과 상흔을 담은 작품을 여럿 그렸다. 1956년 서울 이화여중에서 열린 전시회에 냈던 <가로수>는 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있는 피에타 형식을 따왔다.
국방부 종군화가단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6회의 전시미술 전람회를 열었다. 김병기도 여러 차례 출품했으나 작품은 남아 있지 않다. 대신 훗날 한국전쟁 체험과 상흔을 담은 작품을 여럿 그렸다. 1956년 서울 이화여중에서 열린 전시회에 냈던 <가로수>는 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있는 피에타 형식을 따왔다.
김병기는 두보의 시 <춘망>의 첫 구절 ‘국파산하재’에서 따 온 ‘산하재’도 시리즈로 그렸다.(1988년작)
김병기는 두보의 시 <춘망>의 첫 구절 ‘국파산하재’에서 따 온 ‘산하재’도 시리즈로 그렸다.(1988년작)
피난 시절 그린 나의 작품 가운데 <해변가족>이 있다. 5명의 가족이 둘러 있는 상황에서 아이가 생선 한 마리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이 작품은 1953년 2월 대한미협 주최 3·1절 기념전에 출품했다. 사람의 형태는 사라지고 기름걸레같이 ‘구겨진’ 시체와 그물로 덮어 위장한 대포 같은 것을 그린 작품도 있었다.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여전하다’는 의미로 뒤에 ‘산하재’(山河在) 계열 작품을 그리기도 했다.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 ‘국파산하재’ 구절에서 따온 개념이다. 1956년 이화여중 강당을 빌려 열었던 전시회 때는 <가로수>를 그렸다. 북한산을 여성적으로 보고, 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있는 피에타 형식을 염두에 두고 그린 작품이다. 내 그림 속에 피에타 형식이 많다. 이 그림은 미협 양분 시절 휘문고 전시에 출품했다.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전에도 초대받아 출품했다.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 주최 회고전 때, 미국에 있던 이 그림의 소재지가 확인되고 출품 섭외가 되어 과천 전시장의 개막 직전에 걸 수 있었다. ‘한국일보 대상’전에 출품했던 작품도 일종의 피에타 계통이었다.”

19세기 낭만주의 대표화가로 꼽히는 들라크루아가 1830년 7월 프랑스 혁명의 순간을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iberty Leading the People)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19세기 낭만주의 대표화가로 꼽히는 들라크루아가 1830년 7월 프랑스 혁명의 순간을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Liberty Leading the People)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1952년 군복 차림의 화가들이 문교부·보건부가 청사로 쓰던 옛 부산시청에 걸릴 ‘자유의여신’을 그리고 있다. 들라크루와의 그림을 본떠 태극기와 소총을 든 여전사가 인민군과 싸우는 모습이다.
1952년 군복 차림의 화가들이 문교부·보건부가 청사로 쓰던 옛 부산시청에 걸릴 ‘자유의여신’을 그리고 있다. 들라크루와의 그림을 본떠 태극기와 소총을 든 여전사가 인민군과 싸우는 모습이다.

1952년 6월 촬영한 부산 정부청사 입구 사진을 보면 이색적인 그림 한 점이 걸려 있다. ‘6·25 멸공통일의 날’이라고 쓴 간판 위에 프랑스 화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모방한 그림이 보인다. 다만, 중앙의 여신은 태극기를 들고 전진하는 모습이다. 아무리 전쟁중의 그림이라 해도, 그것도 정부 청사의 파사드를 장식하는 공식 작품인데 프랑스 명화를 흉내 낸 그림을 걸었다는 사실이 아쉬운 장면이다. 이 그림의 제작자에 대하여 이준은 김환기·남관·김병기라고 증언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남관은 그림 제작 당시 자신은 일본 체류중이었다고 반박했고, 김병기 역시 그 그림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창의성 있게 그린 것도 아니고, 서양 명화를 사실적으로 모방한 그림에 어찌 내가 참여할 수 있었겠는가. <자유의 여신>과 나하고는 무관하다.” 그렇다면 이준의 증언은 앞으로 더 검증이 필요하다. 피난지에서 화가들은 무슨 그림을 그렸을까. 인천항에서 부산으로 오는 피난선에서 김병기와 갑판에서 만나기도 했던 장욱진의 증언을 보자.

장욱진의 <나룻배> 1951년작.
장욱진의 <나룻배> 1951년작.

“소주 한 되를 옆구리에 차고 부산의 용두산을 오르내리는 것이 일과였고, 폐차장의 차 안에서 잠자기 일쑤였다. 종군화가단에 들어가 중동부 전선에 있던 8사단으로 가서 보름 동안 그림을 그렸다. 종군 중에 제작한 오십 점쯤이 부산에서 열린 종군화가단의 전시회에 전시됐다. 9월에 고향으로 갔다. 고향에서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아 그림을 그렸다. (…) 캔버스를 구하지 못해 피난길에도 늘 품에 안고 있었던 <소녀>(1939년)의 뒤쪽에 <나룻배>를 그렸다.”(<장욱진 화집 1963-1987>, 1987년)

장욱진의 <자화상> 1951년작.
장욱진의 <자화상> 1951년작.
장욱진의 <나룻배>(1951년)는 배경을 생략하고 기다란 나룻배 하나를 화면 가득 묘사한 작품이다. 황소, 젊은이들, 머리 위에 물건을 이고 있는 부인, 자전거를 안고 있는 소년, 그리고 뱃사공, 이들 모두가 관객을 향해 서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일렬횡대로 서 있는 사람들, 현실성 없는 나룻배 풍경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화사하고 부드러운 필치의 묘사여서 피난길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자화상>을 보면, 도저히 전쟁기의 작품이라고 믿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보리밭을 배경으로 한 연미복 차림의 신사는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환기의 <피난열차> 1951년작.
김환기의 <피난열차> 1951년작.
김환기의 <피난열차>(1951년)는 배경을 생략하고, 푸른 하늘과 붉은 땅으로 화면을 양분하고, 다섯 칸의 열차를 측면에서 그린 작품이다. 화물열차는 피난민으로 가득 차 있다. 다만 이들 인물은 붉은색 원형으로 얼굴을 표현해 마치 수박덩어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피난에 얽힌 고통을 전달하기보다 낭만열차 같은 부드러움을 보여 현실성 담보의 작품과 거리를 느끼게 한다. 역시 김환기의 <판자집>(1951년)도 화사한 색채와 온화한 분위기를 보였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종군화가. 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에서 작가는 현실을 어떻게 작품에 담아야 옳은 것일까. 종군화가단 미술전에 나온 상당 부분의 작품들에 대하여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 대개 전쟁기록화는 ‘우리 편 이겨라’ 하는 예찬이기 십상이다. 전쟁 자체를 거부하는 반전 운동으로서의 시각은 보기 어렵다. 이는 이른바 대동아전쟁 때 일본의 전쟁기록화를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6·25전쟁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은 반전(反戰) 의식은커녕 현실 직시의 시각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한 한계를 보여주었다. 관념의 남발이거나 현실 외면의 유희적 작품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김병기는 말한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무슨 그림을 그리느냐 하는 정신성이 중요하다. 사실 종군화가라는 것이 무엇인가. 종군화가라는 명칭부터 비예술적이다. 예술과 전쟁은 상극의 개념이다.”

녹취·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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