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26회) 첫사랑 오후나의 추억
-일본 유학 시절 로맨스도 한번쯤 있지 않았는가.
“나카노 벌판에 다섯 채의 아틀리에가 있었다. 신주쿠 부근 내가 살던 히가시나카노에서 좀 더 나가면 나카노의 벌판이 나왔다. 건축업자가 화실 다섯 채를 똑같이 지어 임대했다. 거기에 중국 대련(다롄)에서 온 하나타니 가이코가 처음으로 들어갔다. 그는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반이었다. 이들에 이어 세이노 가쓰미, 그리고 뒤에 김환기가 입주했다. 나카노의 화가촌. 이들은 대개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SPA)의 멤버였다. 내 집과 가깝기도 했지만, 나카노 화가촌은 늘 관심권의 하나였다.
우리 미술학도들은 어두워지면 신주쿠에서 만났다. 나는 보드카를 좋아하는 척해서, ‘보드카 킴’이라고도 불렸다. 어느날 술 한잔 마시고 하나타니의 아틀리에에 모였다. 우리는 술래잡기 같은 놀이를 했다. 십여 명이 모여 손을 잡고 빙빙 돌 때, 술래가 ‘스톱!’ 하면 어느 선에 멈췄는지를 맞히는 거였다. 멈춰 서서 옆을 보니 갈람한(평양말로 호리호리하다는 뜻) 여자가 서 있었다. 그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의 손목을 힘주어 꽉 쥐고 있었다. 평양에서는 여자들에게 말도 붙이지 못했는데 도쿄에 가니 용기가 생겼다. 손목을 잡힌 여학생이 바로 오후나(Ofuna), 내 첫사랑이었다. 하나타니와 같은 학교 친구였다. 본명 후나코시 미에코(船越三枝子), 성 앞에 ‘오’를 붙이는 여성 애칭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그의 성씨를 나는 ‘배 타고 넘어왔다’는 의미로 해석해 ‘도래인’(渡來人·조선인)의 후예로 생각했다. 더군다나 규슈의 후쿠오카 출신이지 않은가. 그래서 더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프리지어 꽃을 좋아했고, 등산을 좋아했고, 나와 스무살 동갑이었다.
나카노 화가촌에 모여 놀던 스무살 청춘
술래놀이하다 손목잡은 ‘갈람한’ 여학생
동갑내기 미술학도 후나코시 미에코였다 튀격태격 시작된 사랑은 날로 깊어갔지만
“식민조국·대가족 유교가풍…결혼은 불가”
끝내 헤어진 고통에 휴학하고 평양집 칩거
“말없이 책만 읽으니 ‘돌았나보다’ 걱정들” 일년뒤 다시 만났을 때 울기만 했던 오후나
“어느날 수면제 먹고 영원히 잠들어버렸다” 길진섭 김환기와도 합동전시한 오후나
“추상화·콜라주 등 멋지고 훌륭한 작품”
훗날 김환기도 오후나 작품 간직해 ‘깜짝’
긴자 번화가의 바에 가면, 미술학교 여학생들이 남학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때 여학생들은 남들 앞에서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것을 졸업하기 위한 하나의 자격증으로 생각했다. 나는 아방가르드 미술을 좋아했지만 유교 집안의 보수성이 몸에 배어 있다.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오후나에게 ‘나는 여학생들이 이런 데서 술 마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라고 말했다. 오후나가 ‘네가 뭔데?’라고 말했다. ‘만약 내 여인이라면 나는 따귀를 때리고 싶어’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아, 그래? 때리고 싶으면 때려 봐’ 그랬다. 그래서 나는 오후나의 얼굴을 살짝 쓰다듬는 척했다. 그는 ‘악’ 소리와 함께 뛰쳐나갔다. 그게 사랑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랑은 깊어갔다. 하지만 나는 연애를 하면서 몸이 약해졌다. 그러다가는 학교 졸업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실수를 한 것이다. 번민은 두 배로 왔다. 상대 여성이 일본인이기 때문이었다. 나의 조국과 집안 정서로 보아 일본인을 아내로 삼을 수는 없었다. 대가족의 가풍은 일본 며느리를 받아들일 수 없게 했다. 훗날 일본 여학생과 결혼한 이중섭과 다른 환경이었다.
