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문화학원의 ‘자유주의’ 옹호했고 니시무라 존경했다”

등록 2017-06-01 00:35수정 2017-07-23 23:11

【길을 찾아서】 (21) 문화학원과 자유주의 예술교육

1935년 김병기가 입학한 문화학원은 ‘일본 최고의 자유주의자’로 꼽히는 니시무라 이사쿠가 1921년 설립한 사설 교육기관이었다. 김병기는 뒤이어 들어온 문학수·이중섭과 더불어 ‘평양 삼총사’로 불렸다. 1938년 이중섭(오른쪽 둘째), 안기풍(뒷줄 가운데)을 비롯한 문화학원 2·3학년생들이 야외 사생회를 나간 모습으로, 이시이 하쿠테이 미술과장의 맏딸 미후유(맨 왼쪽), 니시무라 이사쿠 교장의 넷째 딸 소노(앞줄 왼쪽 둘째)도 보인다. 뒷줄 왼쪽 인물이 김병기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그는 휴학중이어서 함께 가지 않았다. 이시이의 둘째 딸 유타카(맨 오른쪽) 소장본을 제주 이중섭미술관에 전달한 사진이다.
1935년 김병기가 입학한 문화학원은 ‘일본 최고의 자유주의자’로 꼽히는 니시무라 이사쿠가 1921년 설립한 사설 교육기관이었다. 김병기는 뒤이어 들어온 문학수·이중섭과 더불어 ‘평양 삼총사’로 불렸다. 1938년 이중섭(오른쪽 둘째), 안기풍(뒷줄 가운데)을 비롯한 문화학원 2·3학년생들이 야외 사생회를 나간 모습으로, 이시이 하쿠테이 미술과장의 맏딸 미후유(맨 왼쪽), 니시무라 이사쿠 교장의 넷째 딸 소노(앞줄 왼쪽 둘째)도 보인다. 뒷줄 왼쪽 인물이 김병기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는데, 그는 휴학중이어서 함께 가지 않았다. 이시이의 둘째 딸 유타카(맨 오른쪽) 소장본을 제주 이중섭미술관에 전달한 사진이다.
“천황폐하는 심심하겠지요?” 일본에서는 거의 불경죄에 해당하는 발언이다. 니시무라 교장은 학생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것도 전시체제로 치닫던 제국주의의 일본에서였다. 천황의 존엄성을 건드리는 공개 발언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대였다. 니시무라 이사쿠(西村伊作). 그는 도쿄의 학원가인 간다에서 문화학원(文化學院·분카가쿠인)이란 독특한 학교를 설립한 인물이다. 교훈을 ‘사랑과 증오’로 내걸었다.

그는 자유주의자이고, 엷은 색의 사회주의자라고 볼 수 있다. 7살 때 여읜 생부가 전도사여서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삭’에서 따온 이름이 ‘이사쿠’다. 문화학원 시절 예배를 볼 정도로 독실하지는 않았으나 훗날 옥살이를 하고 난 뒤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그는 자서전 <우리에게 이익이 있다>(我()に益()あり·1960)를 통해 자신의 생애를 정리했다. 그 책의 소개문을 보면, 니시무라는 회화와 도예 분야에서 활동했을 만큼 예술가 풍모를 보였고, 또 건축사무소를 운영한 건축가였다. 거기다 학교까지 운영하는 교육자의 면모를 보였다. 그래서 니시무라는 ‘초일류의 살롱 형성자’이고, ‘최후의 자유인’이란 평가를 받았다. 한마디로 니시무라는 ‘근대 일본의 기적(奇跡)’이었다.

