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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김동인 자서전에 ‘한량 케이’가 바로 부친 김찬영”

등록 2017-04-19 18:51수정 2017-07-23 22:45

【길을 찾아서】(15) 평양의 대표 문인 김동인

평양이 낳은 소설가 김동인은 김병기의 장인 김동원의 이복동생이자 부친 김찬영의 도쿄 유학 동기로 각별한 인연이 있다. 특히 김동인과 김찬영은 <창조> <영대> 동인 활동과 영화 등 여러 사업은 물론 1920년대 평양~서울~도쿄~상하이를 넘나들며 풍류를 즐긴 ‘금수저 한량’으로도 유명했다. 당대 최첨단 유행인 ‘데카당 패션’을 갖춘 모던보이 김동인(맨 왼쪽)으로 출처는 확인되지 않았다.
평양이 낳은 소설가 김동인은 김병기의 장인 김동원의 이복동생이자 부친 김찬영의 도쿄 유학 동기로 각별한 인연이 있다. 특히 김동인과 김찬영은 <창조> <영대> 동인 활동과 영화 등 여러 사업은 물론 1920년대 평양~서울~도쿄~상하이를 넘나들며 풍류를 즐긴 ‘금수저 한량’으로도 유명했다. 당대 최첨단 유행인 ‘데카당 패션’을 갖춘 모던보이 김동인(맨 왼쪽)으로 출처는 확인되지 않았다.
김동원-김동인 형제와 김병기 화가 집안은 매우 밀접한 사이다. 장로이자 초대 국회 부의장인 김동원은 화가의 장인이고, 김동인은 부친 김찬영의 절친이다. 평양 토호 가문으로, 부친 김대윤 역시 개신교의 초대 장로였다. 김동인은 그 김동원의 16살 아래 이복동생이다. 김동인의 여동생 동선은 하루에도 여러 번 옷을 갈아입어, 칠면조라고 불릴 정도로 멋쟁이였다. 그의 남편은 좌익계열 인물이었다. 세 살 아래 남동생 동평도 있었다. 그는 식민지 시절 필리핀에서 유학했다. 그때 필리핀은 조선보다 앞선 선진국이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필리핀 건설업체들이 서울의 장충체육관 같은 큰 빌딩을 지어줄 정도였다. 김동평은 1930년대 영화 <춘희>를 제작했다. 김병기 화가의 증언이다.

“우리 동네에 영화관 ‘가이라쿠칸’(階樂館)이 있어, <흑룡강>이란 연극도 공연했지만 영화를 많이 상영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영화를 많이 봤다. 1920년대 아버지(김찬영)가 서울에서 기신양행을 운영하면서 수입·배급했던 미국 영화 <날개>도 거기서 보았다. 기신양행은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영화 수입업체였다. 특히 패러마운트 영화를 많이 취급했다. 당시 섹스 심벌로 단발머리를 유행시켰던 클래라 보 주연의 영화도 기억난다. 평양의 문예동인 ‘단층파’ 친구들과 어울려 영화를 많이 보러 다녔다. 우리는 특히 프랑스 영화를 좋아했는데, 쥘리앵 뒤비비에 감독의 영화는 모두 관람했다. 어려서 본 영화로 장 가뱅 출연의 <우리들의 친구>라든가 <망향>, 그리고 르네 클레르 감독의 작품을 즐겨 보았다. 그때는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의 과도기여서 아직 변사가 있었다. 변사는 영화 한 편에 보통 세 명이 나오는데, 착한 배역과 악역 그리고 아역으로 나누어졌다. 야경꾼이 쓰는 막대기로 효과음을 내는 게 너무 신기했다. 객석에서 떠드는 사람이 있으면, 변사는 ‘젓가락으로 집어내라’고 소리 질렀다. 변사는 인기 직업이었고 사회의 대변인 같기도 했다. 아버지는 서울 종로구청 자리에 있었던 조선극장을 인수했다. 1936년경 방화일지도 모르는 화재사건으로 시련을 겪기도 했다. 조선극장의 문은 프랑스 아르누보식의 카페 스타일이었다. 아버지는 인천의 애관극장도 인수해 운영했다.”