나는 고민 끝에 오후나 몰래 시바라는 곳으로 이사해 조용히 살았다. 어느 날 오후나가 수소문해서 나를 찾아왔다. 한 아름의 꽃다발과 하이힐을 들고 왔다. 내가 사 준 하이힐을 되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하이힐을 내 방의 제도판 위에 올려놓으니 묘한 풍경이 되었다. 로트레아몽 백작의 ‘말도로르의 노래’에 나오는 미싱과 양산이 해부대 위에서 만나는 묘한 풍경과 겹쳐졌다. 우리는 말없이 마냥 울기만 했다. 사실 우리는 헤어질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헤어져야 했다. 그런 심정을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다. 오후나를 택시에 태우기 위해 우리는 미국 대사관 옆길을 걸었다. 레이난자카의 심정화(서향·천리향) 나무 향기가 진하던 4월이었다. 오후나가 물었다. ‘킨보, 아직도 로망을 거부하니?’ 사실 나는 로망을 거부하는 척했을 뿐이었다. ‘나는 로망을 거부하지 않아. 로망을 사랑해’ 그렇게 우리는 헤어졌다.”
-첫사랑의 열병이 심했던 것 같다.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가.
“연인과 헤어지니 괴롭고, 또 건강도 좋지 않아, 학교를 휴학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본가에서 나는 벙어리처럼 말을 잃었다. 친척들이 와 나를 걱정했다. 심지어 ‘병기가 돌았나 보다’라는 말도 들렸다. 방 안에 있는 것을 다 치우고 반닫이 위에 <도스토옙스키 전집>, 그리고 귤 상자와 (비염 때문에) 휴지통을 놓았다. 톨스토이라는 높은 산을 올라가니 구름 속에 가려 있던 도스토옙스키가 보였다. 그때 톨스토이를 읽는 것은 지식인의 보편적인 취향이었다. 톨스토이를 의식했겠지만 이광수가 계몽적 소설을 쓴 것과 상통했다. 러시아 문학은 일상생활 속의 하나였다. 굳이 문학 공부를 하려고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를 선호했던 것은 아니었다. 문학 하면 러시아 문학이었고, 또 그것은 보편적 교양의 하나였다.
도스토옙스키에서 현대가 시작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집을 읽다 보니 베토벤의 교향곡과 연결되는 것 같은 느낌을 얻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과 체질적으로 비슷하게 보였다. 또 소설 <백치>는 베토벤의 6번 ‘전원’과 같아, 터치가 가볍고 경쾌하게 보였다. 나는 <백치>를 좋아했다. 소설 <악령>은 교향곡 7번과 같다. <악령>은 도스토옙스키다운 작품이고 7번 역시 장송곡풍으로 어려운 곡이다.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교향곡 9번 ‘합창’에 해당한다. 평양에서의 칩거생활은 나에게 도스토옙스키와 베토벤이라는 거대한 산맥을 안겨주었다. 복잡하던 내 심사는 그 발견 덕분에 안정감을 얻었다. 정말 신기했다. 도스토옙스키와 베토벤의 유사성 관계를 누가 본격적으로 연구해 주었으면 좋겠다. 로맹 롤랑이 말했듯, 베토벤은 최고의 높은 산이다. 여타의 작곡가와 다르다. 나의 지적 바탕에도 베토벤, 톨스토이, 도스토옙스키 같은 요소가 있다고 본다.”
-평양 칩거를 통해 또다른 세계를 얻은 것 같다. 뒤에 도쿄로 가 복학했는가.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어 다시 도쿄로 갔다. 1938년의 일이다. 새 기분으로 하숙집을 문화학원 가까운 곳에 두고 3학년 졸업반으로 복학했다. 하지만 일본 군국주의는 전쟁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 여파는 문화학원까지 밀려왔다. 그런 분위기에서 문학부에 들어와 시를 연구한다는 북해도(홋카이도) 출신 여학생이 화제였다. 그는 머리에 리본을 달고 일본의 전통복장인 하오리와 하카마를 입고 다녔다. 하오리와 하카마는 관서지방에서 멋으로 입는 것이지, 긴자에서 그런 옷차림의 젊은 여성은 볼 수 없었다. 그 사카이 미치코가 내 눈을 자극했다. 니시무라 이사쿠 교장도 그 여학생에게 관심이 있었다. 하루는 내가 그를 끌고 긴자에 나갔다. 모두들 우리를 쳐다보았다. 유학 시절 나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풍족한 편이었다. 일반 학생들이 월 50원 정도를 쓴다면 나는 200원쯤 썼다. 그래서 고급 양복과 구두로 멋을 부리고 다녔다. 자연스럽게 여학생들의 눈길을 끌었다.
