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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이중섭의 소·문학수의 말…식민치하 조선 민족의 상징”

등록 2017-06-08 06:00수정 2017-07-23 23:33

【길을 찾아서】 (22) 친구 이중섭과 문학수의 추억

김병기와 더불어 일본 문화학원 유학시절을 함께 한 이중섭과 문학수는 자신만의 미감으로 식민지 조선의 민족정신을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이중섭은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토종 한우 ‘소’를 매개로, 문학수는 대륙을 달리던 몽골의 ‘말’을 그 상징으로 삼았다. 1940년 제4회 자유미술가협회 공모전 입선작인 ‘소1’은 조선 문인화의 일필휘지 기법 또는 당대 유행했던 입체파나 야수파의 표현양식을 소화했다는 평을 받는다.
김병기와 더불어 일본 문화학원 유학시절을 함께 한 이중섭과 문학수는 자신만의 미감으로 식민지 조선의 민족정신을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이중섭은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토종 한우 ‘소’를 매개로, 문학수는 대륙을 달리던 몽골의 ‘말’을 그 상징으로 삼았다. 1940년 제4회 자유미술가협회 공모전 입선작인 ‘소1’은 조선 문인화의 일필휘지 기법 또는 당대 유행했던 입체파나 야수파의 표현양식을 소화했다는 평을 받는다.
1940년 제4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한 문학수의 ‘춘향단죄지도’는 몽골말을 소재로 조선의 고전소설인 춘향전을 초현실주의적으로 풀어내 몽환적인 샤갈의 영향을 받았다는 해석도 낳고 있다.
1940년 제4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 출품한 문학수의 ‘춘향단죄지도’는 몽골말을 소재로 조선의 고전소설인 춘향전을 초현실주의적으로 풀어내 몽환적인 샤갈의 영향을 받았다는 해석도 낳고 있다.
‘고반토, 로쿠반토, 규반토….’ 이것은 일본어로 ‘5번과, 6번과, 9번과…’란 말이다. 베토벤 교향곡 5, 6, 9번을 모두 다 틀어 달라는 이중섭의 주문이었던 것이다. 도쿄의 그 무렵은 아직 대형 음악다방이 생기기 전이었다. 조그마한 신주쿠 다방에서 우리들은 음악을 들으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김병기는 2005년 제주 서귀포에 자리한 이중섭미술관 개관 축하행사에 참석하며 ‘친구 이중섭 이야기-그 신화와 민족주의’를 직접 썼다. 지금도 이중섭미술관 누리집(jslee.seogwipo.go.kr)에서 전문을 확인할 수 있다.

2005년 9월 제주도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개관 축하행사에 참석하고자 뉴욕에서 귀국한 김병기(맨오른쪽)는 ‘친구 이중섭 이야기-그 신화와 민족주의’를 직접 발표했다. 사진 이중섭미술관 제공
2005년 9월 제주도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개관 축하행사에 참석하고자 뉴욕에서 귀국한 김병기(맨오른쪽)는 ‘친구 이중섭 이야기-그 신화와 민족주의’를 직접 발표했다. 사진 이중섭미술관 제공
이중섭은 그랬다. 신주쿠의 남만(南蠻)이란 다방에서였다. 15전짜리 차 한잔 마시면서, 별도로 주문한 음악감상 신청곡. 베토벤 교향곡을 3곡씩이나 틀어 달라는 것은 하루 종일 듣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다방 아가씨가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고반토, 로쿠반토, 규반토.’ ‘운명’과 ‘전원’과 ‘합창’, 베토벤의 대표 교향곡들이다. 정말 이중섭은 그랬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에 깊이 빠져드는 습성이 있었다. 그것이 비록 도에 넘치는 일일지라도 그랬다. 그래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개성적으로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5번, 6번, 9번.’ 이중섭의 독자노선은 문화학원 재학 시절의 학생 파티에서도 나타났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문화학원 시절, 학생들의 주말파티에서 그 낭랑한 음성으로 ‘사자수 흐르는 물에, 낙화암 낙화암 왜 말이 없는가’(가곡 ‘낙화암’, 이광수 작사, 안기영 작곡, 고복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비상한 용기의 소유자였다.(일본 아이들의 이해는 아랑곳없이 말이다.) 내가 그에게서 배운 유일한 노래도 ‘오! 크리스마스트리’를 닮은 행진곡풍의 ‘소나무’였다. ‘소나무야, 소나무야, 변함이 없는 그 빛, 비 오고 바람 불어도 그 기상 변치 않으니, 소나무야, 소나무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아무렇게 걸쳐 입은 인력거꾼의 ‘핫피’(윗도리)를 닮은 그의 반코트 주머니에는 언제나 여기저기 골동품상에서 모은 듯한 도자(陶磁)의 파편으로 가득했다. 조선 연적과 목각 부스러기, 그는 미친 사람처럼 우리 전통에 열중했다. 피카소나 루오를 닮은 그의 화면은 우리의 장인정신의 터득으로 해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고 있는 듯이 보였다.”

