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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대동강철교 이읍시다…내 제안에 선우휘가 나섰다”

등록 2017-08-10 03:52수정 2018-01-08 09:42

[짬] (29회) 평양 탈환과 대동강 후퇴작전
1950년 ‘9·28 서울수복’ 이후 김병기는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에 돌아가 북한문총 등 예술단체를 복원하던 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철수해야 했다. 그해 12월3일 김병기는 선우회·이용상과 함께 유엔군이 폭파시킨 대동강철교의 복구작업을 감행해 수만명의 피난민을 안전하게 도강시켰다. 미군 종군기자 막스 데스퍼가 찍어 1951년 퓰리처상을 받으며 ‘한국전쟁 상징 장면’으로 기록된 대동강철교 피난행렬 사진은 이날 복구 이전 상황으로 보인다고 김병기는 기억했다.
1950년 ‘9·28 서울수복’ 이후 김병기는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평양에 돌아가 북한문총 등 예술단체를 복원하던 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철수해야 했다. 그해 12월3일 김병기는 선우회·이용상과 함께 유엔군이 폭파시킨 대동강철교의 복구작업을 감행해 수만명의 피난민을 안전하게 도강시켰다. 미군 종군기자 막스 데스퍼가 찍어 1951년 퓰리처상을 받으며 ‘한국전쟁 상징 장면’으로 기록된 대동강철교 피난행렬 사진은 이날 복구 이전 상황으로 보인다고 김병기는 기억했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이후 어떻게 지냈는가.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고, 9월28일 서울을 탈환했다. 서울 수복 뒤 나는 북진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따라 평양으로 가기로 했다. 그때만 해도 평양은 ‘적지’여서 민간인들은 갈 엄두를 못냈다. 하지만 난 ‘고향’이어서 그런지 두렵지 않았다. 나는 문총(문화단체총연합회), 정부의 국방부와 공보처 발급의 세 가지 신분증을 갖고 있었다. 마침내 10월19일 국군은 평양을 점령했다. 고향에 도착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중성리의 종가에 가니 큰어머니가 집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살던 수옥리 집은 47년 월남 이전에 팔았던 까닭에 할아버지 거처이기도 했던 생가에 살면서 ‘평양 예술 재건사업’을 위해 활동했다.

1950년 10월19일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한 데 이어 29일 대통령 이승만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옛 평양시청에서 ‘평양 입성 환영 시민대회’가 열려 수만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축하하고 있다. 김병기는 이날 참가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사진.
1950년 10월19일 국군과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한 데 이어 29일 대통령 이승만 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옛 평양시청에서 ‘평양 입성 환영 시민대회’가 열려 수만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축하하고 있다. 김병기는 이날 참가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사진.

우선 평양 예술단체 복원을 주도했다. 북한 문총을 조직해 산하에 문학·미술·음악·연극·영화 등 5개 분야를 꾸렸다. 평양 예술가들은 대부분 아는 사이여서 그런지 어렵지 않았다. 문총 선거를 통해 오영진이 위원장으로, 내가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사실 민주국가에서는 문총 같은 예술인 단체를 만들 필요가 없다. 거창한 이름의 단체일수록 대개 아마추어 중심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북한의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문예총)이 결성되어 맹렬히 활동했기에, 이들과 대응하기 위한 조직을 남한에도 두어야 했다. 북한 정권은 예술 자체보다 나라 만들기의 싱크탱크 같은 역할로 예술단체를 활용했다. 아무튼 나는 평양의 예술가들을 위해 서울의 문총 같은 단체를 자의적으로 조직했다. 미술동맹을 다시 만들었고, 그들에게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보호장치로 신분증도 발급했다. 윤중식, 황염수 같은 화가와 응용미술을 전공한 한영교 등 수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좌익 성향 미술가들은 이미 피신했기 때문이다.

