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18) 일본 유학과 아방가르드 미술
“미술을 할까, 문학을 할까. 젊은 시절의 고민이었다. 원래 나는 문학을 좋아했다. 하지만 문학은 구체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남의 나라 문학은 번역이라는 과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반면 번역 과정이 필요없는 미술은 구체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아버지(김찬영)가 그림을 했기 때문에, 나도 자연스럽게 그림을 선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버지가 그림을 계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에게도 그런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긍정과 부정, 나에게 이런 복합성이 있다. 복합성은 내 예술의 토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평양 광성학교를 마칠 때 나는 미술을 전공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서울 장교동 아버님 댁에 들렀다. ‘어디 가냐.’ ‘도쿄에 갑니다.’ ‘왜 가느냐.’ ‘미술 하러 갑니다.’ 화가가 되겠다니 아버지는 그제서야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당신의 모교인 도쿄미술학교를 가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부족하면 파리로 가라고 권했다. 그러니까 나는 프랑스 유학까지 보장받고 일본으로 갔다.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하려면 가와바타화학교라는 곳에서 준비를 해야 했다. 간다의 북쪽에 있었다. 사실 그곳은 학교가 아니었다. 선생도 별로 없었다. 그냥 시꺼먼 소굴이었다. 혼자서 하루 종일 석고 데생 연습을 했다. 학생 가운데는 도쿄미술학교를 몇 년씩 낙방한 나이 많은 재수생들도 많았다. 그들의 데생 실력은 탁월했다. 가와바타에서 석고 데생을 하던 어느 날, 나는 의문이 생겼다. 왜 화가가 되는데 로마의 장군이나 그리스의 여신을 그려야 하는가. 미술 입문 과정에서 그리스·로마의 흉내는 의문을 불러왔다. 물론 석고 데생을 통하여 대상의 사실적 묘사나 명암법 같은 것을 훈련시키려는 목적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스·로마의 석고상으로 데생 연습을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의문 속에서 가와바타를 반년가량 다녔다.
어느 날 책방 거리인 간다를 걷다가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라는 간판을 보았다. ‘아방가르드’(전위)라는 단어가 가슴을 짜르르 치고 들어와 자극했다. 건물은 르코르뷔지에 스타일이었다. 그로피우스의 바우하우스와 맞먹는 스타일이었다. 사각형 형태의 신식 건물로 지붕이 없었다. 하기야 목조건물은 지붕이 필요하지만 철근 콘크리트 건물은 지붕이 필요없다. 르코르뷔지에는 말했다. 사람이 서서 손을 들고 여유 있을 정도가 천장의 높이다. 르코르뷔지에 이후 천장 높이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 건물의 1층과 2층은 목욕탕이었다. 어떻게 그런 멋진 건물에 목욕탕이 들어가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 건물의 3층이 연구소였다. 20세기 전반부 새로운 미술의 요람이었다.
연구소는 후지타 쓰구지(후지타 쓰구하루라고도 읽음)가 지도한다고 선전했다. 후지타는 파리에서 작가 활동을 하다 20년 만에 귀국한다고 했다. 게다가 그는 피카소의 친구라고 했다. 드디어 나의 길을 찾았다고 생각하니 흥분이 되었다. 앞뒤 따지지도 않고 연구소에 들어갔다. 아방가르드 미술은 보수적이고 관학파적인 도쿄미술학교를 자연스럽게 외면하게 했다. 그러니까 나는 1933년 도쿄에 도착해 방황의 세월을 보내다 1935년 아방가르드 미술과 만난 것이다.
드디어 후지타 쓰구지와 만나는 날이 왔다. 그는 검은 망토를 입고 왔는데, 펄럭이는 망토의 안감이 붉은 색깔이었다. 거기다 투우사 같은 장화를 신고 투우사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그의 헤어스타일은 특이했다. 단발머리처럼 이마 위의 머리카락을 ‘一자’ 모습으로 손수 잘랐다 했다. 이는 ‘오캇파’라고 불렀는데, 원래 스페인 농부들의 헤어스타일이라고 했다. 아방가르드 연구소 시절 나도 오캇파 스타일을 하고 다녔다. 굳이 후지타 흉내라기보다 뒤로 넘어가지 않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주체할 수 없어 자른 것이었다. 뭔가 새로운 것을 탐구하던 시절의 외모였다.
