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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큐비즘·추상미술·다다·초현실주의…황홀한 혼란기였다”

등록 2017-07-05 23:38수정 2017-07-23 23:42

【길을 찾아서】 (25) 식민지 시절과 일본 미술유학생

1905년 피카소가 80번의 시도 끝에 완성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화가 담긴 북한의 우표. 2차대전 때 레지스탕스 활동을 거쳐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 피카소의 탄생 100년을 기념해 발행한 것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1905년 피카소가 80번의 시도 끝에 완성했다는 일화로 유명한 거트루드 스타인의 초상화가 담긴 북한의 우표. 2차대전 때 레지스탕스 활동을 거쳐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 피카소의 탄생 100년을 기념해 발행한 것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커리커쳐 박재동·제목 김병기 친필
?커리커쳐 박재동·제목 김병기 친필
20세기는 조선 왕조의 ‘서화시대’에서 새로운 ‘미술의 시대’로 옮겨가는 전환기였다. 미술이란 새 단어의 공급지는 일본이었다. 1910년대 고희동, 김관호, 김찬영, 나혜석 이래로 일본으로 떠나는 미술 유학생들의 수는 날로 늘어갔다. 유학생의 절정은 1930년대에 이르렀고, 더불어 다양한 미술사조가 꽃을 피웠다. 관립 도쿄미술학교의 보수적 아카데미즘을 비롯해 사립학교의 자유스럽고 다양한 화풍까지 혼재하는 양상을 보였다. 일제 치하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조선인 화가는 40여 명이었다. 하지만 사립 제국미술학교를 다닌 조선인 유학생은 1930년대부터 해방 시기까지 3배 이상 많은 150명가량을 헤아렸다. 하지만 김병기 화가처럼 전위적 미술활동에 뿌리를 내린 유학파는 극소수였다.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와 문화학원을 다니면서 새로운 미술운동에 뛰어들었는데, 그를 통해 일본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나의 일본 체험은 ‘추상 미술과 초현실주의 미술’로 요약할 수 있다. 사실 이들 관계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 이는 20세기 전반 세계미술의 새로운 바람이기도 했다. 이 바람을 중요하게 여겨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에 들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작업보다 새로운 예술운동의 이론에 깊이 들어갔다. 그래서 어린 나이에 미술이론가 노릇을 할 수 있었다.

20세기 초반의 새로운 미술운동은 황홀했다. 1903년 독일 표현파의 탄생으로부터 야수파, 큐비즘, 추상미술, 다다, 그리고 초현실주의에 이르기까지, 숨가쁘게 새로운 사조들이 나왔다. 그사이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고, 나치의 예술탄압에 의한 미술계 지형변화도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새로운 예술운동의 발원지가 대개 프랑스 북쪽지역이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북유럽의 이지적인 기운이 작동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1930년대의 도쿄는 그런 유럽의 새로운 예술사조를 한꺼번에 받아들인 혼재 상태였다. 추상과 초현실주의 미술의 동시 수용은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게다가 일본인은 비판도 없이 초현실주의를 받아들였다. 예컨대 살바도르 달리의 극사실 표현에 매력을 느꼈다. 하지만 달리는 초현실주의의 연장이라기보다 종말이라고 봐야 한다. 이는 마그리트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은 추상 미술이 버린 형상성을 들고나왔기 때문이다.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에 사막이 나오지만 일본에는 사실 사막이 없다. 지리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추종은 문제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발성(자동주의·automatism) 그리고 데페이즈망(d?paysement), 즉 ‘위치 전도’이다. 신발이 발 아래에 있으면 당연한 상식이지만, 머리 위에 있으면 가치 전도가 된다. 바로 초현실주의가 된다. 합리의 세계가 추상 미술이라면, 비합리의 세계는 초현실주의가 된다.