김병기의 부친 김찬영은 1920~30년대 최초의 외화 수입배급업체인 기신양행을 운영하면서 지금의 서울 인사동에 있던 조선극장과 인천의 애관극장 등도 운영했다. 조선극장은 1936년 6월 방화로 불타면서 폐관했다. 사진은 1936년 6월12일치 <동아일보>에 실렸다.
김병기의 부친 김찬영은 1920~30년대 최초의 외화 수입배급업체인 기신양행을 운영하면서 지금의 서울 인사동에 있던 조선극장과 인천의 애관극장 등도 운영했다. 조선극장은 1936년 6월 방화로 불타면서 폐관했다. 사진은 1936년 6월12일치 <동아일보>에 실렸다.
김동평의 영화 인생은 흥행 실패로 오래가지 못했다. 김동인도 그 영화 배급에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가로서 김동인의 위상은 날로 치솟았다. 평양 출신 대표적 문학가로 꼽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김동인은 누구인가. 1900년생으로 숭실학교를 다니다 1914년 도일해 메이지학원 중학부를 다녔다. 그런데 소설가 김동인의 이력 가운데 특이사항 하나가 눈길을 끈다. 바로 미술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이다. 화가 지망생이었을까. 1918년 가와바타미술학교에 입학했다. 후지시마 다케지의 문하생이었던 셈인데,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19년 3월1일 도쿄 히비야공원의 조선인 유학생 독립선언 집회에서 동생 동평이 낭독한 격문을 써준 이유로 검거되어 6월까지 구류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김동인의 빛나는 대목은 문학에서, 그것도 조선 최초의 순수문예지로 꼽히는 <창조> 발행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는 점이다. 1919년 도쿄에서 발행하기 시작한 <창조>의 창간호에 김동인은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계몽주의의 이광수 소설과 비교되는 독자성을 보였다.

김동인은 도쿄 가와타바미술학교에 재학하던 1919년 사비를 들여 <창조>를 발행하고 등단도 했다. 김찬영·김관호·황순원 등 평양 출신 유학파들이 창간을 주도했다. 국내 첫 순수문학지로 평가받는 ‘창조’의 창간호 표지.
김동인은 도쿄 가와타바미술학교에 재학하던 1919년 사비를 들여 <창조>를 발행하고 등단도 했다. 김찬영·김관호·황순원 등 평양 출신 유학파들이 창간을 주도했다. 국내 첫 순수문학지로 평가받는 ‘창조’의 창간호 표지.
<창조>의 창간 동인은 김동인을 비롯해 주요한·전영택·최승만·김환 등이었고, 뒤에 이광수·김억·김소월·황석우·노자영 등도 참여했다. 특기 사항은 동인으로 화가 김관호와 김찬영도 참여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평양 출신들이 <창조> 발행의 주역이었다. 김찬영은 <창조>에 시 4편, 평론 2편, 수필 1편을 발표했다. <창조> 발행은 주요한의 제안과 김동인의 자금 충당으로 가능했다. 호마다 100원 이상의 손해를 보았다. 한 달 하숙비가 50원도 되지 않을 때 100원은 거금이었다. 특히 학생 신분으로 거금 지출은 결국 경찰서 연행으로 이어져 조사를 받아야 했다. <창조> 동인들은 일제의 요시찰 명단에 올랐다. 하기야 <창조>에 이런 주장도 보여 눈길을 끌었다. “불평은 사람의 생명이요, 사회의 생명이니, 불평이 없으면 죽은 사람이요, 불평이 없으면 죽은 사회이다.”(최승만, ‘불평’, 1919)