한번은 후지타 인솔 아래 연구소 학생들과 함께 무사시노로 사생여행을 갔다. 거기서 우리들 스무 명가량은 후지타의 지도 아래 춤을 추었는데, 군무여서 너무 재미있었다. 한바탕 춤을 춘 다음 우리는 다 함께 목욕탕에 들어갔다. 그런데 후지타의 몸은 온통 문신투성이였다. 그가 사랑했던 연인들의 이름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시계 하나가 새겨져 있었는데,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내 시계는 항상 12시야’ 그가 말했다. 욕탕은 나무 칸막이로 남탕과 여탕을 구분해 놓았을 뿐 아래 물속은 하나로 뚫려 있었다. 후지타가 갑작스럽게 여탕 쪽으로 넘어갔다. 나도 따라 여탕으로 넘어갔다. 여학생들의 비명과 함께 난리가 났다. 우리들은 재미있게 놀았다. 다음 날 우리들은 각자 흩어져 현장 사생을 했다. 나는 다리 밑에서 화판을 펼쳐 놓고 그림을 그렸다. 그림에 열중하다 그만 집합시간을 잊었다. 연구생들이 나를 찾으러 다니느라 소동이 일어났다. 행방불명된 학생을 찾는 소동, 나는 미안했다. 다리 위에서 나를 본 후지타는 ‘장하다’라고 한마디 했다. 집합시간을 잊을 정도로 그림에 몰두한 태도를 칭찬한 것이다. 후지타는 원래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실기실에서도 그냥 서 있기만 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의 존재 자체가 커다란 교육이기도 했다.
후지타 쓰구지의 친구 피카소는 누구인가. 피카소는 에콜 드 파리의 대표적 작가다. 파리파 작가들은 출신 국가의 특색을 살리면서 새로운 바람을 넣었다. 피카소는 스페인에서,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에서, 수틴은 러시아에서, 키슬링은 폴란드에서 왔다. 프랑스 사람은 위트릴로가 있다. 그중에서 피카소, 모딜리아니, 수틴이 중요하다. 후지타가 일본 사람으로 참여했다. 그는 도쿄미술학교 출신으로 도불하여 루벤스의 대작을 보았다. 500호도 넘는 대작을 큰 붓으로 그린 것, 정말 기가 막히게 잘 그린 그림이었다. 그때 후지타는 대작으로 루벤스를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커다란 붓의 반대쪽을 생각했다. 세계에서 제일 작은 붓, 세필의 붓으로 꼼꼼하게 사실적 묘사 실력을 자랑하기로 했다. 화면을 도자기 표면처럼 만들어 가는 선으로 나체도 그리고 파리의 풍경도 그렸다. 그런 그림으로 인기를 얻었다. 동양의 모필 실력을 서양에서 활용하여 주목받은 것이다.