추상과 초현실주의는 상호 영향 아래 현대미술의 새로운 마당을 펼쳤다. 이제 세월도 흘렀기에 이러한 양식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노자(老子)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 했다. 길이 길이라면 길이 아니다. 형식화는 경계의 대상이다. 마르셀 뒤샹의 예를 보자. 작품 운반 도중에 사고가 났다. 유리 작품이 파편처럼 깨졌기 때문이다. 깨진 유리를 복구한 뒤 작가는 말했다. ‘이제 작품이 완성됐다.’ 우발적 균열을 작품의 완성으로 본 것이다. 인위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비록 사고였지만, 이루어졌다고 본 것이다. 마르셀 뒤샹이야말로 현대미술의 대부 같은 존재가 아닌가. 노자의 무위사상이 연상되는 일화이기도 하다.”

김병기를 비롯 1930년대 일본 유학파 예술인들은 40년 전후 귀국해 일제의 전쟁광기 속에서도 동인 활동을 통해 새로운 사조를 호흡하려 애썼다. 일제 말기 유일한 조선인 미술동인회였던 신미술가협회가 대표적이다. 1941년 3월 도쿄에서 창립전을 연 뒤 서울 귀국전을 할 무렵 한자리에 모인 신미술가협회 동인들. 사진 앞줄 왼쪽부터 이중섭·최재덕·김종찬, 뒷줄 왼쪽 둘째부터 윤자선·이쾌대·길진섭·배운성 등이다. 사진 윤범모 교수 제공
김병기를 비롯 1930년대 일본 유학파 예술인들은 40년 전후 귀국해 일제의 전쟁광기 속에서도 동인 활동을 통해 새로운 사조를 호흡하려 애썼다. 일제 말기 유일한 조선인 미술동인회였던 신미술가협회가 대표적이다. 1941년 3월 도쿄에서 창립전을 연 뒤 서울 귀국전을 할 무렵 한자리에 모인 신미술가협회 동인들. 사진 앞줄 왼쪽부터 이중섭·최재덕·김종찬, 뒷줄 왼쪽 둘째부터 윤자선·이쾌대·길진섭·배운성 등이다. 사진 윤범모 교수 제공

1910년대 이래 일본 미술유학 점증
보수적 관립보다 자유로운 사립 선호
김병기 선택한 아방가르드는 ‘극소수’
1930년대 추상·초현실 등 선구적 체험

새 미술사조 발원지는 프랑스·북유럽
일본 화단 무비판적 수용으로 혼란

피카소·마티스 후원 거트루드 스타인
‘형식주의’ 시로 일본 문단에도 큰 영향
이상 비롯 ‘삼사문학’ 동인들도 흉내
“전원다방에서 신백수 등과 어울렸다”

1941년 도쿄 유학파 신미술가협회전
일제말 암흑기 밝힌 순수 화가집단
창립전 출품작 목록 실린 잡지 ‘발굴’

1900년대 전반기 파리에서 피카소, 마티스, 헤밍웨이 등 예술인들의 후원자로 유명했던 유대계 미국 시인 거트루드 스타인은 일본 문단과 화단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피카소가 그린 초상화를 비롯 수많은 컬렉션으로 가득 찬 자신의 아파트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스타인. <한겨레> 자료사진.
1900년대 전반기 파리에서 피카소, 마티스, 헤밍웨이 등 예술인들의 후원자로 유명했던 유대계 미국 시인 거트루드 스타인은 일본 문단과 화단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피카소가 그린 초상화를 비롯 수많은 컬렉션으로 가득 찬 자신의 아파트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스타인. <한겨레> 자료사진.

-1930년대 일본 미술계에서 대표적인 미술운동 단체는?

“일본의 추상미술운동 단체로 자유미술가협회를 들 수 있다. 하세가와 사부로, 쓰다 세이슈, 무라이 마사나리 등이 중심 작가로 참여하여 1937년 창립했다. 기하학적 추상회화를 선호했다. 그런데 이 단체는 조선인으로 김환기, 문학수, 유영국, 이중섭 등을 받아들여 우대했다. 그만큼 협회의 넓은 포용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형식주의라고 번역될 포멀리즘은 어떠했는가?