니시무라 이사쿠는 유화, 건축, 도예, 패션, 예술교육 등 다방면에 재능과 족적을 남겨 근대 일본의 생활예술연구가이자 자유주의자로 최근에도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니시무라 이사쿠는 유화, 건축, 도예, 패션, 예술교육 등 다방면에 재능과 족적을 남겨 근대 일본의 생활예술연구가이자 자유주의자로 최근에도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니시무라 이사쿠(왼쪽 둘째)는 모두 9남매의 자녀 중 6명의 딸을 둔 까닭에 남녀평등과 자유주의의 이상적인 예술교육을 꿈꾸며 1921년 문화학원을 직접 설립했다. 와카야마현 신구시에 살던 시절 자택의 뜰에서 찍은 니시무라의 가족사진. 지금은 니시무라기념관으로 문화재가 됐다.
니시무라 이사쿠(왼쪽 둘째)는 모두 9남매의 자녀 중 6명의 딸을 둔 까닭에 남녀평등과 자유주의의 이상적인 예술교육을 꿈꾸며 1921년 문화학원을 직접 설립했다. 와카야마현 신구시에 살던 시절 자택의 뜰에서 찍은 니시무라의 가족사진. 지금은 니시무라기념관으로 문화재가 됐다.
니시무라 이사쿠는 왜 문화학원을 창립했는가. 순전히 자신의 딸을 위해서였다. 맏딸 아야가 중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되어가고 있으나 바람직한 교육기관을 찾을 수 없었다. 학교는 개성을 발휘할 수 있고, 또 예술적인 자유교육을 실행할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니시무라는 유명 작가인 요사노 아키코(?謝野 晶子)와 상의했다. 요사노는 남녀평등 사상을 주창한 여성운동가이자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거봉’으로 꼽히는 인물이었다. 그는 5만 수의 시를 써서 가집(歌集) 20권을 남길 정도로 창작열을 불태웠다. 그는 일본 와카(가인) 스승이자 남편인 요사노 히로시(?·호는 ?幹)와의 경험을 토대로 쓴 <헝클어진 머리카락>(1901)을 통하여 자유로운 사랑과 성을 주장했다. 왕성한 창작과 사회활동을 하면서 요사노는 11명의 아이를 양육해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꼽히기도 했다. 주체로서의 여성, 이는 여성운동의 선구자가 외치던 금과옥조였다. 요사노는 ‘산이 흔들리는 날이 온다’고 노래했다. 그러면서 “아아, 누가 이 사실을 믿어주랴. 모두 잠자고 있는 여성이 오늘에야 비로소 깨어나서 움직일 것을. 일인칭 문장을 쓰도록 하자. 나는 여자다. 일인칭 문장을 쓰도록 하자. 나는, 나는.”(‘부질없는 말’, <세이토>(靑?) 창간호, 1911) 획기적인 선언이다. 하기야 <세이토> 창간을 주재한 또다른 여권운동가 히라쓰카 라이초는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 진정한 인간이었다’고 주장해 신선한 반응을 일으켰다.

니시무라 이사쿠와 함께 문화학원 설립을 주도한 여성주의 작가 요사노 아키코(왼쪽)와 남편 요사노 히로시(오른쪽)이 1920년대 교무실에서 함께한 모습. 문화학원 누리집 갈무리.
니시무라 이사쿠와 함께 문화학원 설립을 주도한 여성주의 작가 요사노 아키코(왼쪽)와 남편 요사노 히로시(오른쪽)이 1920년대 교무실에서 함께한 모습. 문화학원 누리집 갈무리.
예술학교를 건립하기 위해 니시무라는 요사노 아키코 이외에 화가 이시이 하쿠테이(石井栢亭)를 초청해 의논했다. 1921년 이들 3인 회의에서 문화학원은 탄생했다. 1925년에는 중학부 졸업생을 배출하고 이어 대학부를 설치하여 본과와 미술과를 두었다. 요사노 칸은 본과 과장을, 이시이 하쿠테이는 미술과 과장을 맡았다. 요사노 아키코는 줄곧 여학부 학감을, 니시무라는 교장을 맡았다. 학교는 새로운 예술교육의 요람이고자 했다. 그래서 그런지, 일제 당국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교명조차 ‘학원’이라 했다. 그러면서 이색적이게도 ‘문화’라는 낯선(?) 이름을 내세웠다. 문화학원은 자유스런 예술교육의 온상으로 성장했다.

설립자이자 교장 니시무라 이사쿠
다방면 예술활동한 ‘최후의 자유인’
여섯명 딸들 위해 ‘교육기관’ 세워
교훈 ‘사랑과 증오’ 독특한 자유교육

여성운동가 요사노 아키코 ‘여학감’
‘자유로운 사랑과 성’ 문학으로 주창

미술부 과장은 이시이 하쿠테이
프랑스 유학파로 ‘일본의 마네’ 자처

미술부 강사진 모두 이과전 멤버
“인상파라며 비오는 날 쨍쨍한 풍경 그려 실망”
문학부엔 당대 소설가·철학자 ‘쟁쟁’

김병기·이중섭·문학수 ‘평양 삼총사’
“문화학원 빛낸 졸업생은 조선인들”

-문화학원에 입학할 무렵의 학교 분위기는?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서 만난 아리시마 이쿠마(有島生馬) 선생의 권유로 1935년 봄 문화학원에 입학했다. 입학 면접고사에서 이시이 하쿠테이 미술과장은, 평양에서 왔다고 하니 내게 김관호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아방가르드 연구소에서 새로운 미술의 맛을 본 나는 문화학원의 자유스런 교풍에 스며들어갔다.