1950년 10~11월 평양 탈환 기간 동안 김병기 주도로 조직된 북한문화예술총연합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됐던 극작가 오영진. 사진은 1960년 부산영화상 각본상을 받은 영화 ‘하늘은 나의 지붕’ 스틸사진을 배경으로 찍은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1950년 10~11월 평양 탈환 기간 동안 김병기 주도로 조직된 북한문화예술총연합회의 위원장으로 선출됐던 극작가 오영진. 사진은 1960년 부산영화상 각본상을 받은 영화 ‘하늘은 나의 지붕’ 스틸사진을 배경으로 찍은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달 남짓에 불과했지만, 나는 통일조국을 꿈꾸고 국제문화회관 건립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카메라 가게를 접수해 건물 수리에 들어갔다. 마침 서울에서 떠날 때 아내가 건네준 비상금으로 회관 설립을 추진할 수 있었다. 사실 비상금은 서울에서 납북된 장인 김동원의 행방을 찾으라고 마련해준 돈이었다. 그때 시인 조지훈도 피납된 부친(조헌영)을 찾고자 평양에 왔다. 우리는 밤마다 문학과 예술을 화제로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어느 날 백선행기념관에 있던 국군 정보국에 가니, ‘선생님 다시 남으로 내려가셔야 하겠습니다. 중공군이 꽹과리 두드리며 내려오고 있답니다’라는 얘기를 했다. ‘중공군이 어떻게 나서는 거야’ 나의 첫 반응이었다. 사실 중국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에 기여하지 않았기에 참전할 명분도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중공군의 참전. 고향 평양에서의 새로운 예술활동을 위한 꿈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중공군의 남진 속도가 빠르니 조속히 남하하라는 국군의 명령을 받았다. 서울로 가려면 대동강을 건너야 했다. 그런데 대동강철교는 미군의 폭파로 이미 끊어졌다. 그나마 나룻배도 모두 파괴되었다. 대동강을 건너는 유일한 통로는 수십척의 배를 연결해놓은 부교뿐이었다. 나는 정훈국의 트럭 4대에 문화예술인과 가족들을 태워 우선 남으로 보냈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은 1950년 한국전쟁 때 종군문인단으로 참전해 10~11월 서울에서 납북된 부친 조헌영을 찾으러 김병기와 함께 평양에 머물렀다. 사진은 휴전 이후 고려대 교수 시절 모습. 영양 지훈문학관 제공.
‘청록파 시인’ 조지훈은 1950년 한국전쟁 때 종군문인단으로 참전해 10~11월 서울에서 납북된 부친 조헌영을 찾으러 김병기와 함께 평양에 머물렀다. 사진은 휴전 이후 고려대 교수 시절 모습. 영양 지훈문학관 제공.

조지훈의 부친 조헌영은 당대 대표적인 한의학자이자 제헌의원으로 한국전쟁 때 남북된 뒤 행방불명이었지만 1985년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서기국장으로 발표하면서 생존 사실이 확인됐다. 그는 최근 영화 <박열>의 포스터에 등장하듯 박열 열사와 일본인 부인 가네코가 재판 때 입었던 한복을 제공한 동지로도 알려졌다. 사진은 1936년 펴낸 저서 <통속한의학원론>의 속표지에 실린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조지훈의 부친 조헌영은 당대 대표적인 한의학자이자 제헌의원으로 한국전쟁 때 남북된 뒤 행방불명이었지만 1985년 북한에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서기국장으로 발표하면서 생존 사실이 확인됐다. 그는 최근 영화 <박열>의 포스터에 등장하듯 박열 열사와 일본인 부인 가네코가 재판 때 입었던 한복을 제공한 동지로도 알려졌다. 사진은 1936년 펴낸 저서 <통속한의학원론>의 속표지에 실린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50년 10월19일 국군따라 평양에
‘북한문화예술총연합회’ 결성 주도
오용진 위원장에 김병기 부위원장
비상금 털어 국제문화회관도 추진

“중공군이 꽹과리 치며 내려옵니다”
유엔군 후퇴하며 대동강 다리 ‘폭파’
12월3일 부교마저 민간인 가로막아
유엔병사 “노 모어 코뮤니스트” 위협

무너진 철교 건너려다 줄줄이 ‘추락’
“절박한 순간엔 예술인이 더 용감”
작가 선우휘·화가 김병기·시인 이용상
군복차림 3명 ‘대동강 도강작전’ 지휘

목재 나르고 전선 엮어 온종일 복구
미술인가족 수백명과 앞장서 남으로
“밤새 평양시민 수만명 건너와 뿌듯”

8일 만에 서울 도착…가족들과 피난길
인천항 군함 타고 제주 거쳐 부산으로

-평양에서 어떻게 서울로 돌아왔는가.

“12월2일 나는 중성리 생가에서 평양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하지만 잠을 잘 수 없었다. 비행장과 탄약고가 있던, 강 건너 선교리 쪽에서 밤새 폭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유엔군과 중공군의 교전이 벌어진 줄 알았다. 아침에 알고 보니 시가전은 아니었다. 미군이 퇴각작전으로, 숨겨두었던 포탄 더미를 폭발시키는 소리였다.