“거트루드 스타인(1874~1946)이라는 미국의 유태인계 여성시인이 있다. 그는 일찍이 1900년 무렵 파리 유학을 거쳐 유럽에 정착해 엄청난 양의 작품을 수집한 컬렉터이기도 했다. 특히 마티스, 피카소, 헤밍웨이와 가까웠고 후원자였다. 피카소가 그린 그의 초상화가 유명했다. 1905년 피카소의 작업장 ‘세탁선’에서 무려 여든 번이나 모델로 선 끝에 나온 작품이라고 했다. 피카소가 끝내 얼굴을 지워버리고 스페인으로 사라졌다가 이듬해 되돌아와 단숨에 초상화를 완성했다는 일화가 있다. 거트루드 스타인의 시는 포멀리즘 계열에 속한다. 문학에서 형식주의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다. 포멀리즘의 반대어를 앵포르멜(informel)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정확한 번역어는 ‘비정형주의’이다. 이런 일화가 남아 있다. 하루는 거트루드 스타인이 피카소에게 질문했다. ‘3인의 악사를 그렸다지요?’ 이에 대한 피카소의 대답은 ‘아닌데요, 그것은 정물인데요’라고 했다. 사실 피카소는 3인의 악사를 그렸다. 그러면서도 그리지 않았다고 대답한 것은 일종의 풍자였다. 미술은 설화성이 아니라고 주장하려 했던 것 같다. 사실 초현실주의와 형식주의는 앞뒷집 관계처럼 이웃이다.

유산이 많았던 거트루드 스타인은 오랫동안 피카소와 교유하며 후원했다. 1931년 파리에서 피카소의 첫 부인 올가가 찍은 사진으로, 왼쪽부터 스타인, 피카소, 그의 첫아들 파울로, 두 사람 건너 스타인의 동성 파트너 앨리스 토클러스.
유산이 많았던 거트루드 스타인은 오랫동안 피카소와 교유하며 후원했다. 1931년 파리에서 피카소의 첫 부인 올가가 찍은 사진으로, 왼쪽부터 스타인, 피카소, 그의 첫아들 파울로, 두 사람 건너 스타인의 동성 파트너 앨리스 토클러스.
거트루드 스타인의 시 가운데 기억나는 대목이 있다. ‘장미는 장미이다, 장미는 장미이다…’(A rose is a rose is a rose…) 80번가량의 동어반복에다가 이 내용을 하나의 틀로 해서 구성적으로 배치했다. 시 작품을 액자처럼 도형화했다. 마치 몬드리안의 사각형 구성처럼 시 구절을 배치했다. 내용은 반란적이다. 다다와 포멀리즘은 비슷하다. 다다는 형식도 없고 파괴적이다. 오히려 형식을 갖춘 것은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이다. 초현실주의는 다다의 부정정신을 계승했다. 다다는 자기 자신마저 부정했기에 탄생하자마자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 거트루드 스타인의 형식주의 작품이 일본 문단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일본 형식주의의 중심인물은 니시와키 준자부로(西脇順三?)이다. 그리고 기타조노 가쓰에(北園克衛)와 잡지 <세르팡> 편집자인 하루야마 유키오(春山行夫), 다키구치 슈조는 초현실주의를 옹호한 미술평론가로도 중요한 인물이다. 하루야마는 거트루드 스타인을 흉내 내, ‘흰 소녀, 흰 소녀, 흰 소녀…’ 같은 동어반복의 작품을 썼다.