1938년 제11회 문화학원 미술과 졸업사진으로 유영국(앞줄 맨 왼쪽), 니시무라 이사쿠 교장(뒷줄 오른쪽 다섯째), 이시이 하쿠테이 미술과장(뒷줄 가운데)이 보인다. 입학 동기인 김병기는 휴학하고 평양에 머물 때였다.
1938년 제11회 문화학원 미술과 졸업사진으로 유영국(앞줄 맨 왼쪽), 니시무라 이사쿠 교장(뒷줄 오른쪽 다섯째), 이시이 하쿠테이 미술과장(뒷줄 가운데)이 보인다. 입학 동기인 김병기는 휴학하고 평양에 머물 때였다.
같은 반에 유영국이 있었다. 그리고 1년 뒤에 문학수가 입학했고, 2년 뒤에 이중섭이 들어왔다. 나는 2년 다닌 뒤 1년을 휴학했기 때문에 문학수와 함께 졸업했다. 3년제 학교였다. 문화학원의 삼총사 ‘이중섭·문학수·김병기’로 묶여 친하게 어울렸다. 모두 평양 출신이었다. 웬일인지 유영국하고는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문화학원은 내 인생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문화학원 출신 조선인 학생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우리 삼총사와 더불어 박성규, 이철이, 유영국, 김종찬, 안기풍, 이정규, 이주행, 홍하구, 박성환 등을 열거한 글을 보았다. 이중섭은 1937년 봄에 입학했고, 그의 부인이 된 야마모토 마사코는 그 이듬해에 들어왔다.

1943년 문화학원은 전쟁 반대 등의 이유로 니시무라 교장이 투옥되면서 폐쇄당했다. 1946년 유럽 유학에서 귀국한 넷째딸 소노(왼쪽)와 함께한 니시무라. 미 공군 장교와 결혼한 소노를 비롯 딸 넷이 외국인과 결혼했다. 둘째 유리와 셋째 요네는 1970년대 뉴욕에 살던 김병기를 찾아오기도 했다.
1943년 문화학원은 전쟁 반대 등의 이유로 니시무라 교장이 투옥되면서 폐쇄당했다. 1946년 유럽 유학에서 귀국한 넷째딸 소노(왼쪽)와 함께한 니시무라. 미 공군 장교와 결혼한 소노를 비롯 딸 넷이 외국인과 결혼했다. 둘째 유리와 셋째 요네는 1970년대 뉴욕에 살던 김병기를 찾아오기도 했다.
미술부의 같은 반 학생은 열댓 명 정도였는데, 남학생은 불과 4명이었다. 여학생 가운데는 설립자 니시무라와 이시이의 딸도 여럿 있었다. 니시무라는 9남매 중 딸 여섯을 둔 딸부자였는데, 소노를 비롯한 딸 넷이 외국인과 결혼했을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맏딸 아야는 걸어올 때 가슴부터 보일 정도로 글래머 걸로 유명했다. 아야는 1963년 부친이 별세한 뒤 학원의 교장이 되었고, 둘째 유리와 셋째 요네는 내가 미국에서 살 때 우리 집을 방문하기도 했다. 넷째 소노는 나와 같은 반으로 함께 다녔다. 내가 들어갔을 때 학교 건물은 작은 운동장을 둘러싼 ㅁ자 형식이었으나, 원래 불타기 전에는 서양식 멋진 건물이었다. 유독 예쁜 여학생들이 많아 남학생이 혼자서 고개 들고 운동장을 건너가려면 오랜 훈련기간이 필요했다.”

1935년 김병기가 입학했을 무렵의 문화학원 전경을 그린 것이다. ㅁ자 건물 가운데 운동장이 있는 유럽풍의 신식 교정으로 니시무라 교장이 직접 설계했다. 김병기는 왼쪽에 강의실, 오른쪽에 학생회관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니시무라의 큰딸 아야의 손녀 다치바나 마키코 제공.
1935년 김병기가 입학했을 무렵의 문화학원 전경을 그린 것이다. ㅁ자 건물 가운데 운동장이 있는 유럽풍의 신식 교정으로 니시무라 교장이 직접 설계했다. 김병기는 왼쪽에 강의실, 오른쪽에 학생회관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니시무라의 큰딸 아야의 손녀 다치바나 마키코 제공.
-문화학원의 교수진과 인상에 남는 추억은?

