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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평양시절 고달팠던 박수근 서울 와서 보니 훌륭했다”

등록 2017-04-12 23:43수정 2021-01-21 17:29

【길을 찾아서】(14) 평양 화단의 국내파와 유학파

가운데 박수근
가운데 박수근

앞쪽 유석준(한 사람 건너) 이득찬. <한겨레> 자료사진
앞쪽 유석준(한 사람 건너) 이득찬. <한겨레> 자료사진

“나는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만일 승낙하셔서 나와 결혼해 주신다면, 물질적으로는 고생이 되겠으나 정신적으로는 당신을 누구보다도 행복하게 해 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되고 당신은 훌륭한 화가의 아내가 되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귀여운 당신을 내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보다 더한 행복은 없겠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꿈꾸어 오던 내 아내에 대한 여성상은 당신과 같이 소박하고 순진하고 고전미를 지닌 여성이었는데 당신을 꼭 배필로 하느님께서 정해 주신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나는 나 혼자 당신을 모델로 그림을 그려 보기도 합니다.”

소박하면서도 구구절절한 구혼의 편지다. 장소는 강원도 철원군 금성면의 한적한 시골 마을, 수신인은 김복순이다. 재산이라곤 붓과 팔레트밖에 없다는 무명 화가, 그렇지만 장래 훌륭한 화가를 꿈꾸고 있는, 바로 박수근이다. 1939년 봄, 이미 결혼 상대까지 정해졌던 처녀는 결국 마음을 바꾸는 파격을 보였다. 밀레와 같은 화가를 모델로 삼았던 박수근. 그는 몰락한 집안에서 궁핍함을 안고 붓을 들어야 했다. 미술학교는커녕 고등교육조차 받을 형편이 되지 못했다. 독학이라는 가시밭길은 그의 독차지였다. ‘한반도의 배꼽’이라는 양구 출신 박수근은 신혼살림조차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평양으로 떠나야 했다. 생계를 위해 어렵게 구한 직장, 평안남도 도청의 하급직이었다. 1941년 박수근은 아내를 평양으로 불러 사글세 단칸방 생활을 시작했다. 군식구도 많아 7명이 함께 살아야 하는 어려움도 이겨내야 했다. 생활은 고달팠지만 놓을 수 없는 것은 붓이었다. 조선미전에 꾸준히 출품하여 화가로서의 존재감을 확인했다. 박수근의 평양시절은 박수근 예술의 원형을 수립하는 중요한 시기였다. 다음은 김병기 화가의 증언이다.

“박수근은 평양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나, 각별한 교류는 없었다. 그때 도쿄 유학생 출신들은 약간 으스대는 경향이었다. 그래서 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국내파와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특히 아방가르드(전위) 미술을 연구한 나로서는 아카데미즘 미술은 진부한 것처럼 여겨 더욱 그랬을 것이다. 박수근은 밀레의 영향을 받은 소박한 화가 정도로 알았다.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줍기’ 같은 그림들은 ‘이발소 그림’ 수준으로 치부하고 촌스럽다고 여겼다. 하지만 뒤에 서울 와서 보니 박수근은 아주 훌륭한 화가였다. 전쟁 이후 그의 작품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바탕에 두고 독특한 화풍을 이룩했다. 외국 영향과 무관하게 독학으로 일군 커다란 성과였다. 그의 화풍은 신라의 마애불 석조와 같은 질감과 연결되었다. 개성적인 화풍이었다. 다만 박수근의 질감은 화면 바탕을 미리 만들어 놓고 그 위에 대상을 간략하게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이는 조르주 루오나 마티스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질감을 위한 질감은 장식적 요소가 강할 수 있다. 사실 장식은 2차적인 것이고, 1차적인 것은 정신적 행위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소재 역시 아낙네와 나목 등 제한적이어서 아쉬웠다. 작업 환경의 호조건과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엄청난 예술세계를 남겼을 것이다. 아무튼 박수근은 중요한 화가다. 그의 작업은 숱한 화가들로 하여금 반성을 하게 한다. 역경을 딛고 독자적 화풍을 이룩한 점만 보아도 그렇다.

진솔한 편지로 청혼에 성공한 박수근은 1940년 2월 춘천 금성감리교회에서 18살 이웃처녀 김복순과 결혼한 뒤 평양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궁핍한 신혼살림을 하면서도 그림에 정진해 성취했다. 양구 박수근미술관 제공
진솔한 편지로 청혼에 성공한 박수근은 1940년 2월 춘천 금성감리교회에서 18살 이웃처녀 김복순과 결혼한 뒤 평양에서 말단 공무원으로 궁핍한 신혼살림을 하면서도 그림에 정진해 성취했다. 양구 박수근미술관 제공

