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22) 도쿄학생예술좌 연극운동과 주영섭
‘아틀리에는 시대 도피자의 동굴이 아니다.’ 신선한 주장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 같은데, 오늘 우리들에게 잔잔한 울림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술가의 작업장은 도피자의 동굴이 아니다. 1930년대 이런 주장을 한 주인공은 주영섭이다. 도쿄에서 새로운 연극운동을 펼친 한국 근대 연극사의 주역이다.
주영섭은 어떤 매체를 통해 이런 주장을 했을까. 바로 <로로르>(L’AURORE·1937년 2월 제2호)다. ‘에스피에이’(S.P.A, 스루가다이 팽튀르 아카데미), 즉 도쿄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서 세이노 가쓰미(淸野克己)와 더불어 김병기가 ‘김혁토’(金赫土)라는 별칭으로 발행한 학회지다. 김병기는 편집인으로 ‘후기’도 공동집필했다. 아방가르드연구소에서 연구부장으로 큰 활약을 했던 김병기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로로르>를 발행했다. 그러면서 평양 출신 선배인 주영섭에게 원고를 청탁했다. 그래서 받아낸 글이 바로 이 ‘기계와 꽃’이다. 근래 도쿄에서 입수한 발굴 자료 <로로르>에 실린 주영섭의 명문을 김병기의 육성 번역으로 전문 소개한다. 본문에서 르네 클레르는 프랑스의 아방가르드 영화감독을 말한다.
“르네 클레르의 <우리에게 자유를>(? NOUS LA LIBERT?, 1931)을 보고, 나는 기계와 꽃을 사랑하는 클레르의 감각을 좋아하게 되었다. 근대미의 특성으로서, 나는 기계미와 집단미를 채택하고 싶다. 근대의 기계공업에서 볼 수 있는 능률미와 기술미, 사회생활에서 볼 수 있는 집단미. 그것을 탐구하는 것은 새로운 미술인의 하나의 방향이 아닐까. 목장 대신 공장을, 사과 대신 타이프라이터를, 나체 대신 행렬을 그려도 좋다. 그러나 그것은 소박한 방법이다.
소재보다도 테크닉에, 스타일에, 테마에, 작가의 에스프리를 작동시켜야 한다. 새로운 테마를 살리기 위해 새로운 소재를 추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근대과학은 새로운 빛, 새로운 색채, 새로운 구성을 만들었다. 소재의 확대와 재료의 빈곤. 거기에 현대미술의 하나인 번민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탐구, 발명할 필요가 있고, 그것에의 기운(機運)을 나는 즐겁게 바라보고 있다.
근대의 미의식은 변해왔다. 장식적인 것에서 합목적적인 것으로, 비합리적인 것에서 합리적인 것으로 진행했다. 시대는 합리적인 것의 하나로 기계미와 집단미를 찾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들의 생활양식은 혼란하고, 시대는 어둡고, 현실은 추악하다. 추악한 것에서 새로운 것, 아름다운 것을 잡기는 어렵다. 모터의 부서진 기계 파편의 축적에서 미를 찾는 일은 곤란한 일이다.
그러나 미술인은 아틀리에로 도피할 수 없다. 현대미술인은 먼저 생활자이며 집단인이고, 기술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틀리에는 시대 도피자의 동굴이 아니다. 아틀리에는 미술인의 건강한 직장이다. 아틀리에의 커다란 창은 거리와 하늘로 이어져 있다.”
신선하다. 80년 전의 고문 같지 않다. 글의 내용이나 표현 형식이 전혀 낡지 않았다. 글 내용도 현재 진행형 같다. 그때 불과 25살의 주영섭은 ‘기계와 꽃’에서 무엇을 주장했는가. 근대의 미의식은 변했다. 기계미와 집단미, 또 새로운 소재와 주제에의 탐구. 그래서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생활자 의식이다. 아틀리에는 도피자의 동굴이 아니고, 미술인의 건강한 직장이 되어야 한다. 작업실을 건강한 직장으로 표현했다는 점, 무엇보다 건강하다. 그래서 아틀리에의 창은 거리와 하늘로 이어져야 한다. 도피를 위한 동굴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영섭의 ‘기계와 꽃’은 오늘날 읽어보아도 훌륭하다. 그래서 자꾸 음미하게 한다.