“교수진은 이시이 하쿠테이, 아리시마 이쿠마, 야마시타 신타로(山下新太郞), 마사무네 도쿠사부로(正宗得三郞) 등 4명이었다. 이들은 모두 이과전 멤버였다. 그 가운데 아리시마는 학교에 잘 나오지 않았다.

이시이 하쿠테이는 말을 더듬었지만 수염을 길러 위엄 있는 풍모를 보였다. 그는 프랑스 유학 영향인지, 자신을 인상주의의 전파자로 생각했고, ‘일본판 마네’인 것처럼 여겼다. 마네는 벨라스케스를 제일 존경했다. 사실 북구 미술은 표현파적이었다. 노르웨이에 가보면, 지구의 끝처럼 보인다. 오로라 현상은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일찍 해가 떨어지기 때문에 실내에서 고담준론이 발달했다. ‘인생이 뭐냐’ 하는 것, 그래서 표현파가 나왔다. 이시이의 ‘마네’ 운운은 ‘일본 인상파는 내가 만들었다’는 주장 같았다. 그는 이과전을 만든 중심인물의 한명이었다. 그는 프랑스 정부의 훈장도 받았다. 그래도 그렇지, 무슨 축일이 되면 그는 프랑스 훈장을 가슴에 달고 출근했다.

문화학원의 미술과장 이시이 하쿠테이는 프랑스 유학파로 ‘일본의 마네’를 자처하며, 팔자 콧수염을 길러 위엄을 보이려 했다. 이시이가 1930년대 야외 사생회에서 실기 지도를 하고 있다. <문화학원-자유로운 바람을 품고>에 실린 사진.
문화학원의 미술과장 이시이 하쿠테이는 프랑스 유학파로 ‘일본의 마네’를 자처하며, 팔자 콧수염을 길러 위엄을 보이려 했다. 이시이가 1930년대 야외 사생회에서 실기 지도를 하고 있다. <문화학원-자유로운 바람을 품고>에 실린 사진.
실기시간에 내가 도자기 하나를 화면 가득 그린 적이 있다. 이 그림을 보고 이시이가 ‘이색적’이라며 칭찬했다. 새로운 시도를 좋게 본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그는 이중섭의 석고 데생을 보고 ‘석고는 하얀색인데, 왜 그렇게 시꺼멓게 그리는가’라고 지적했던 인물이다. 이중섭은 조르주 루오를 좋아했고, 어쩌면 석고 데생을 하면서도 소의 모습을 생각했을지 모른다.

1930년대 후반 학원은 점차적으로 군국주의 분위기로 바뀌었다. ‘문화학원 정신’이 위협받게 되자, 나는 자비로 팸플릿을 만들었다. 1938년께 만든 <에스프리 비지(BG)>라는 제목이었는데, 여기서 ‘비지’는 분카가쿠인의 약자다. 내용은 문화학원의 소식지이면서 시평 같은 것도 게재했다. 학생 시각에서 쓴 글을 발표했다. 나는 문화학원의 자유주의를 옹호했고, 사실 니시무라 교장을 존경했다. 그래서 1940년 유학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와 결혼한 뒤, 신혼살림집을 니시무라의 건축 책을 참조해 직접 설계했다.

전시체제가 본격화되자 이시이는 군국주의를 추종하는 행동을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군국주의를 비판하는 니시무라 교장을 만류해달라고 관원에게 요청했다. 이시이의 배신은 결국 니시무라와의 결별을 자초했다. 문화학원을 함께 창설하고, 또 미술부 책임자였던 이시이 과장과 니시무라 교장의 결별은 커다란 파문을 남겼다. 시대는 변하고 있었다. 문화학원은 1943년 일본 국시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폐쇄명령을 받았고, 니시무라 교장은 전쟁 반대와 불경죄로 감옥으로 끌려갔다. 일본 군국주의의 극성 시기에 있었던 불행이었다.”

