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17) 평양문단의 김사량과 오영진
‘검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지어 찬물을 호흡하고/ 길이나 대구리가 클 대로 컸을 때/ 내 사랑하는 짝들과 노상/ 꼬리치고 춤추며 밀려 다니다가/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에지푸트의 왕처럼 미이라가 됐을 때/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쐬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 짜악 짝 찢어지어 내 몸은 없어질지라도/ 내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 “명태, 명태”라고 이 세상에 남아 있으리라.’
성악가 오현명이 부른 국민 애창곡 <명태>의 가사다. 밤늦게까지 시를 쓰는 시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는 명태, 찢어져 몸은 없어질지라도 이름만은 남아 있으리라는 명태. <명태>의 시인은 양명문이다. 양명문은 김병기 화가 고모의 손녀딸과 결혼했다. 바로 극작가 김자림이다. 그러니까 시인과 화가의 집안은 사돈지간이다. 양명문은 일본어가 유창했고, ‘단층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양명문은 오장환 시인과 가깝게 지냈다. 오장환은 서정주 등과 함께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했고, 시집 <병든 서울> 등을 냈다. 그의 고향 충북 보은에 ‘오장환 문학관’이 있다. 다음은 김병기 화가의 증언이다.
국민애창곡 ‘명태’ 지은 양명문 시인
김병기 고모의 손녀 김자림과 결혼
“모든 일상이 시여서 시시할 정도였지”
“오장환 시인은 아폴리네르처럼 중요 시인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시 가운데 ‘가도 가도 붉은 땅이네’라고 노래한 작품이 기억에 남아 있다. 식민지 치하의 붉은 산천을 보고 현실을 읊은 시였다. 언젠가 오장환이 평양을 방문하여 여관에서 묵고 있었다. 시인 양명문이 오장환을 찾아갔으나 마침 출타 중이었다. 이에 양명문은 벽에 메모를 써놓고 갔다. ‘왔다 가노라. 그대 없는 방에 왔다 가노라’. 양명문은 모든 것이 시였다. 오히려 모든 것이 시여서 시시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첫 시집 <화수원>(華愁園·1939)의 풋풋한 추억은 잊지 않고 있다.
앞서 평양 문단과 단층파를 회고했지만, 사실 단층파보다 더 유명한 작가들은 따로 있었다. 나와 같은 또래 김사량과 오영진, 이들을 잊을 수 없다. 하지만 분단과 전쟁은 우리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해방과 함께 ‘연안파’로 귀국한 김사량은 김일성과 손잡고 득세하다 전쟁 때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다. <맹진사댁 경사>의 극작가 오영진은 산정현교회 오윤선 장로의 막내아들로 조만식 선생의 개인비서를 지냈다. 그는 공산 치하에서 견딜 수 없어 결국 월남했다. 1947년 11월 해주의 우리 집을 통해서 삼팔선을 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월남 이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약칭 문총) 사무국 차장을 맡았다. 전쟁이 터지고 서울 수복 때 국군을 따라올라가 문총 평양지부를 조직해 오영진이 위원장을, 내가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김사량과 오영진은 평양고보를 다녔고, 또 같은 산정현교회 신자였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나는 월남하여 서울을 거쳐 미국에서 50년가량을 살다 영구 귀국했다. 나의 친족들은 주로 미국에서 살았고, 형제와 조카들은 주로 프랑스에서 살았다. 그리고 내 친구들은 대개 평양에 살았다. 가족과 친구들끼리의 이산, 바로 디아스포라(유민) 아닌가. 디아스포라는 원래 세계 각지를 떠돌아다닌 유태인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 말이 이제는 조국을 떠나 이국땅에서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디아스포라. 우리들의 신세였다.