수재로 이름난 주공삼 목사 삼형제
맏이 주요한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
둘째 주요섭 ‘사랑 손님과 어머니’ 유명 막내 주영섭 근대 신극운동의 주역
1934년 도쿄학생예술좌 창단 주도
아방가르드연구소 학회지 ‘로로르’에
‘기계와 꽃’ 제목으로 명문장 기고
“아틀리에는 도피자의 동굴 아니다” 창단작 유치진 ‘소’ 무대 맡은 김병기
“초가 짓고 나무에 진짜 감도 달아”
부친 이찬영 ‘대노’…‘춘향전’ 이후 활동 중단 사회주의자 주영섭 일제말기 ‘친일’
“속죄 심정으로 홀로 북에 남은듯”
분단 이후 영화 ‘금강산 처녀’ 유일한 기록
-주영섭은 누구인가.
“평양 주공삼 목사의 자녀들 가운데 막내, 즉 주요한과 주요섭의 동생이다. 주 목사는 평양 연화동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하면서 비교적 부유하게 살았다. 경상골의 경치 좋은 동네에 그의 집이 있었는데, 여러 채의 한옥으로 아주 훌륭했다. 주 목사의 아들들은 키가 무척 컸다. 나는 주 목사의 부인을 잘 알았는데, 그의 키는 작았고 한쪽 다리를 절었다. 매우 인자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해마다 ‘어머니의 날’이 오면, 우리는 ‘어머니의 노래’를 불렀다. 눈물을 흘리면서 부른 노래였다. 이는 주요한이 쓴 작사로 일종의 찬송가였다. 주요한은 문학사에서 신체시 <불놀이>로 유명한 문인이다. 주요섭은 영화로도 인기 높았던 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작가이다.
막내 주영섭은 키가 워낙 커서 ‘다초’(타조)로 불렸다. 다리가 길면서 성큼성큼 다니는 타조를 연상케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주영섭은 나의 광성학교 4년 선배로, 리더십이 훌륭했다. 그는 너절한 잔소리 같은 것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었고, 흔치 않았던 수재형이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시절 막심 고리키의 <밤 주막>을 공연하면서 연극이란 세계로 깊이 진입했다. 일본 유학 생활도 호세이(法政)대학에 적만 걸어놓고 연극운동에 몰두했다. 그래서 조직한 연극단체가 도쿄학생예술좌이다.
그때 공연한 <춘향전>의 월매 역으로 그의 여동생이 출연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향단 역을 했던 여학생은 의대생으로 미모가 특출했다. 그 여학생이 나를 자신의 학교 기숙사로 초청한 적도 있는데, 내가 응하지 않자 따듯한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학생예술좌의 해체 무렵 대표는 박동근이었는데, 좌익사상을 고취했다는 이유로 주영섭과 함께 감옥에 끌려가기도 했다. 그의 부인이 바로 월매 역을 한 주영섭의 여동생이다. 주영섭의 누나는 월남 이후 내가 후암동에서 살 때 바로 이웃에서 살았다. 이들 자매는 모두 이화고녀 출신으로 현대식 가정을 이끌었다. 주영섭의 불행은 일제 말 대화숙 활동으로 친일파로 몰린 것이다. 분단 이후 가족들은 다 월남시키면서도 자신은 양심의 가책으로 평양에 남았다. 일종의 속죄의식 같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분단 이후 <금강산 처녀> 같은 소품을 제작했다고 들었으나 이내 잊힌 인물이 되고 말았다. 만약 주영섭이 월남하여 연극 활동을 계속했다면 이해랑·김동원 등과 함께 연극계의 주역으로 커다란 활동을 했을 것이다. 내 아내의 친구를 주영섭의 부인으로 중매도 했기에 애틋한 마음이 더하다.”
도쿄학생예술좌는 1934년 6월 창립된 재일 조선인 학생극단이다. 주영섭을 비롯해 박동근, 황순원, 김동원(김동혁), 이해랑, 이진순, 김영수, 마완영 등 열댓 명이 참가했다. 이들이 이듬해 6월 무대에 올린 첫 작품은 유치진의 <소>와 주영섭의 <나루>였다. <나루>는 궁핍한 농촌의 현실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뒤이어 유치진의 <춘향전>이라든가, 유진 오닐의 <지평선>, 주영섭의 <벌판> 등을 공연했다. 하지만 좌익계통의 연극활동이라 하여 주역들은 귀국한 뒤 일제로부터 고초를 당했다. 도쿄학생예술좌는 1939년 8월 좌익연극단 사건에 연루되어 주영섭, 박동근 등이 구금당하면서 6년가량의 활동 끝에 해체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예술좌의 문예부 소속으로 소설가 황순원과 극작가 김영수가 참가했던 것이다. 황순원은 평양의 장로교회 계통 숭실학교 출신으로 원래 시를 썼다. 황순원의 시집 <방가>(放歌·1934)와 <골동품>(1936)은 도쿄학생예술좌에서 발행했다. 그는 때묻지 않은 순수성을 지니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김영수는 와세다대학 출신이다. 월남 이후 그의 딸들이 보인 아버지에 대한 지극한 효심은 잊을 수 없다. 시인 이상도 도쿄학생예술좌의 동인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다. 이상과 황순원은 서울의 ‘삼사문학’과 학생예술좌에서 함께 활동했다는 특기사항도 있다.