국가기록원은 2013년부터 미국 국립기록관리청에서 6·25전쟁 관련 사진 7천 여장을 수집·정리 중이고, 그 중 일부를 국가기록원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1950년 12월 3일 대동강 철교를 오르는 피난민들. 2015.6.24 << 국가기록원 제공
국가기록원은 2013년부터 미국 국립기록관리청에서 6·25전쟁 관련 사진 7천 여장을 수집·정리 중이고, 그 중 일부를 국가기록원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1950년 12월 3일 대동강 철교를 오르는 피난민들. 2015.6.24 << 국가기록원 제공

12월3일 아침, 나는 마지막 트럭을 타러 육로문 쪽 대동강변으로 나갔다. 황염수는 커다란 이부자리까지 등에 지고 나왔다. 다만, 정훈국에 체포돼 있다고 들었던 김만형을 구출하지 못한 것이 가슴 아팠다. 피난 보따리를 짊어진 평양시민들은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그러나 하나뿐인 부교마저도 더 이상 건널 수 없었다. 유엔군의 스코틀랜드 병사가 총을 쏘면서, ‘노 모어 코뮤니스트!’(공산주의자는 필요 없다)라고 소리치면서 부교를 막고 있었다. 난감했다. 나는 정훈장교인 선우휘에게 ‘우리를 공산주의자로 보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가?’ 하소연했다. 다른 방법을 찾고 있으려니, 끊어진 대동강철교를 아슬아슬 타고 넘어가는 피난민들이 보였다. 그러다 힘에 부쳐 강으로 떨어지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필사의 탈출이었다. 게다가 12월초라 날씨는 매섭고 강물엔 살얼음이 떠다녔다.”

작가이자 보수 논객으로 명성을 남긴 고 선우휘는 한국전쟁 때 국방부 정훈장교로 참전해 1950년 12월3일 대동강 도강작전을 지휘했다. 사진은 1953년 육군 대령 시절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작가이자 보수 논객으로 명성을 남긴 고 선우휘는 한국전쟁 때 국방부 정훈장교로 참전해 1950년 12월3일 대동강 도강작전을 지휘했다. 사진은 1953년 육군 대령 시절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김병기·선우회와 함께 대동강철교 도강작전에 나섰던 시인 이용상(왼쪽)은 한국전쟁때 9사단 정훈부장 시절 참모장 박정희(오른쪽)와 인연을 맺어 5·16쿠데타 이후 공보국장 등으로 공직에 몸담았다. 하지만 그는 인사동 ‘술고래 풍류객’으로 더 유명했다. 사진은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함께 한 모습. 저서 <용금옥시대> 중에서.
김병기·선우회와 함께 대동강철교 도강작전에 나섰던 시인 이용상(왼쪽)은 한국전쟁때 9사단 정훈부장 시절 참모장 박정희(오른쪽)와 인연을 맺어 5·16쿠데타 이후 공보국장 등으로 공직에 몸담았다. 하지만 그는 인사동 ‘술고래 풍류객’으로 더 유명했다. 사진은 1961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함께 한 모습. 저서 <용금옥시대> 중에서.

시인 이용상은 <서울신문> 재직시절인 1993년 인사동 추어탕집 용금옥의 단골로서 일화와 비사를 엮은 <용금옥시대>를 냈다.
시인 이용상은 <서울신문> 재직시절인 1993년 인사동 추어탕집 용금옥의 단골로서 일화와 비사를 엮은 <용금옥시대>를 냈다.

-대동강철교를 어떻게 넘을 수 있었는가.