일본 학생들과의 파티, 거기서 이중섭은 늘 조선 노래를 불렀다. 학생들이 알아듣건 말건 ‘소나무’를 불렀다. 학생 모임이라면, 사회는 으레 김병기 차지였다. 일본 학생들을 상대로 한 식민지 조선 노래, 어쩌면 동족의 사회자를 부끄럽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중섭의 독자노선은 꿋꿋했다. 하기야 여자미술전문학교의 나혜석은 학교 행사에서 ‘조선창가’를 불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독립심이 강했던 도쿄 유학생들의 ‘용기’였다.

“이중섭과 나는 평양종로보통학교 같은 반 친구, 동경 문화학원 미술과 동창, 1951년 부산 피난 때는 종군화가단에서 같이 활동했고, 1956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주검으로 그를 발견하기까지 나는 줄곧 그의 가장 가까운 친구의 한 사람이었다. 이중섭은 연고자 없이 영안실 한구석에 사흘이나 방치되어 있었다. 그때는 바로 그런 시기였다. 그나마 그 어려운 시기에 애써 그를 돕던 이들은 김광균, 구상, 박고석, 한묵, 황염수 등이다. 문총(文總)과 미협에 알렸다. 그를 아끼는 몇몇 친구들과 조카 이영진, 이종사촌 이광석 변호사와 우리들은 홍제동 화장터에서 화장하고, 한 줌의 가루로 만들어 일부는 산에 뿌리고, 일부는 미아리에 묻었다. 후에 차근호가 조각비를 세웠다.

일찍이 그의 역량은 미술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으나 동란 전까지는 아직 ‘유능한 화가’라는 단계를 넘고 있지 않았다. 전쟁이란 리얼리티의 단련을 거치면서 그의 예술이 정신적인 것으로 되어갔다고 본다. 어쩌면 이것은 ‘현실성’이 작품에 미치는 작용에 대한 좋은 대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중섭의 가장 가까운 친구 김병기
“문화학원 유학시절 그는 늘 독자노선”
일본학생들 앞에서 우리말 가곡 꿋꿋이
주머니 속엔 늘 골동 도자기 파편 가득

일본인 부인에 ‘남덕’ 이름주고 전통혼례
“그때는 희귀한 일 지금은 일종의 해프닝”

피란시절 도쿄 건너가 가족 만나고도
“한사코 되돌아온 건 지사적 민족정신”

김병기·이중섭·문학수 모두 영향준 인물은
신시대전 주도한 프랑스 유학파 쓰다 세이슈
“문학수는 그 집앞 지날 때도 절할 정도”
쓰다 경성 전시때 스파이 몰려 체포 소동도

이중섭(오른쪽)은 문화학원 1년 후배로 만난 일본인 여성 야마모토 마사코(왼쪽)와 1950년 5월 고향 원산에서 결혼했다. 신부에게 ‘이남덕’ 우리 이름을 지어지고 전통혼례를 올려 화제를 일으켰다.
이중섭(오른쪽)은 문화학원 1년 후배로 만난 일본인 여성 야마모토 마사코(왼쪽)와 1950년 5월 고향 원산에서 결혼했다. 신부에게 ‘이남덕’ 우리 이름을 지어지고 전통혼례를 올려 화제를 일으켰다.
역설이 될지 모르나, (부산 피란 시절) 이중섭은 어렵사리 일본에 보낸 처자를 찾아 도쿄를 방문한 적이 있다.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쿄에 머물 차비를 대었을 것이지만 (그의 부인이 일본인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미련 없이 전장인 한국으로 돌아왔다. 비자를 얻을 수 있는 사무 능력의 부족도 있겠지만 그는 그곳에 머물 의사도 없었던 것이다. 형제가 총칼을 들고 싸우는 마당에, 내 어찌 일본에 도피할 수 있으랴, 나는 여기에서 그의 지사적 민족정신과 문화의식 같은 것을 느낀다.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에게 남덕(南德)이란 한국 이름을 지어 사모관대 하고 족두리 쓰고 결혼식을 올리는 예는 당시로서는 희귀한 일이며 요즘 말로는 일종의 ‘해프닝’이다.”