1930년대 후반 문화학원 문학부 과장을 맡고 있던 사토 하루오. 시인·소설가·평론가로 근대 일본의 전통적 고전적 서정시의 제1인자로 꼽힌다. 문화학원 누리집 갈무리.
1930년대 후반 문화학원 문학부 과장을 맡고 있던 사토 하루오. 시인·소설가·평론가로 근대 일본의 전통적 고전적 서정시의 제1인자로 꼽힌다. 문화학원 누리집 갈무리.
-문화학원이 항상 ‘즐거운 시절’로만 기억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언젠가 미술부 행사의 하나로 야외 사생을 나갔다. 장소는 후토미(太海)였다. 거기는 태평양의 파도가 제일 크게 느껴진다는 도쿄 남동쪽 태평양에 닿아 있는 해변이다. 우리들은 화판을 펼쳐놓고 현지 풍경을 그렸다. 마침 그날은 비가 내렸다. 그런데 나중에 마사무네 도쿠사부로 교수의 그림을 보니, 햇볕 쨍쨍한 날의 풍경이었다. 아무리 인상파 신봉자라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비 오는 풍경을 보면서 어떻게 햇볕 풍경을 그릴 수 있는가. 인상파 그림에 비 오는 풍경은 없는가. 나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뒤부터 문화학원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현실성 없고 작위적인 미술작품은 그만큼 생동감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시이의 강의를 3년간 듣긴 했지만, 그의 화풍은 정통 인상파라고도 볼 수 없다. 그림에 담긴 소재만 신식 광경일 뿐이지 인상파 화법과 거리가 있었다. 문화학원보다 아방가르드 연구소가 나한테는 더 매력적이었다. 게다가 학생 시절의 나는 밤낮을 바꿔 살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문화학원은 열심히 다닐 수 없었다.

문화학원은 유명한 여성 졸업생을 많이 배출했다. 빼어난 미모로 1930년대를 풍미한 배우 이리에 다카코는 일본 최초의 여성 영화제작자로도 활약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문화학원은 유명한 여성 졸업생을 많이 배출했다. 빼어난 미모로 1930년대를 풍미한 배우 이리에 다카코는 일본 최초의 여성 영화제작자로도 활약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자유스런 교풍에도 불구하고 문화학원 출신의 유명 예술가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여배우를 많이 배출해 대중적 관심을 끌었다. 섹스 심벌로 유명했던 이리에 다카코가 대표적이다. 문학부는 사토 하루오 과장을 비롯 유명 강사진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졸업생은 그 명성을 잇지 못했다. 미술학부 역시 그랬다. 문화학원의 명성을 높여준 졸업생은 오히려 일본 학생보다 조선인 유학생들이었다. 이중섭, 문학수, 유영국 등을 배출한 학교로 기억할 수 있다.

1930년대 후반 문화학원 문학부 강사진에는 당대 일본 문학의 대표 작가와 철학자도 많았다. 김병기가 교정에서 자주 봤던 아베 도모지. 그는 ‘주지적 문학론’과 ‘행동주의 문학론’을 제창하며 군국주의를 비판한 지성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30년대 후반 문화학원 문학부 강사진에는 당대 일본 문학의 대표 작가와 철학자도 많았다. 김병기가 교정에서 자주 봤던 아베 도모지. 그는 ‘주지적 문학론’과 ‘행동주의 문학론’을 제창하며 군국주의를 비판한 지성이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다만 지금 후회되는 것은 그때 문학부의 유명 교수들 강의를 열심히 청강하지 않은 점이다. 당대 주지주의 문학을 대표한 아베 도모지(阿部知二)를 비롯해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같은 소설가나 미키 기요시 같은 철학자 등 화려한 교수진이었다. 특히 문학평론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는 일본의 대표 지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강조한 말, ‘예술은 진화하는 것이 아니고 변화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듣고 감동받은 적도 있다. 사실 역사에 진화가 있는가. 다만 변화할 따름 아닌가. 당시 일본의 지적 풍토는 높은 수준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예컨대 한 정신과 의사(시키바 류자부로·式場隆三郞)는 빈센트 반 고흐를 연구해 두툼한 연구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나오기 어려운 연구 성과이다. 물론 일본인들은 반 고흐를 특별히 좋아하는 성향이 있다. 뒤에 야스다 보험회사가 반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를 경매 기록까지 깨면서 최고가에 구입했을 정도다. 하기야 전세계적으로 사람들이 인상주의 그림을 제일 선호한다는 기록도 있다. 일본에서 인상주의가 유행했던 배경도 이해할 수 있다. 문화학원의 자유스런 교풍은 보수적 아카데미즘의 도쿄미술학교와 비교되어 더욱 돋보인 부분이었다.”

구술·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