1925년 발표한 대표작 <감자>(맨 왼쪽 사진)에 ‘악랄한 중국인 부자 왕 서방’을 묘사했던 김동인은 1931년 평화의 화교 배척 폭동사건 때 습격에도 가담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1925년 발표한 대표작 <감자>(맨 왼쪽 사진)에 ‘악랄한 중국인 부자 왕 서방’을 묘사했던 김동인은 1931년 평화의 화교 배척 폭동사건 때 습격에도 가담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김동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는 단편소설 <감자>(<조선문단> 1925년 1월호 발표)다. ‘인간의 존엄성이 상실되는 현실을 묘사한 자연주의 소설’이라는 사전식 정리도 있다. 이 소설은 1920년대 평양 칠성문 밖 빈민굴이 배경이다. 주인공 복녀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무능한 늙은 남자에게 80원에 팔려 간다. 기자촌 송충이잡이 작업장에 갔다가 감독과 눈이 맞아 매춘을 하게 되고, 이어 중국인 왕 서방의 감자를 훔치다 들켜 결국 정부 노릇을 한다. 뒤에 왕 서방이 돈으로 처녀를 사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자 낫을 휘두르면서 질투심을 표현한다. 이들의 활극은 결국 복녀가 낫에 찍혀 죽게 되고, 흥정에 의해 ‘뇌일혈 사망’이라는 가짜 진단으로 죽음마저 무마된다. 돈 때문에 매춘과 타락의 길로 들어서는 복녀의 이야기를 통해 민족 현실의 비극성을 표현하려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처럼 김동인 소설 속에 담긴 중국인 모습은 자못 부정적이다.

김동인은 장인 김동원의 이복동생
부친과 ‘메이지학원 중학부’ 동창생
그 동생 동평은 영화 ‘춘희’ 제작자

김찬영도 ‘기신양행’ 세워 외화수입
서울 조선극장·인천 애관극장도 운영

김동인 가와바타미술학교 재학시절
1919년 최초 순수문예지 ‘창조’ 발행
김찬영·김관호 등 평양 출신들 주도

1931년 7월 평양 ‘중국인 배척사건’
“김동인도 습격 가담해 분노 표출해”
대표작 ‘감자’ 중국인 왕서방과 ‘연관’

김병기는 1931년 7월초 평양에서 일어난 화교 배척 폭동사건 때 집 앞에 있던 중국요리집이 습격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만주 만보산의 농수로 분쟁으로 중국 농민들이 조선인을 여럿 죽였다는 <조선일보>의 오보로 빚어진 폭동사건은 전국에서 유독 평양이 심했다. 사진은 그해 7월5일 폭동과 학살로 폐허가 된 평양 거리.
김병기는 1931년 7월초 평양에서 일어난 화교 배척 폭동사건 때 집 앞에 있던 중국요리집이 습격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만주 만보산의 농수로 분쟁으로 중국 농민들이 조선인을 여럿 죽였다는 <조선일보>의 오보로 빚어진 폭동사건은 전국에서 유독 평양이 심했다. 사진은 그해 7월5일 폭동과 학살로 폐허가 된 평양 거리.

1931년 7월 조선인의 화교 배척 폭동을 유발했던 <조선일보>의 ‘만보산 사건’ 오보 기사.
1931년 7월 조선인의 화교 배척 폭동을 유발했던 <조선일보>의 ‘만보산 사건’ 오보 기사.

1931년 7월5일 평양에서 화교 대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만주의 ‘만보산 사건’으로 촉발된 전국적인 배화폭동 때다. 1930년대 조선에 거주하던 화교는 6만명 정도였다. 평양에도 500호 가까운 화교가 살고 있었다. 화교 숫자의 급증은 노동계를 위협하면서 갈등의 요인이 됐다. 그러던 7월초 만주에서 중국인이 조선인들을 대거 살해했다는 ‘오보’ 탓에 평양에서도 분풀이 학살 사건이 터진 것이다. 살인과 방화로 최소 100명 이상의 화교가 희생당했다. 그 참극의 현장에 김동인도 있었다. 그는 훗날 <붉은 산>(1932)에서 감회를 피력하기도 했다. 중국인에 대한 울분의 표현일까. <감자>와 맥락을 공유하게 하는 일화일까. 김병기 화가의 증언이다.