-(김병기도) 도쿄학생예술좌의 연극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나?
“나는 도쿄학생예술좌의 연극 무대장치를 맡았다. 창단작인 유치진의 <소>와 주영섭의 <나루>, 그리고 2회 공연작 <춘향전>의 무대를 만들었다. 유치진 부부는 그 무렵 도쿄에서 살았는데, 나하고도 가깝게 지냈다. 하루는 주영섭이 내게 ‘무대장치 한번 해볼래?’라고 권했다. 물론 그때까지 나는 무대장치를 해본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일본에서 연극운동이라면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독일에서 1년간 수학한 뒤 1923년 돌아와 다양한 예술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특히 그는 도쿄만 쪽의 갯벌을 매립한 허름한 지역에 쓰키지(축지) 소극장과 쓰키지극단을 중심으로 활약했다. 내가 자문을 구한 스즈키 긴조를 비롯해 당대 신극 무대장치가들에게 그는 하나의 전범이었다. 나는 열성을 다하여 무대미술을 만들었다. 한마디로 성공적인 무대였다. <소>의 무대는 사실주의 기법으로 만들었는데, 무대에 초가 한 채를 짓고 마당에는 감나무를 세워 진짜 감을 나무에 매달았다. 기관지 <막>(幕·1936) 창간호에 실린 연극 공연 장면과 기념사진에도, 초가와 감나무가 잘 보인다. 30명가량 관련 스태프들이 함께한 기념사진 끝자리에 어린 내 모습도 있다. 멜빵 차림의 옷과 오캇파의 헤어스타일이다. 흥미로운 추억 하나가 있다. <소>의 주연배우가 결정되기 전 대본연습을 할 때, 내가 주연 배역의 대본을 읽었는데 뜻밖에 칭찬을 받았다. 연극은 묘한 매력을 안겨주었다.
앞서도 한번 얘기한 적이 있다. 그 무렵 서울에서 아버지(김찬영)가 도쿄를 방문해 기차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그런데 마침 도쿄학생예술좌의 연극 공연 포스터가 역사에 붙어 있었다. 아버지가 대뜸 진노했다. 무대장치 담당으로 적혀 있는 내 이름을 발견했던 것이다. ‘너는 화가가 되지 않고 배우가 되려는가?’ 아버지가 내게 그렇게 역정을 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아버지 자신도 희곡을 발표하는 등 여러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보니 한 분야에서 뚜렷한 업적을 쌓지 못해 아쉬워했고, 결국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충고였다. 미술에 매진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은 내게 금과옥조로 남았다. 그 뒤 나는 연극과 거리를 두었다.
그때 잠시였지만, 내 무대장치를 주목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무라야마 도모요시였다. 근래 일본에 갔다가 그의 며느리(무라야마 하루에)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다. ‘장차 한국에서 추상미술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김병기’라고 평가했단다. 아마도 쓰키지 소극장에서 공연할 때 내가 한 무대장치를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무라야마는 새로운 표현파적인 프롤레타리아 연극운동을 했다. 그는 그림도 그렸고 연극 연출도 하고 무대장치도 했다. 그는 독일 유학 중 표현파의 영향을 받았다. 독일 표현주의는 칸딘스키의 추상적 표현주의와 브뤼케의 포비즘 같은 표현주의로 나뉜다. 무라야마는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무대장치를 했다.
지난해 나는 일본 가나가와미술관 초청으로 특강을 했다. 1930년대 일본 미술계에 대한 ‘증언’ 중심이었다. 세미나 룸을 가득 메운 미술전문가들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청중 속에 무라야마의 며느리가 있었다. 그는 도쿄에서 갤러리 톰(TOM)을 운영한다 했고, 내 전시를 희망했다. 그래서 내가 작품 <공간반응> 등 3점을 보내 전시했다.(2016년 겨울) 그 작품은 북한이 미사일 쏘는 것을 보고, 전쟁 불안과 더불어 평양의 실체에 대한 놀라움 등 복합적 반응을 담은 것이다. 나는 행동적 휴머니스트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마음을 담은 작품을 일본인에게 선보였다.”