“나처럼 남한에서 올라왔던 경찰이나 군인들은 이미 철수한 뒤였다. 군복 입은 사람은 딱 3명, 선우휘, 이용상 그리고 나뿐이었다. 미술동맹 가족 등 수백명이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강변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데 중공군이 모란봉 서북쪽 기림리까지 넘어오고 있다고 했다. 긴박한 상황이었다. 12월3일 오전 10시께, 나는 선우휘에게 ‘우리가 다리를 고치자’고 제안했다. 마침 대동강철교의 아치 한 구간이 끊긴 채 강물 속에 잠겨 있었다. 소설가 선우휘는 정훈장교였고, 이용상은 시인이었고, 나는 화가였다. 그런 절박한 진공상태에서는 예술가들이 오히려 용감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나는 ‘노 모어 코뮤니스트’ 구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리는 대동강철교 도강작전을 시작했다. 12시 무렵, 다리 옆으로 피난민을 모이게 했다. 제복을 입고 있는 평북 경찰대 10여명이 질서유지를 하는 가운데 피스톨(권총)을 옆구리에 찬 선우휘가 연설을 했다. 영웅적인 순간이었다. 나는 뒤에 서 있는 참모 역이었다. ‘여러분, 지금부터 우리가 대동강다리를 고칩시다. 우리가 살길은 다리를 고치는 것뿐입니다. 이제부터 재목을 모아 끊어진 다리를 이읍시다’ 철교를 고치자는 제안에 피난민들이 ‘와’ 찬성했다. 피난민들은 해가 떨어질 때까지 힘을 모았다. 다리의 끊어진 부분이 나무뭉치로 두둑해졌다. 우리는 전선을 끊어 사다리를 이었다. 계단식 유(U)자형 길이 만들어졌다. 장쾌한 순간이었다. 다리 잇기를 주도한 공로로 예술인 가족을 제일 먼저 넘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나와 예술인 가족이 앞장섰다. 그렇게 밤새도록 피난 행렬이 다리를 넘었다. 수만명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흥남 철수와 비교될 만한 민족의 대이동 작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작전에 동참했다는 사실이 내내 뿌듯했다. 그날 낮 끊어진 대동강철교의 난간을 붙들고 넘어가는 피난민 행렬을 찍은 <에이피>(AP) 종군기자 맥스 데스포의 사진은 1951년 퓰리처상을 받으며 한국전쟁의 상징적 이미지로 각인되었다. 휴전 이후 언젠가 서울에서 선우휘에게 ‘대동강 도강작전을 역사적 사건으로 조명하면 어떻겠는가’라고 의견을 물은 적이 있다. <조선일보>의 중역이던 선우휘는 ‘우리끼리만 알고 넘어가자’고 대인배 같은 반응을 보였다.”

-서울에는 어떻게 도착할 수 있었는가.

“서울 가는 피난민 행렬에서 내 옆에는 늘 이호련이 있었다. 그는 평양에서 나를 비롯해 문학수, 이중섭, 황염수, 윤중식 등 도쿄 유학생 출신 6인전에도 함께한 화가였다. 그는 훗날 서울에서 행방불명되었다. 이호련이 말했다. ‘병기야, 사람들이 우리를 많이 따르고 있는데 서울까지 책임질 수 없지 않겠어?’ 그러면서 나더러 연설을 하라고 했다. 나는 피난민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여러분, 내 책임은 다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분산하여 개별적으로 서울로 갑시다.’ 집단보다 개별행동이 유리했지만, 5년간 공산 치하를 경험해서 그런지, 그래도 100명가량이 나를 따랐다. 그날 밤 우리는 중화라는 곳에 도착했으나 폭격으로 마을은 다 없어졌다. 노숙하다시피 묵은 뒤 이튿날 사리원으로 향했다. 물론 사리원 역시 집은 다 무너져 있었다. 그나마 골조가 남아 있는 기와집을 찾아 들어가니 김장독이 가득 차 있어 허기를 채울 수 있었다.

사리원에서 대열을 다시 꾸리니 예술인 중심으로 30명가량이 남았다. 내 옆에는 이호련과 단층파의 김화청도 있었고, 피난길 도중에 <가고파>의 작곡가 김동진도 만났다. 사리원을 지나는데 숨어 있던 공산당들이 ‘남조선으로 도망가는 놈들이 있다’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인솔자여서 죽을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멀리서 바라만 볼 뿐 습격하지는 않았다. 제법 큰 도시인 사리원은 해주와 중앙선이 갈라지는 교통의 요지였다. 일행 사이에 해주 쪽으로 가자는 주장도 나왔다. 해주는 평화롭겠지만 중앙선은 최전방이었다. 그럴 때 인솔자의 판단이 중요했다. 해주로 가면 안전할 것 같지만, 오히려 안전한 곳을 피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중앙선 쪽을 주장했다. 사실 우리가 해주로 갔으면 다 죽었을 것이다. 중공군이 이미 해주를 점령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인생에는 항상 갈라지는 두 길이 있다.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선택하는 것, 이게 사람살이다. 어떤 길이 정당한 길인가. 나는 정당한 길을 찾는 게 최선임을 알았다.