사카이를 데리고 우에노공원에서 열린 자유미술전을 보러 갔다. 가보니, 길진섭의 애인 간노 유이코와 오후나도 와 있었다. 묘한 분위기에서 세 여자와 함께 우에노의 나가후지라는 제과점에 갔다. 오랜만에 만난 오후나는 수척해 보였다. 너무 가엾어 보였다. 그를 등지고 휴학했던 미안함도 들었다. 오후나가 물었다. ‘너는 약혼자를 데리고 왔는가?’ 사카이 미치코와 함께 전시장에 간 게 불찰이라면 불찰이었다. 그건 아니었다. 사랑이 재현되는 줄 알고, 나는 일본 여성들이 가장 좋아하던 최고급 꽃집에서 5원어치(지금돈 20만원쯤)의 카네이션 한바구니를 사서 보냈다. 오후나에게 편지가 왔다. ‘꽃다발이 왔습니다. 제일 좋은 위치에 놓았습니다. 일요일이면 방문이 허락되니 오세요.’ 그래서 갔다. 하루 종일 얘기를 나눈 뒤 우리는 길 중간에서 헤어졌다. 그런데 오후나가 울기만 했다. 나는 그가 왜 그렇게 우는지 몰랐다. 나는 바보였다. 오후나가 진정 사랑한 것은 바로 나였던 것이다.
그 뒤 어느 날 오후나의 자살 소식이 들려왔다. 오후나의 사연은 간노 유이코에게 자세히 들었고, 병원에도 함께 갔다. 그는 나와 헤어진 사이 연구소의 야마모토와 가깝게 지냈다고 했다. 그 결과로 아이를 갖게 됐고, 또 임신중절 수술을 해 몸이 약해져 있었다. 그럴 때, 나와 재회한 것이다. 그는 애를 지웠다는 죄책감이 컸던 모양이었다. 결혼할 것처럼 하다가 도망간 나에 대한 반항심도 있었을 것이다. 죄책감과 반항심이란 콤플렉스가 수면제를 먹게 했고, 결국 영원히 잠들었다. 나의 마음은 상처, 그 자체였다. 그해 연말 에스피에이에서 송년파티로 가장무도회를 열었을 때, 나는 흑인이 되어 얼굴을 까맣게 칠했다. 까만 얼굴, 그게 나의 스산한 심정이었다. 동료들 사이에서 처량한 내 기분을 그렇게 표현했다. 오후나 때문이었다.”
-미술가로서 오후나의 작품은 어떠했는가.
“오후나는 왜 자살했는가. 나는 고통 속에서 도쿄생활을 이어갔다. 모든 게 내 잘못 같았다. 그러면서 그림을 그려야 했다. 졸업을 위한 작품이었다. 일년 전 오후나의 졸업 작품도 생각났다. 오후나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다방에서 졸업 개인전을 열었다. 꽃을 많이 그렸다. 80호 크기의 작품 열댓 점을 출품했다. 그럴 때, ‘꽃을 잘 그렸다’고 표현하면 낙제였다. ‘꽃이 왜 이래? 마치 도깨비 같구만’ 했다. 반어법이 그 시절 유행이었다. 하지만 오후나는 훌륭한 화가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나는 1937년 11월 긴자의 일본살롱에서 흑색전·신현실전·백만전의 합동전시 때 참가한 기록이 있다. 긴 세월이 흐른 뒤, 합동전시 때 찍은 단체 기념사진을 봤는데, 오후나의 모습도 있었다. 그때 오후나는 ‘NOV 10’과 ‘콜라주’라는 작품을 출품했다. 앞의 작품은 ‘11월’의 이미지를 표현한 추상화였다. 속도감 있는 곡선을 활용한 안정감 있는 구성의 작품이었다. 뒤의 작품은 콜라주 기법으로 인체를 표현한 것으로 역시 자유스런 분위기를 보였다.