연희전문생 신백수를 비롯해 조풍연 이시우 정현웅 등이 1934년 결성해 이름이 붙은 ‘삼사문학’은 초현실주의와 다다의 형식주의 영향을 받았다. 35년 12월 도쿄에서 발행된 마지막 6호에 김병기 이상 주영섭 김환기 길진섭 등도 참여했다. 사진은 창간호 표지. <한겨레> 자료사진
연희전문생 신백수를 비롯해 조풍연 이시우 정현웅 등이 1934년 결성해 이름이 붙은 ‘삼사문학’은 초현실주의와 다다의 형식주의 영향을 받았다. 35년 12월 도쿄에서 발행된 마지막 6호에 김병기 이상 주영섭 김환기 길진섭 등도 참여했다. 사진은 창간호 표지. <한겨레> 자료사진
이런 흐름 속에서 이상 시인이 나왔다. 그의 ‘오감도’ 같은 새로운 형식의 시는 시대 환경과 잘 맞았다. 김기림도 영향을 받았으나 창의성은 이상이 더 좋았다. 서울의 ‘삼사문학’ 동인들도 형식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나도 방학이나 서울에 들를 때면 신백수 전현웅 등 삼사문학 동인들과 어울렸다. 그들은 항상 명동의 전원다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주머니가 두둑했던 이유도 있었다. 대부분 가난했지만 정신만은 풍요롭고 또 패기가 넘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 이시우는 창신동에, 신백수는 내자동에 살았다. 모두 연희전문 출신으로 수재였다. 이들의 어투는 비꼬는 화법을 좋아했다. ‘요새 절간에서 인물 하나가 나왔다지.’ 서정주의 <화사집>(1941)을 이르는 것인데, 대수롭지 않다는 듯 표현했다. 남의 말 하듯 지나가는 투로 흘리는 어투, 이게 그 시절 풍경이었다. 서정주의 시 가운데 ‘아프리카, 아메리카’라는 식의 ‘아’ 자 반복을 보고, 우리는 ‘장미, 장미, 장미’를 연상했다.”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면서 중일전쟁이 발발했고, 이는 이른바 대동아전쟁으로 확대되었다. 문화예술의 꽃이 만발하던 도쿄의 분위기도 전시체제로 바뀌었다. 일제 말 조선인 유학생들의 활동은 어땠나.

“전시체제는 사회 환경을 바꾸기 시작했다. 전쟁이 치열해질수록 암흑은 더욱 짙어져갔다. 하지만 그때 이미 도쿄의 예술가들은 일본이 이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예술의 반대어는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예술은 자유라는 음식을 먹고 자라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미술가협회 작가들이 추상 미술을 유지하려 한 것도 일본주의에 대한 일종의 반항이라 할 수 있다. 나는 1939년 귀국했기 때문에 그 뒤 도쿄 화단의 동향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미군 폭격기의 일본 공습 때문에 이후 해방 때까지 일본행이 막혔다. ‘B-29기’는 일제 말의 서울이나 평양 상공에서도 자주 선회했다.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는 은빛 비행기여서 더 눈길을 끌었다. 폭탄을 떨어뜨리지는 않았지만 전시체제를 실감하게 했다.

일제 말 대표 미술단체로 신미술가협회를 들 수 있다. 1941년 3월 도쿄에서 창립전을 연 데 이어 5월 서울 화신화랑에서 귀국전을 열었다. 신미술가협회에는 이쾌대, 이중섭, 문학수 같은 내 친구들이 참여했고 최재덕, 진환, 김학준, 김종찬 등도 들어 있었다. 이들은 도쿄 유학생으로 모두 사립미술학교 출신이다. 보수적인 아카데미즘보다 진취적 화풍을 선호했다. 이쾌대의 활약이 컸던 것으로 알고 있다. 군국주의 일제 치하에서 유일한 조선인 미술동인회로 역사에 남을 만하다.”

경남 진주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 월북한 최재덕의 1940년작 ‘농가’.
경남 진주 출신으로 한국전쟁 때 월북한 최재덕의 1940년작 ‘농가’.

신미술가협회 동인 가운데 이례적으로 친일에 앞장섰던 김종찬의 1941년작 ‘진중의 A 병단장’.
신미술가협회 동인 가운데 이례적으로 친일에 앞장섰던 김종찬의 1941년작 ‘진중의 A 병단장’.