개풍군의 토성 근처에 이르렀을 때 스코틀랜드 병사의 백파이프 연주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으로 가는데 갑자기 한 무리 군인들이 나타나 맨 앞에 선 나를 총대로 갈겼다. 동남아시아 군인 5명쯤이었는데 여자를 찾고 있었다. 우리 일행 중에 젊은 연극배우 여성 두 명이 있었다. 우리는 군인들이 총을 겨누는 바람에, 얼떨결에 ‘와~’ 하고 도망갔다. 그러다 돌아서니 ‘오빠야, 오빠야’ 비명 소리가 들렸다. 일행은 고성을 지르면서 군인들 쪽으로 달려들어 가까스로 여성들을 빼냈다. 하지만 그들은 충격으로 정신착란 상태에 빠진 듯 계속 헛소리를 했다. 38선 이남 지역인 토성에 도착했을 때도 여자를 찾아 헤매는 흑인병사들로 가득했다. 우리는 여관방 두 개를 얻어 각각 여성을 숨겼다. 이튿날 서울로 다시 길을 재촉하는데 미군 정보참모부(G2)가 나왔다. 그들은 우리 20여명을 일렬로 세워놓고 검문했다. 말 한마디만 잘못하면 스파이로 몰려 즉결처형될 판이었다. 내가 평양에서 발급해준 문총 신분증 덕분에 전원 무사히 통과했다.

1950년 12월3일 대동강을 건넌 뒤 8일 만에 서울에 도착한 김병기는 성탄절날 다시 가족들과 피난길에 올라 인천항에서 일본 기선을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그때 김병기 가족을 기선에 옮겨 태워준 군함과 같은 랜딩십탱크에 12월12일 유엔군이 후송 장비를 싣고 있다. 미국 기록문서보관청 제공
1950년 12월3일 대동강을 건넌 뒤 8일 만에 서울에 도착한 김병기는 성탄절날 다시 가족들과 피난길에 올라 인천항에서 일본 기선을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그때 김병기 가족을 기선에 옮겨 태워준 군함과 같은 랜딩십탱크에 12월12일 유엔군이 후송 장비를 싣고 있다. 미국 기록문서보관청 제공
그렇게 평양을 출발한 지 여드레 만에 서울에 도착했다. 몇 명은 명동 근처에 있던 문총 사무실로 인계하고 난 후암동으로 갔다. 내 몰골은 남루한 거지와 다름없었다. 우리 집은 이미 폭파돼 사라지고 없었기 때문에 이웃 장인(김동원) 집으로 갔다. 물론 국회 부의장 집도 온전하지는 않았다. 아내는 내가 죽은 줄 알고 실의에 차 있다가 놀라서 맞이했다. 생환의 기쁨도 잠시, 곧바로 가족을 이끌고 남행 피난길에 다시 올라야 했다. 하지만 육로는 끊어져 대구나 부산으로 갈 수 없었다. 가까스로 인천에 도착하니 마침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우리 가족은 운 좋게 유엔군의 상륙작전용 함정(LST·랜딩십탱크)에 올라탈 수 있었다. 군함을 타고 먼바다로 나가니 일본 국적의 기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 오르자 일본인이 안내했다. 나는 해방 이후 5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인을 봤다. 일본은 비공식적으로 6·25에 참전했다. 그들은 우리 피난민들을 배 밑바닥으로 몰아넣고 재웠다. 나는 갑갑해서 갑판 위로 올라갔다. 거기서 우연히 장욱진을 만났다. 참, 묘한 인연이었다.

김병기와 가족들은 일본 기선을 타고 제주를 지나 1951년 1월1일 부산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사진은 50년 12월27일 부산항에 내리는 피난민들 모습. 미국 기록문서보관청 제공
김병기와 가족들은 일본 기선을 타고 제주를 지나 1951년 1월1일 부산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사진은 50년 12월27일 부산항에 내리는 피난민들 모습. 미국 기록문서보관청 제공

배가 제주도에 도착하니 모두 내리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가야 했다. 그때 제주에 내렸으면 이중섭처럼 피난 생활을 해야 했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국방부와 공보처 신분증에 군복 차림이었다. 그래서 내리지 않고 부산까지 갈 수 있었다. 그날이 1951년 정월 초하루였다.”

녹취·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미술평론가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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