문학도 좋아해 고민하다 미술로 결정
“아버지 좋아하며 파리도 가라고 격려” 1933년 가와바타화학교 데생연습만
“간다 걷다 ‘전위’ 단어가 가슴으로”
1935년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 들어가 ‘피카소 친구’ 후지타 쓰구지가 지도
“일자형 단발 오캇파 헤어스타일 특이”
‘에콜 드 파리’ 일본 대표작가 후지타
동양화 세필로 그린 사실화 ‘명성’ 칸딘스키·몬드리안·브르통·마그리트·달리
추상미술·다다·초현실주의 ‘신사조’ 호흡
“양화연구소는 일본 추상미술의 요람”
19살 김병기 연구부장 맡아 ‘회지’ 발간
왜 아방가르드라는 말이 나를 자극했는가. 당시 나는 아방가르드 계열의 예술가들을 주목하고 있었다. 미술가 가운데 칸딘스키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야시장에서 싸구려로 나온 <칸딘스키 예술론>을 보았다. 싸구려 야시장의 칸딘스키. 새로운 미술이 길바닥에서 뒹굴고 있다는 사실, 매우 흥미로웠다. 칸딘스키를 공부했다. 미술은 뭔지 모를 요소도 있다. 뭔지 모를 요소가 있기 때문에 재미있는 부분도 있다. 다 알면 흥미를 잃는다. 뭔지 모르기 때문에 보는 것도 있다. 현대미술은 좀 난해한 데가 있다. 난해함 때문에 오히려 함축성도 강한 게 있다.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에서는 석고 데생을 하지 않았다. 자유스런 분위기였다. 연구생은 나체를 비롯해 저마다 마음대로 그렸다. 연구소는 한마디로 일본 추상미술의 요람이었다. 어떤 논리적 추상이라기보다 감정적이고 직관적이었다. 입체파도 어떤 과학적 시각 아래 새로운 논리에 의해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27살의 피카소는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서 했다. 피카소가 살던 몽마르트르의 비 새는 아파트 옆방에 프랑세라는 수학자가 있었다. 프랑세는 피카소한테 어떤 쇼를 해보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둥근형을 타원형으로 그리는 것은, 원근법에 따른 것이다. 평면에서 원근법을 발견했다. 그건 아주 큰일이다. 평면에서 깊이를 만들었다. 수백년을 그렇게 했다. 그것을 설명한 것이 아폴리네르이다. 작가들이 해놓은 것을 아폴리네르가 정리한 것이다. 이것이 현대미술의 시작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몬드리안하고 칸딘스키의 비형상에 이르렀다. 이것이 현대미술의 큰길이다. 그런데 이것을 그냥 따라하면 매너리즘 같은 것이 된다.
칸딘스키에 의해 추상미술이 시작했다. 그가 하루는 외출했다 화실에 들어오니 멋있는 그림이 보였다.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칸딘스키 자신이 그린 작품이었다. 다만 그 그림은 거꾸로 서 있었다. 감동을 주는 것은 형태가 아니라 구성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감동을 준 그림은 바로 거꾸로 서 있는 것. 그 이후 주제적인 그림보다 구성적인 그림을 그렸다. 이는 큐비즘의 연장선상에 있다. 몬드리안은 수목을 사실적으로 그리다, 4단계를 거쳐, 구상을 아주 추상적으로 그렸다. 1911~12년의 일이다.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추상미술 운동이 멈추었다. 1916년에 전쟁 반대 예술가들이 취리히에서 다다 운동을 일으켰다. 다다는 매우 중요하다. 여기 서클이 있다. 서클 안과 밖은 가지의 세계와 불가지의 세계. 이마누엘 칸트가 가지와 불가지의 세계를 고민했다. 다다는 가지와 불가지의 경계선을 깼다. 이것이 다다의 세계이다. 뭔지 모를 망각의 세계가 오랫동안 내려왔다. 이 뭔지 알 수 없는 것을 다다가 부쉈다. 뭔지 알 수 없는 것을. 하지만 다다는 나오자마자 없어질 운명에 있다. 모든 것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다다의 부정의식을 타파하고 긍정의식이 나왔는데, 그게 초현실주의이다. 앙드레 브르통에 의해 파리에서 1924년, 즉 8년 뒤에 나왔다. 막스 에른스트, 호안 미로 등 이후 살바도르 달리는 미술가가 버렸던 묘사적인 것으로 초현실주의 종료를 의미한다. 르네 마그리트와 살바도르 달리는 유명하지만 초현실주의 시각에서 보면 묘사를 한 그림이어서 초현실주의의 종말이다. 20년대는 초현실주의가 주도권을 쥐었다. 그 뒤 클레는 스위스로, 칸딘스키는 파리로, 그로피우스는 하버드로 가고, 모호이너지는 시카고로 갔다. 죄르지 케페시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로 갔다. 그가 쓴 책 <랭귀지 오브 비전>(시각의 언어·1944년)은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을 이해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아방가르드 연구소에서 나는 19~20살로 가장 어린 축이었만 이론을 따지는 학생이었다. 나보다 6~7살 많은 연구생들 속에서 내가 이론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좀 특이했을 것이다. 이런 증거는 그때 내가 주도해 발간한 <로로르>라는 팸플릿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30년대의 일본 미술계는 유럽의 다양한 미술사조를 한꺼번에 받아들이는 혼재의 시대였다. 추상미술이나 다다이즘 혹은 초현실주의 등 한꺼번에 공부를 해야 했다. 모범생들은 교양은 있으나 용기가 없다. 도쿄미술학교 학생들이 그랬다. 특히 금시계를 받은 우등생들은 새로운 미술과 거리를 두었다. 일종의 깡패 같은 학생들이 용기가 있어 새로운 미술을 시도했다.”