이중섭은 그렇게 갔다. 온몸으로 전쟁을 겪으면서, 겨우겨우 견뎌내다 홀연히 사라졌다. 개인사적으로 볼 때, 전쟁은 엄청난 시련이었지만 예술적 측면에서 볼 때, 이중섭 예술의 성숙을 가져왔다. 전쟁이란 현실은 새로운 개안(開眼)을 안겨주었다. 생사 문제를 안고, 궁핍함을 안고, 무엇보다 동족상잔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안고, 이중섭은 자신의 예술을 완성해 나갔다. 그래서 처자가 있는 도쿄까지 갔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이란 현실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형제끼리 총칼 들고 싸우는 현장을 외면할 수 없었던 이중섭. 이중섭이 이 땅을 떠난 지 60년도 넘었다. 오늘날 이중섭의 무덤은 망우리 공동묘지 입구 부근에 있다. 차근호 조각의 묘비가 그를 지켜주고 있다. 물론 ‘이중섭 신화’와 함께.

이중섭은 1956년 무연고 주검으로 발견돼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1주기 때 추모비를 만들어 세운 조각가 차근호(가운데)는 평양 출신으로 일찍부터 김병기의 제자, 이중섭의 아우를 자처했다. 그는 60년말 자살로 30대 중반 짧은 삶을 마감했다.
이중섭은 1956년 무연고 주검으로 발견돼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1주기 때 추모비를 만들어 세운 조각가 차근호(가운데)는 평양 출신으로 일찍부터 김병기의 제자, 이중섭의 아우를 자처했다. 그는 60년말 자살로 30대 중반 짧은 삶을 마감했다.
“그의 강직한 선이나 전면성(前面性)은 고구려 강서고분 대묘(大墓)의 청룡과 백호와 통하는 것이 있다. 내가 본 남면의 주작도(朱雀圖)는 역광으로, 외광으로 인한 퇴색을 차단한 상태에서, 선명한 버밀리언(주홍색)으로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영원히 지하 현실(玄室)에 묻혀 있어야 했을 고구려 벽화와, 이중섭의 극한 상황 속에서의 전시를 의식하지 않는 그 제작 태도는 무언가 일맥 통하는 것이 있지 않을까. 그의 선과 전면성과 더불어, 예술이 대형화하고 어떤 의미로 상업화하는 오늘의 시점에서 이중섭 예술이 갖는 이러한 순수성과 정신성은 하나의 반작용의 씨앗을 내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포름’(forme·형태)이란 각도에서 볼 때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추상적 전개- 특히 비형상과 오브제(물체)를 넘어, 인스털레이션(설치)의 막다른 길에 도달한 세계 현대미술의 전개에 과연 무엇을 첨가할 수 있을까. 아이러니컬하게도 문학수나 이중섭의 형상(形象)의 세계는 일본 추상미술을 주동한 자유미술협회 사람들에 의하여 인정되었다. 문학수는 북한에서 사라졌고, 이중섭은 남한에서 오늘의 신화를 이루었다.”

이중섭 회화세계와 고구려 고분벽화의 비교는 흥미롭다. 무엇보다 고분벽화는 장의(葬儀)미술로 피장자 하나만을 위한 미술이다. 탄생과 동시에 어둠 속의 암흑으로 묻혀야 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공식적으로 고분벽화의 살아 있는 감상자는 없다. 그런데 고구려 사람들은 무덤 축조를 위해 엄청난 공을 들였다. 고분벽화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예술활동이 아니었다. 영혼불멸설을 믿는 고구려인의 의식구조를 조형적으로 반영한 독특한 산물이었다. 망자를 위한 미술. 이중섭도 남에게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기 위해 제작하지 않았다. 일기처럼, 생존의 확인서처럼, 매일같이 뭔가 그렸다. 태어나자마자 죽어야 하는 고분벽화처럼, 그는 자신의 종말을 위해 ‘죽음의 기록’을 남겼다.

이중섭의 소 그림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는 ‘황소’. 2010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최고가(35억6천만원)를 기록한 화제작이다.
이중섭의 소 그림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는 ‘황소’. 2010년 서울옥션 경매에서 최고가(35억6천만원)를 기록한 화제작이다.
문화학원 시절 이중섭, 문학수, 김병기는 삼총사로 어울렸다. 이중섭은 소를 즐겨 그렸는데, 문학수는 말을 그렸다. 이들 둘은 오산학교 출신이다. 오산학교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서 살았다. 같은 기숙사에서 민족정신을 배우는 특이한 교풍의 학교다. 이중섭의 소와 문학수의 말. 식민지 치하에서의 독특한 상징성을 보인다. 이중섭의 소는 일본 섬에서는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중섭의 소는 토종 한우(韓牛)다. 소의 상징성, 이는 민족의식의 또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문화학원 시절 이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준 화가를 든다면, 바로 쓰다 세이슈(津田正周)를 들 수 있다.