일본미술학교 출신으로 신미술가협회에 참가한 고창 출신 진환의 1933년작 ‘자화상. 그는 1951년 1.4후퇴 때 피난하다 유탄에 맞아 38살로 요절했다.
일본미술학교 출신으로 신미술가협회에 참가한 고창 출신 진환의 1933년작 ‘자화상. 그는 1951년 1.4후퇴 때 피난하다 유탄에 맞아 38살로 요절했다.
-신미술가협회 회원으로 친구인 문학수, 이중섭, 이쾌대 이외 기억에 남는 화가는?

“최재덕이 기억난다. 그는 진주의 지주 집안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분단 상황에서 월북했다. 그러고 보니 신미술가협회 회원 가운데 이쾌대, 윤자선은 월북했고, 문학수는 원래 고향인 평양에 남았고, 진환은 전쟁 중에 요절했고, 김학준과 김종찬 등은 일본에 남아 활동했다. 최재덕의 일화가 생각난다. 일제 말 그는 형과 함께 고향 진주에서 일경의 검문을 받게 되었다. 그 시절 다리를 건너려면 경찰이 ‘황국신민의 서사(誓詞)’을 외우게 했다. 그런데 두 형제는 외우지 못했다. 그러자 경찰은 사람 노릇 못 한다며 막았다. 할 수 없이 둘은 개처럼 기어 다리를 건너야 했다. 군국주의 일제 말의 광기 어린 횡포가 아닐 수 없다. 화가로 하여금 긴 다리를 기어가게 하다니, 정말 암흑기였다. 김종찬이란 화가는 문화학원 출신이지만, 전혀 문화학원 출신답지 않았다. 그는 일본군 장교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이른바 ‘성전(聖戰) 미술’ 전시에 참여하기도 했다. 친일파의 전형으로 신미술가협회의 분위기와 완전히 달랐다. 일제 말기 평양의 우리 집에 김종찬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중국 골동품 한 무더기를 가져와 안전하게 보관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알 수 없는 수상한 물건을 맡기가 꺼려져 거절했다. 사실 김종찬은 신미술가협회의 명예를 먹칠한 인물이다. 뒤에 정신분열증(조현병)에 걸려 불행한 말로를 걸은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일본에서 발굴된 잡지 <비노쿠니>에 실린 신미술가협회의 1941년 도쿄 창립전 출품작 도판 가운데 이중섭의 ‘연못 있는 풍경’.
최근 일본에서 발굴된 잡지 <비노쿠니>에 실린 신미술가협회의 1941년 도쿄 창립전 출품작 도판 가운데 이중섭의 ‘연못 있는 풍경’.

잡지 <비노쿠니>에 실린 1941년 문학수의 신미술가협회 도쿄 창립전 출품작 ‘소’의 도판.
잡지 <비노쿠니>에 실린 1941년 문학수의 신미술가협회 도쿄 창립전 출품작 ‘소’의 도판.

신미술가협회는 1944년 제4회 전까지 열었다. 암흑기에 순수성을 지킨 화가 집단이었다. 해방 이후 박문원의 평가처럼 일제에 대한 소극적 저항운동이었다. 다만 전시 도록을 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출품작에 대한 자세한 내역은 알려지지 않았다. 단편적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어 안타까웠다. 그나마 이번 연재를 준비하면서 도쿄에서 새로운 자료를 입수했기에 여기 공개하고자 한다. 즉 1941년 도쿄에서 열린 조선신미술가협회 창립전의 출품작 목록이 잡지 <비노쿠니>(美之國)에 실려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김준(전망, 실내, 꽃, 춤), 이중섭(연못 있는 풍경, 아이들 있는 풍경, 소품), 최재덕(집, 뜰), 진환(소1, 소2), 이쾌대(인어, 여인도1, 풍경, 여인도2), 문학수(응사, 말, 풍경), 김종찬(꽃, 연화). 일본 미술잡지에 이런 목록과 함께, 문학수의 ‘말’과 이중섭의 ‘연못 있는 풍경’ 도판이 실려 있다. 공교롭게도 이들 작품은 말과 소라는 동물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사실적 묘사라기보다 서정적이고도 향토적인 분위기의 상징성을 지닌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구술녹취·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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