구술·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1933년 17살의 소년 김병기는 일본으로 미술 유학길에 오른다. 한동안 방황하던 그는 1935년 도쿄의 간다 거리에서 발견한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에 스스로 연구생으로 입문하면서 마침내 ‘화가의 길’을 찾는다. 사진은 1935년 연구소 강사진과 연구생들이 함께 찍은 것으로, 1980년대 후반 김병기(맨뒷줄 타원)가 일본 방문 때 만났던 친구 세이노 가츠미(맨왼쪽 타원)의 앨범에서 찾았다. 그보다 며칠 먼저 가입한 김환기(왼쪽 둘째 타원)와 와라베 고조(앞줄 오른쪽 타원) 소장을 비롯한 당대 일본미술 대표 작가들 모습도 보인다.
20세기 일본 근대 추상미술의 요람인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는 석고 데생 같은 틀에 박힌 교육 대신 자유로운 상상력을 강조했다. 연구소 사무실도 프랑스 건축 거장 르코르뷔지에 스타일의 철근 콘크리트 신식 건물 3층에 있었다.
‘에콜 드 파리’ 일본 대표작가로 20년간 활약하다 1934년께 귀국한 후지타 쓰구지는 고생하던 시절을 잊지 않기 위해 평생 일자형 앞머리 ‘오캇파’ 헤어스타일을 고집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1935년 아방가르드 양화연구소 연구생 입문시절 김병기의 헤어 스타일도 오캇파였다.
1920년대말 도쿄 유학했던 소설가 겸 시인 구보 박태원도 오캇파 스타일이었다.
“아버지 좋아하며 파리도 가라고 격려” 1933년 가와바타화학교 데생연습만
“간다 걷다 ‘전위’ 단어가 가슴으로”
1935년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 들어가 ‘피카소 친구’ 후지타 쓰구지가 지도
“일자형 단발 오캇파 헤어스타일 특이”
‘에콜 드 파리’ 일본 대표작가 후지타
동양화 세필로 그린 사실화 ‘명성’ 칸딘스키·몬드리안·브르통·마그리트·달리
추상미술·다다·초현실주의 ‘신사조’ 호흡
“양화연구소는 일본 추상미술의 요람”
19살 김병기 연구부장 맡아 ‘회지’ 발간
김병기가 ‘아방가르드 예술’(전위예술)에 처음 끌린 계기는 러시안 출신 추상미술의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의 <예술론>이었다.
1924년 이른바 ‘초현실주의 선언’으로 다다이즘을 부정하며 서구 문화계를 주도했던 거장들. 앞줄 왼쪽 둘째부터 앙드레 부르통, 살바도르 달리, 막스 에른스트, 만 레이. <한겨레> 자료사진.
김병기는 아방가르드 연구소 입문 때 19살로 가장 어린 편이었지만 연구부장을 맡아 학회지 ‘로로르’ 편집발행인을 맡았다. 불어로 여명을 뜻하는 제호 ‘로로르’를 작명한 대표 미술평론가 우에무라 다카치오의 권두언이 실린 1937년 발행 2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