김병기·이중섭·문학수은 모두 프랑스 유학파로 자유미술가협회 창립 회원이자 한국인과 유대가 깊었던 쓰다 세이슈(왼쪽)에게 영향을 받았다. 사진은 1945년 하얼빈에 머물다 일제 패망으로 소련군에 쫓긴 쓰다를 돌봐준 화가 정점식(오른쪽)과 함께 한 모습이다. 정점식 누리집 갈무리
김병기·이중섭·문학수은 모두 프랑스 유학파로 자유미술가협회 창립 회원이자 한국인과 유대가 깊었던 쓰다 세이슈(왼쪽)에게 영향을 받았다. 사진은 1945년 하얼빈에 머물다 일제 패망으로 소련군에 쫓긴 쓰다를 돌봐준 화가 정점식(오른쪽)과 함께 한 모습이다. 정점식 누리집 갈무리
-일본 미술가사전에서 찾기 어려운 쓰다 세이슈는 어떤 화가인가.

“매월 기노쿠니야 화랑에서 ‘신시대 전’이 개최될 무렵이었다. 우리는 쓰다 세이슈를 거기 전시장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쓰다 세이슈는 교토 출신으로 오랫동안 프랑스 유학을 다녀왔다. 한번은 신시대 전에서 재미있는 작품을 보았다. 액자 없는 캔버스 그림이었다. 쓰다 세이슈는 직사각형의 캔버스 작품을 압정으로 그냥 붙여놓았다. 액자 없는 작품 발표 형식이 기분을 좋게 했다. 그 그림은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을 그린 것이었다. 특이한 것은 그림 속에 하늘과 땅의 경계선 구별이 없었다. 그러니까 지평선이 없는 공간이었다. 그는 수묵화의 일필휘지 기법처럼 단필로 내리긋는 선을 좋아했다. 그런 표현방법이 내게는 상당히 좋게 보였다. 내가 지금도 긋는 필선에서 쓰다 세이슈의 영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의 구별이 없다는 것은 마네가 <피리 부는 소년>에서 처음 시도한 거다. 신선한 표현방법이었다.

어쩌면 나보다 문학수가 더 쓰다 세이슈의 영향을 받았다. 문학수는 쓰다 세이슈를 얼마나 존경했는가. 문학수는 쓰다 세이슈의 집 앞을 지나갈 때면 무조건 180도로 허리 굽혀 절을 했다. 말할 수 없는 존경심의 표현이었다. 이중섭은 ‘아집’이 강해 남의 영향을 받지 않는 편이었다. 문학수는 들라크루아를 좋아한다 했지만 그의 그림은 앙리 루소와 더 연결되었다. 소박한 낭만주의를 선호했다. 문학수는 프랑스 문학을 좋아해 스탕달 같은 문학은 원어로 읽을 정도였다. 분단 이후 문학수는 평양에 남았고, 이중섭은 월남했다.

해방 이전 어느 날, 쓰다 세이슈가 서울에서 전람회를 열었다. 그는 서울 반도호텔에 투숙했는데, 그림 팔아 호텔비를 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림이 팔리지 않아 호텔에 잡혀 진퇴양난에 빠졌다. 1941년 무렵이다. 할 수 없이 내가 2천달러 가까운 호텔 투숙비를 내주었다. 그리고 쓰다 세이슈 그림 4점을 받아 평양에 가서 삼촌(김건영)한테 팔기도 했다. 그때 쓰다 세이슈 부부, 문학수와 함께 종로를 걸었다. 쓰다의 부인 아리스는 벨기에 출신 모델이었다. 그는 하얀 투피스를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당시 선글라스는 ‘스파이’만 끼는 것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들은 종로 파출소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아리스가 쓰다의 부인으로 확인되어 가까스로 풀려났다. 쓰다는 아버지(김찬영) 소장의 추사 글씨를 보고, 손끝에 신경이 가 있다면서 극찬했다. 그는 전쟁 말기에 하얼빈으로 갔고, 거기서 대구 출신 화가 정점식의 보호를 받았다고 전해 들었다.”

구술·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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