오후나와의 마지막 날이 생각난다. 그의 집에 초대받아 간 날이었다. 그는 침대에 앉고 나는 의자에 앉았다. 우리는 그림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었는데, 바닷가에 조개껍질이 있는 풍경이었다. 그는 바다를 꿈꾸고 있었다. 아주 멋있는 작품이었다. 사실 오후나의 그림을 보고 나는 놀랐다. 훌륭한 여성화가를 잃은 것, 정말 아쉬운 부분이다. 오후나는 내 도쿄 유학 시절의 진한 추억을 남긴 여성이었다. 평생 내가 사랑했던 두 명의 여인, 즉 내 부인과 함께 한 추억 속의 여성이었다.
흥미로운 일화가 문득 생각난다. 6·25전쟁 때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였다. 그때 인민군 미술부문의 책임자는 평양에서 내려온 문학수였다. 아무리 전쟁중이고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있다 해도 우정은 우정이었다. 그런 와중에 김환기·김향안 부부가 문학수와 나를 성북동 집으로 초대했다. 우리는 대접을 잘 받았다. 술기운이 돌며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김환기가 그림 한 점을 보여주었다. 바로 오후나의 작품이었다. 나는 너무 놀랐다. 김환기가 오후나의 작품을 간직하고 있다니! 아무튼 종교 이야기와 연애 이야기는 하면 할수록 부풀려진다. 과장이나 가식이 덧붙여지기도 한다.”
녹취·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김병기는 도쿄 유학 시절인 스무살 때 동갑내기 일본 여성 미술학도 ‘오후나’(후나코시 미에코)를 사랑했지만 식민지 조국과 유교 가풍의 벽을 넘을 수 없어 헤어졌다. 그 뒤 첫사랑 오후나는 동료 화가(야마모토 게이스케)와의 관계에서도 상처를 입고 자살로 짧은 생을 마쳤다. 1937년 11월 도쿄 긴자의 일본살롱에서 열린 흑색·신현실·백만회 합동전시회 때 찍은 단체 기념사진이 오후나가 남긴 유일한 모습이다. 사진 뒷줄 왼쪽부터 후카자와 산세이, 아오키 요시야스, 야마모토 게이스케, 히로하타 겐, 야마모토 나오타케, 하시모토 다쿠마. 앞줄 왼쪽부터 쓰루미 다케나가, 후나코시 미에코, 간노 유이코, 니노미야 에이치로. 미술잡지 <비노쿠니>(美之國)에 실렸다.
술래놀이하다 손목잡은 ‘갈람한’ 여학생
동갑내기 미술학도 후나코시 미에코였다 튀격태격 시작된 사랑은 날로 깊어갔지만
“식민조국·대가족 유교가풍…결혼은 불가”
끝내 헤어진 고통에 휴학하고 평양집 칩거
“말없이 책만 읽으니 ‘돌았나보다’ 걱정들” 일년뒤 다시 만났을 때 울기만 했던 오후나
“어느날 수면제 먹고 영원히 잠들어버렸다” 길진섭 김환기와도 합동전시한 오후나
“추상화·콜라주 등 멋지고 훌륭한 작품”
훗날 김환기도 오후나 작품 간직해 ‘깜짝’
1937년 11월 흑색·신현실·백만회 합동전시 때 출품한 후나코시 미에코의 추상화 ‘노벰버 10’. 최근 일본 화단에서 1930년대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선구적 작품으로 새롭게 평가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20~30년대 초현실주의자들의 구호, 로트레아몽의 시집 <말도로르의 노래> 가운데 ‘해부대 위 우산과 재봉틀의 기이한 만남처럼 아름다운’ 문구를 재현한 프랑스 여성감독 아녜스 바르다의 설치 작품. 1960~7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의 대가로 꼽히는 바르다는 2015년 여성감독으로 첫 칸영화제 명예황금종려상을 받았다. 김병기가 기억하는 1937년 봄 오후나와의 이별 장면이기도 하다.
백작이었던 로트레아몽은 1868~69년 산문시집 <말도로르의 노래> Les Chants de Maldoror) 제5집까지 완간했으나 기괴하고 불온한 내용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1870년 24살로 요절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초현실주의와 다다이즘의 선구자로 추앙받았다.
1938년 김병기와 오후나가 만났던 도쿄 우에노의 나가후지 제과점. 1912년 개업해 2001년까지 남아 있던 명소로, 특히 문화학원 설립을 주도했던 요사노 아키코 등 예술가들이 좋아했다는 기록이 있다.
1937년 11월 흑색·신현실·백만회 합동전시 때 출품한 후나코시 미에코의 작품 ‘콜라주’ 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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