녹취·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김병기는 1934년 7월 평양 광성학교 선배인 주영섭의 권유로 조선인 유학생들이 결성한 도쿄(동경)학생예술좌 창립에 참가했다. 도쿄학생예술좌는 1935년 6월4일 도쿄 쓰키지(축지) 소극장에서 창단 첫 작품으로 유치진 작 ‘소’와 주영섭 작 ‘나루’를 공연했다. 1부 ‘소’ 공연을 마친 뒤 출연 배우와 연출 스태프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김병기(앞줄 맨 오른쪽)는 멜빵바지 차림에 오캇파 머리 스타일을 했다. 도쿄학생예술좌의 기관지인 <막>(幕) 1936년 12월 창간호에 실린 사진이다. 아단문고 제공
1935년 6월4일 동경학생예술좌의 창단 첫 공연작 가운데 유치진의 ‘소’ 무대장면. 장치부(의장부)를 맡은 김병기는 원작의 리얼리즘을 최대한 살리고자 무대에 초가집을 세우고 앞마당 장독대에 감나무를 세워 실제 감을 걸어두었다.
1935년 6월4일 동경학생예술좌의 창단 첫 공연작 가운데 주영섭의 ‘나루’ 무대 장면. 역시 김병기가 무대장치를 했다.
도쿄학생예술좌 제1회 공연 입장권. 1935년 6월4일 오후 6시 ‘1부 유치진 작 소 3막, 2부 주영섭 작 나루 1막’ 축지소극장 안내가 들어 있다.
맏이 주요한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
둘째 주요섭 ‘사랑 손님과 어머니’ 유명 막내 주영섭 근대 신극운동의 주역
1934년 도쿄학생예술좌 창단 주도
아방가르드연구소 학회지 ‘로로르’에
‘기계와 꽃’ 제목으로 명문장 기고
“아틀리에는 도피자의 동굴 아니다” 창단작 유치진 ‘소’ 무대 맡은 김병기
“초가 짓고 나무에 진짜 감도 달아”
부친 이찬영 ‘대노’…‘춘향전’ 이후 활동 중단 사회주의자 주영섭 일제말기 ‘친일’
“속죄 심정으로 홀로 북에 남은듯”
분단 이후 영화 ‘금강산 처녀’ 유일한 기록
주영섭의 부친 주공삼(오른쪽 둘째)은 평양 장로회신학교 2회 졸업한 초기 개신교 목사로 상당한 부를 일궈 4남4녀 자녀들을 대부분 유학시켰다. 맏이 주요한(뒷줄 가운데), 둘째 주요섭(맨 오른쪽) 모두 근대문학사에 필명을 남겼다. 사진에 넷째 아들 주영섭은 확인할 수 없다. <한겨레> 자료사진.
<동아일보> 1939년 1월13일치에 ‘진실의 탐구’를 기고할 때 실린 주영섭의 사진.
도쿄학생예술좌 창립을 주도한 연출가 주영섭(뒷줄 왼쪽 다섯째)은 근대 신극운동을 주도했으나 해방공간 평양에 남은 이후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졌다. 1936년 도쿄학생예술좌 단원들의 도쿄 세타가야에 있던 토호(東?)영화사의 전신, 사진화학연구소(P.C.L·Photo Chemical Laboratory) 산하 영화제작소의 사운드 스튜디오 견학 기념 사진. 사진 속 주영섭의 모습은 김병기가 이번에 확인해준 것이다. 아단문고 제공
1937년 6월 도쿄학생예술좌의 2회 공연작인 유치진의 <춘향전> 무대장면. 김병기의 마지막 무대장치 작품이다. 주영섭의 누이동생이자 학생예술좌 마지막 대표 박동근의 부인이 월매 역을 맡았다.
1934년 7월16일치 <동아일보>에 실린 동경 조선인극단 학생예술좌 창립 기사. 의장부에 김정환, 김병기, 장오평 3명이 적혀 있다.
1935~39년 도쿄학생예술좌의 주요 공연장이었던 쓰키지(축지) 소극장은 1924년 일본 신극운동 주창자 히지카타 요시, 오사나이 카오루 등이 도쿄만 부근 매립지에 세운 공연장으로 400~500석 규모 최첨단 조명과 음향 시설을 갖추었다. 1945년 태평양전쟁 말기에 화재로 타버려 지금은 표석만 남아 있다.
김병기가 무대장치 조언을 구한 스즈키 긴조는 1920~30년대 일본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 주동자이자 무대장치 선구자였던 무라야마 도모요시(작은 얼굴 사진)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쓰키지 소극장에서 김병기의 무대 작품을 눈여겨본 듯, ‘추상미술가 성장 기대감’을 언급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진은 1925년 잡지 <조형>에 실린 무라야마의 표현파 무대장치 작품.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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