평양문단 대표작가는 김사량-오영진
평양고보 선후배로 산정현교회 신자
“김은 북으로-오는 월남해 엇갈린 운명” 김사량, 따지기 좋아했던 독특한 수재
형 시명은 전매국장까지 오른 친일파
1940년 조선인 첫 아쿠타가와상 후보 일제말기 학도병 탈출해 팔로군 가담
“국민복 차림 나보고 한심한 표정도”
6.25때 낙오돼 병사한듯…‘종군기’ 남겨
김사량(1914~50)은 독특한 인물이었다. 1935~6년 도쿄 유학 시절 내가 주영섭 등과 연극운동인 학생예술좌를 할 때, 그는 노동자 중심의 조선예술좌를 이끌었다. 학생이 아닌 기성인 상대의 본격 연극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학생예술좌의 무대장치는 내가 담당했고, 조선예술좌는 김일영이 맡았다. 김일영은 그때 이미 대가 같았다. 그는 지성적인 풍모로 인물도 수려했다. 이기영의 소설 <쥐불> 같은 작품의 무대장치를 한 것으로 기억한다. 김사량은 누구하고도 타협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도 산정현교회를 다녔는데 송창근 목사에게 ‘따지는 부류’의 신자였다. 그러고 보니 ‘평양의 야지 대장’이 기억난다. 이승만 정부 때 여성장관을 지낸 박현숙의 남동생으로 내 형(김병룡)의 친구였다. 그는 매사 따지기만 해 속칭 ‘야지 대장’으로 불렸다. 무슨 강연회 같은 것이 열리면, 뒤에 서 있다가 불쑥 손을 들어 따지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김사량도 ‘야지 대장’과 비슷한 기질이 있었다.
일제 말엽 어느 날 문학수와 함께 만수대를 걷고 있는데 우연히 김사량을 만났다. 그는 우리를 보고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우리가 다리에 가빠를 찬 국민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사량은 비록 눈물을 흘리면서 마지못해 했다고는 하나, 청년 대표로 학병 지원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가 ‘친일파 거두’의 동생이었던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의 친형 김시명은 교토제대 법학부 출신으로 황해도청의 고급관리가 되었다. 일제하 전매국장 직책은 사실 조선인 가운데 최고위직이라 할 수 있다. 해방 뒤 미군정 초대 전매청장까지 지냈다. 평양에는 고무공장이 많았다. 제일 큰 공장이 장인(김동원)이 운영한 것이라면, 그다음은 정창고무공장을 들 수 있는데, 그 집 사위가 김시명이었다. 정창고무 집 아들은 내 친구이기도 했다.
본명이 김시창인 김사량은 모든 일에 열정적이었다. 도쿄제대 독문과를 나왔는데, 형과 누이동생(김특실)까지 모두 수재로 소문났다. 그는 평양고보를 다니다 퇴학당한 뒤 규슈 사가고교로 유학을 했다. <빛 속에서>라는 단편소설로 1940년 <문예춘추>가 주관하는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올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아쿠타가와상 후보로 오른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그만큼 그의 소설은 인정을 받았다. 그는 유명한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책을 내기도 했다. 평양의 대표적 문학가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인물이다. 근래 김사량을 연구하는 학자가 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물론 나와 김사량의 예술론은 많이 달랐다. 나는 그처럼 막심 고리키를 최고 작가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김사량은 1943년 일본군 보도반으로 중국 대륙에 파견되었다가 연안으로 탈출하여 중국 팔로군에 합류했다. 광복 직후 조선의용군 출신 연안파로 귀국했다. 김일성과 제일 먼저 손잡은 이가 김창만이라면, 그다음은 김사량이다. 국내 기반 특히 지식인 지지층이 없었던 김일성에게 필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김일성이 오영진을 초청하여 파티를 열기도 했지만, 오영진과 김사량의 선택은 달랐다. 김사량은 안막과 함께 평남지구예술동맹을 만들었다. 내가 서기장을 맡았던 평양예술문화협회에 비교해 비록 조직은 작았지만 배후에 공산당이 있어 막강했다. 결국 우리와 통합해 북조선총예술동맹이 되었다. 소설가 한설야 등을 내세웠지만 이 조직은 안막과 김사량이 주체였다.
김사량은 6·25전쟁 때 인민군을 따라 마산까지 종군했다 후퇴하는 길에 원주 근처에서 낙오해 사망한 것으로 전해들었다. 그의 큰아들 이름은 낭림(狼林)이었다. 남쪽에 태백산맥이 있다면, 북에는 낭림산맥이 있다. 낭림이라는 아들의 이름, 뭔가 시사하는 것이 많은 것 같다.”