“내가 광성학교에 다닐 때였다. 조선인 동네인 웃거리(신창리) 중국요리집 동승루를 맨 처음 습격했다고 전해지는데, 일본인 동네인 아랫거리 길목에 있던 우리 집(중성리) 근처 중국인 집단가옥 안에 있는 요릿집 홍성루 앞에서도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인들이 서툰 우리말로 ‘나는 조선 사람이다’라고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중국인과 조선인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일제의 음모가 뒤에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중국인 소유의 도매상 태안양행도 습격을 받았다. 놀랍게도 그 현장에 김동인도 있었다. 그는 광목을 찢으면서, ‘이놈들 나쁜 놈이야’, 마치 중국인에게 복수하려는 듯 분노를 표시했다. 화교 집들은 모조리 폐허가 돼버렸다. 그 뒤 태안양행은 우리 장인이 인수해 운영했다. 태안양행은 미제 수입품을 주로 취급해 선교사들에게 식료품을 보급했다. 그 덕에 우리 집에도 버터, 통조림 같은 미제 물품이 많았다. 평양엔 미국 자본으로 운영하는 옥수수기름 공장인 ‘마조라 오일 공장’도 있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 살던 김동인은 평양에 오면 태안양행에서 며칠씩 묵곤 했다. 1917년 부친 사망 뒤 막대한 유산을 받았으나 탕진하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기울어 힘든 시절이었던 것 같다. 평소 글을 보면서 존경했기에 만날 때면 공손히 인사를 하고 이야기도 나누곤 했다. 김동인과 나의 결정적 인연은 1938년 김동원의 딸과 혼담 때였다. ‘아버지가 서울에서 따로 살고 있으니 과연 아들을 돌봐줄 것인가’, 신부 쪽에서는 그 확인이 필요했다. 그래서 형의 부탁을 받은 김동인이 서울에서 아버지를 만나 담판을 지었다. 결국 아버지로부터 나를 돌보겠다는 확답을 듣고 나서야 약혼이 진행되었다. 내 아내의 이름은 김순환으로 길선주 목사가 지어주었다. 도쿄실천여대 가정과 출신으로 요리, 바느질 등 못하는 것이 없었다. 아내는 도넛을 완벽하게 만들 줄 아는 기술이 있었고, 이 기술은 부산 피란 시절 우리 집의 호구지책이 되기도 했다. 그 시절 남자들의 로망은 ‘양옥에서 중국요리를 먹으면서 일본 여자와 사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나는 두 가지를 성공한 셈이다.

1930년 전후 신문에 연재한 김동인의 자서전 <여인>에는 젊은 날의 절친 김찬영이 ‘난봉꾼’으로 등장한다.
1930년 전후 신문에 연재한 김동인의 자서전 <여인>에는 젊은 날의 절친 김찬영이 ‘난봉꾼’으로 등장한다.

아버지가 김동인보다 7~8살 연상이지만 절친한 사이였다. 일본에서는 메이지학원을 같이 다녔다. 젊어서는 풍류객으로 가산을 마냥 탕진했다. 서울 명월관의 주요 고객이었다고 했다. 김동인의 자서전 <여인>에 등장하는 부잣집 난봉꾼 ‘케이’(K)가 바로 김찬영을 일컫는다. 일본요리집에 갔더니 자기가 좋아하는 기생을 케이가 먼저 차지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 무대가 아마도 우리 집 앞에 있던 ‘수정’(고토부키)이라고 생각한다. 하기야 식민지 시절 이들의 일탈행위는 일종의 반항심에서 나온 것이다. 두 사람은 일본 신문에 새 넥타이 광고가 나오면 함께 도쿄에 사러 가기도 했다. 물론 넥타이는 핑곗거리였겠지만.