오영진, 민족지도자 오윤선 장로 아들
“우리집은 안도산·조만식 선생 사랑방”
김병기의 조카사위…해주집 통해 월남 식민치하 경성제대 조선어 전공 ‘소신파’
대표작 ‘맹진사댁 경사’ 각색도 맡아
“글은 사량에게…문맹자 위해 영화로”
오영진(1916~74)의 부친 오윤선 장로는 토산물 위탁업 경신상회를 운영했다. 그의 계리 자택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사랑방이기도 했다.
“우리집 사랑은 한일합병 이래, 민족 지도자들의 집합소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대전 감옥에서 출옥한 이후 나의 서재인 2층에서 유하였고, 고당 조만식 선생은 수십년래 매일같이 사랑방에서 조선물산장려회, 관서체육회, 기독청년회, 조선일보, 숭실전문중학, 숭인학교 등 민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가친과 의논하였다. 남강 이승훈 선생의 유해 문제, 순교자 주기철 목사 사건 등 모두가 집 사랑에서 발행하고 의논하였다.”(오영진, <소 군정하의 북한-하나의 증언>, 1952)
오영진은 그의 자전 에세이인 <하나의 증언>과 <10일간의 해방-평양의 8·15>(세대, 1969년 8월) 등을 통해 자신의 이력을 소개했다.
“학자가 되려고 조선문학을 전공한 것이 아니었던 것처럼 예술가가 되려고 영화 공부를 한 것은 아니다. 성급한 나로서는 소설로는 내가 의도하는 바를 급속한 시일 안에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단정했기 때문에 문학을 사량(史良)에게 맡기고 영화를 선택했던 것이다. 글재주에 있어 사량에게 뒤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내가 영화를 선택한 것은 예술가가 되려는 욕심보다는 (그 누구를 위하여) 일해보겠다는 정열에서이다. 신문 한 장 읽을 줄 모르고 이야기 책 한 줄 제대로 못 읽는 그 누구를 위해서.”(앞의 책)
김병기는 증언한다. “오영진은 평양고보를 거쳐 경성제대 조선어문학과를 졸업했다. 식민지 시절 조선어문학을 전공했다는 것만으로도 용기 있는 민족적 결단이었다. 그는 1940년 무렵 조만식 선생의 주례로 결혼했다. 신부는 일본여자대학 가정과를 졸업한 김주경이었다. 김주경은 우리 큰집 장손 김병선의 맏딸이자 내 조카다. 그러니 오영진은 바로 내 조카사위가 된다. 그는 도수가 강한 안경을 쓸 정도로 시력이 좋지 않았다. 안경을 벗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엄마 등에 업혀 영화를 많이 보았다. 커서 영화광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월남 이듬해 그는 1948년 밀파된 공산당 테러리스트에게 권총 피습을 당했다. 몸에 총알 구멍이 여러 군데 남을 정도의 상처를 냈다. 하여 그는 평생 불편한 몸을 갖고 살아야 했다. 아니, 그는 테러 공포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는 등 매우 힘들게 말년을 보냈다.
오영진은 희곡이나 시나리오만이 아니라 영화평론도 꾸준히 써냈다. 시나리오는 <배뱅이굿>(1942)을 비롯 26편을 남겼다. 첫 작품인 <배뱅이굿>은 <맹진사댁 경사>와 더불어 그의 대표작이다. 그는 영화와 함께 굿판 구경도 즐겨 했다. 서도 판소리 ‘배뱅이굿’을 바탕으로 창작한 <배뱅이굿>은 무속 등 전통에 대한 작가의 애정 어린 시각을 담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맹진사댁 경사> 역시 일본어로 먼저 썼는데 그 초고를 나한테 보여준 적도 있다. <춘향전>을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전통성을 강하게 느끼게 했다. 양반사회의 위선을 해학 넘치게 풍자했다. 이 작품은 뒤에 <시집가는 날>(1956)로 각색되어, 영화·뮤지컬·오페라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오영진은 스마트한 친구였다. 평양에서 도쿄에서 서울에서 그와 함께 보낸 세월이 삼삼하게 떠오른다. 훌륭한 작가였기에 특히 그렇다.”
구술·집필 윤범모/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도쿄제국대학 독문과 대학원 시절의 김사량. 1941년 문예지 <조광> 주최로 도쿄제국호텔에서 열린 대정익찬회 문화부장 기시다 구니오와의 대담회에 참석한 모습이다. <김사량과 일제말 식민지문학>(곽형덕 지음, 소명출판 펴냄) 중에서.
김병기 고모의 손녀 김자림과 결혼
“모든 일상이 시여서 시시할 정도였지”
국민 애창가곡 <명태>의 가사를 지은 시인 양명문(맨 오른쪽) 역시 평양 출신으로 김병기와 사돈지간이다. 극작가로 활약했던 부인 김자림(맨 왼쪽)과 아들 삼형제를 두고 1974년 작고 때까지 ‘문단의 잉꼬부부’로 꼽혔다. 막내아들 양성태씨 제공
평양고보 선후배로 산정현교회 신자
“김은 북으로-오는 월남해 엇갈린 운명” 김사량, 따지기 좋아했던 독특한 수재
형 시명은 전매국장까지 오른 친일파
1940년 조선인 첫 아쿠타가와상 후보 일제말기 학도병 탈출해 팔로군 가담
“국민복 차림 나보고 한심한 표정도”
6.25때 낙오돼 병사한듯…‘종군기’ 남겨
김병기의 평양 선배인 김사량은 식민지 시절 일본 문단에서 먼저 인정받은 조선 대표작가로, 1980년대 이후 남과 북에서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평양고보 5학년 때 퇴학당한 뒤 1933년 입학한 규슈 사가고교의 학적부에 실린 김사량 증명사진. <김사량과 일제말 식민지문학>(곽형덕 지음, 소명출판 펴냄) 중에서.
1933년 입학한 규슈 사가고교 시절 동기들과 함께 한 김사량(가운데 학생모). <김사량과 일제말 식민지문학>(곽형덕 지음, 소명출판 펴냄) 중에서.
김사량은 단편소설 <빛 속으로>로 1940년 문예춘추사에서 주관한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조선인으로는 처음 추천받아 필명을 얻었다. 1971년 일본에서 나온 <빛 속으로-김사량 작품집>의 표지.
1950년대 연안파 숙청 이후 북한문학사에서 지워졌던 김사량은 1987년 <김사량 작품집>이 발행되며 복권됐다. 1954년 평양 국립출판사에서 나온 <김사량 선집> 표지.
“우리집은 안도산·조만식 선생 사랑방”
김병기의 조카사위…해주집 통해 월남 식민치하 경성제대 조선어 전공 ‘소신파’
대표작 ‘맹진사댁 경사’ 각색도 맡아
“글은 사량에게…문맹자 위해 영화로”
오영진은 부친을 비롯한 민족지도자들의 영향으로 1933년 일본 유학 대신 경성제대에 입학해 식민치하에서 조선어를 전공했다. 어릴 때부터 시력이 나빠 두꺼운 도수 안경을 쓴 경성제대 시절 모습.
1947년 김병기의 도움으로 월남한 오영진은 우익 청년운동을 했던 까닭에 이듬해 북에서 보낸 암살범에게 저격을 당한 이후 평생토록 후유증에 시달렸다. 1950년대 영화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하던 시절의 모습.
평양시절 조만식 조선민주당수의 비서로 우익 민족주의 활동을 했던 오영진은 1963년 조선민주당 재건준비위원장을 거쳐 당수가 되기도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56년작 영화 <시집가는 날>(김승호·조미령·김진규 주연)의 포스터. 오영진이 대표작 <맹진사댁 경사>를 직접 각색했다. ‘맹씨 문중’에서 시비를 삼을까봐 제목을 바꿨다는 일화도 있다.
오영진은 김병기 고모의 딸인 김주경과 결혼해 사돈지간이기도 했다. 1974년 작고한 뒤 1989년 15주기에 맞춰 김주경 주도로 <오영진 전집>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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