김동인 소설로 <김연실전>(1939)이 있다. 기생 출신 어머니의 ‘나쁜 피’를 받은 신여성이 자유연애 행각을 벌이다 파멸한다는 이야기다. 이 소설의 모델은 탄실 김명순(1896년 평양 태생)으로 알려졌다. 그는 18살에 ‘망양초’라는 이름으로, 최남선·이광수가 주재한 <청춘> 현상문예에 입선해 등단했다. 시집 <생명의 과실>을 비롯해 다수의 소설을 발표했다. 그런데 인터넷에 이상한 낭설이 떠돌고 있다는 얘기를 최근에야 들었다. 즉 김탄실이 ‘김가산 소실의 딸’이란다. 김가산이면 나의 조부를 일컫는다. 심지어 아버지가 김탄실의 일본 유학을 주선해주고 도쿄의 같은 집에서 살았다는 설까지 근거 없이 나돈다고 한다. 김탄실이 한때 길진섭의 애인이었다는 얘기도 금시초문이다. 그가 그 시절 보기 드문 신여성으로 비극적인 운명을 살아서 대중의 입방아에 오른 모양이다. 어쩌면 김동인의 <김연실전>도 그런 소문의 단초를 이루었는지 모르겠다.”

1920년대 후반 가산을 탕진해 첫 부인마저 떠나버렸던 김동인은 1931년 4월 친구 전영택의 제자 김경애(오른쪽)와 재혼했다. 당대 풍류객으로 인기가 높았던 그의 재혼 소식은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장안의 화제였다. <만국부인> 창간호(1938년 10월호)에는 결혼사진과 함께 ‘문사 김동인씨 부인 방문기’도 실렸다.
1920년대 후반 가산을 탕진해 첫 부인마저 떠나버렸던 김동인은 1931년 4월 친구 전영택의 제자 김경애(오른쪽)와 재혼했다. 당대 풍류객으로 인기가 높았던 그의 재혼 소식은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장안의 화제였다. <만국부인> 창간호(1938년 10월호)에는 결혼사진과 함께 ‘문사 김동인씨 부인 방문기’도 실렸다.
김동인은 한국전쟁 때 뇌경색으로 반쪽이 마비된 상태여서 가족들과 함께 피란을 가지 못한 채 홀로 숨져 1951년 8월 뒤늦게 집 인근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서울 왕십리 자택에 서 있는 말년의 김동인 모습. 김동인 유가족 소장
김동인은 한국전쟁 때 뇌경색으로 반쪽이 마비된 상태여서 가족들과 함께 피란을 가지 못한 채 홀로 숨져 1951년 8월 뒤늦게 집 인근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서울 왕십리 자택에 서 있는 말년의 김동인 모습. 김동인 유가족 소장
알다시피, 김동인의 말년은 불우했다. 첫 부인이 가출한 뒤 그는 1931년 재혼해 3녀1남을 뒀다. 아들 김광명(전 한양대 의대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이렇다. 1949년 중풍으로 쓰러진 김동인은 이듬해 6·25전쟁이 터졌으나 한쪽 몸이 마비상태여서 도저히 한강을 건널 수 없었다. 왕십리 집에서 지내는 동안 인민군의 체포 시도는 계속됐고, 병세는 나빠져 혼수상태에 이르렀다. 그해 말 연합군의 퇴각설에 부인은 아이들부터 한강 건너로 피란시킨 뒤 남편을 돌보러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 하지만 1951년 1월3일 집을 떠난 부인은 8월에야 가까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집 안에 환자는 보이지 않았다. “집에서 20m 정도 떨어진 밭고랑에서 잠옷을 입은 아버님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미 상당히 부패해서 잠옷과 형태로밖에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아버님은 왼쪽에 뇌경색증이 발병하셨고, 우리가 집을 떠날 무렵엔 혼수상태로 삼키는 기능도 마비되어 식사를 못 하신 지가 거의 보름이 되었으며 합병증으로 폐렴까지 발병한 상태였다. 아마도 우리가 피란 떠난 날이나 그 이튿날 돌아가셨으리라고 추정된다.” 부인(김경애)은 2008년 97살로 눈을 감을 때까지 인터뷰를 거절하면서 함구했다. 슬픈 이야기다. 김동인은 그렇게 갔다. 한 시대의 풍류는 그렇게 사라졌다.

구술·집필 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기획·진행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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