일제강점기 평양의 화단 구성은 일본 유학생파와 비유학생파로 대별할 수 있다. 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국내파로 광성학교 출신의 최영림·황유엽과 미나카이백화점 선전부에서 근무했던 장리석 그리고 박수근 등이 있다. 평양부청 산하 평양박물관의 학예원으로 오노 다다아키라는 일본인이 있었다. 그는 르누아르 제자인 우메하라 류자부로와 관련 있는 일본의 국화회에 대한 이해도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일종의 일본풍이랄까 동양적 취미 같은 것이 있었다. 주호회(珠壺會)에 오노의 영향이 있다. ‘주호’는 광성고보 2학년 때 중퇴한 뒤 독학하다 요절한 최지원의 아호다. 그는 제18회(1939) 조선미전에 ‘걸인과 꽃’이라는 목판화로 입선하기도 했다. 주호회는 최지원 1주기를 맞아 1940년 가을 창립한 화가들의 집단이다. 이 모임에 참가한 화가는 황유엽, 장리석, 최영림, 박수근 등이다. 국내파들의 결집이라고 보아도 과언은 아닐 듯하다. 최영림의 작품은 판화가 무나카타 시코와 연결된다. 최영림은 달, 여인 같은 소재를 즐겨 다루었는데, 다분히 토속적이면서도 신화적이었다. 물론 이중섭 작품에도 신화적 분위기가 스며 있다. 이들의 인물 표현 기법을 보면 머리를 뒤로 젖혀 돌아가게 했다. 어떻게 보면 만화 같은 표현이고, 데생을 무시한 것 같기도 하다.

주호회는 평양 광성고보 2학년 때 중퇴하고 독학하다 요절한 최지원의 호를 따 1940년 결성한 동인이다. 최지원은 1939년 제1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목판화 ‘걸인과 꽃’으로 입상해 ‘한국인 첫 판화가’로 이름을 얻었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
주호회는 평양 광성고보 2학년 때 중퇴하고 독학하다 요절한 최지원의 호를 따 1940년 결성한 동인이다. 최지원은 1939년 제1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목판화 ‘걸인과 꽃’으로 입상해 ‘한국인 첫 판화가’로 이름을 얻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주호회의 최영림은 광성고보 때인 1935년 전국학생작품전에서 ‘답절의 부근’이 뽑혀 &lt;동아일보&gt;(9월27일치)에 인터뷰가 실렸다.
주호회의 최영림은 광성고보 때인 1935년 전국학생작품전에서 ‘답절의 부근’이 뽑혀 <동아일보>(9월27일치)에 인터뷰가 실렸다.

그는 오노의 소개로 일본 목판화 대가 무나카타 시코의 문하에서 유학했다.
그는 오노의 소개로 일본 목판화 대가 무나카타 시코의 문하에서 유학했다.

아마도 미술학교의 교육과 거리가 있어 이렇듯 자유스런 표현 형식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하기야 현대미술사에서 독학파의 역할은 중요했다. 세잔, 반 고흐, 폴 고갱. 이들은 현대미술 형성의 주요 화가들이다. 게다가 독학파라 할 수 있다. 세잔은 미술학교를 낙제했고, 르 살롱에서도 낙선 작가였다. 고흐는 목사의 아홉 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가난한 집안에서 독학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증권회사 사원이었던 고갱 역시 독학파였다. 고갱은 애초 휴일에만 그림 그리다 점점 빠져 전업 화가가 됐다. 나중엔 아예 아내를 코펜하겐으로 보내고 브르타뉴에서 그림만 그렸다. 세잔은 대상을 원통형·원구형·원추형으로 보았지만, 고갱은 평면적으로 보았다. 중세시대에는 대상을 투시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고흐는 투시에 대한 비상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가혹할 정도로 사실 추구에 힘을 주었다. 아무튼 알다시피, 이들 3인의 미술사적 비중은 매우 크다. 독학파의 승리라고 부를 만한 역사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현대미술의 출발에 이들의 기여도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1941년 박수근 평안남도 도청 근무

사글세 단칸방 일곱식구 살며 ‘독학’

조선미전 출품하며 ‘예술 원형’ 형성

김병기 “역경 이겨낸 성취 보며 반성”

박수근·최영림·황유엽·장리석…국내파

평양박물관 학예원 ‘오노’ 영향 받아

광성고보 중퇴한 ‘첫 판화가’ 최지원

요절 1주기때 ‘주호회’ 결성해 전시회

이중섭·문학수·윤중식·황염수·이호련

김병기 포함 도쿄 유학파 6인전도

“오산학교서 본 중섭의 습작 인상적”

예술인 집결지는 시내 다방 ‘세르팡’

“‘고구려 후예’ 자부심이 예술 토양”

평양 화단에서 일본 유학파를 꼽는다면 6명이 대표적이다. 윤중식, 문학수, 이중섭, 황염수, 이호련, 그리고 나 김병기다. 일본 유학파 6명은 평양 체신회관에서 전시를 열기도 했다. 윤중식은 1년쯤 선배이고, 나와 문학수·이중섭은 동갑이다. 황염수는 평양고보에 이은 제국미술학교 출신이다. 6명 중에 나와 문학수·이중섭은 도쿄의 문화학원 출신이다. 또 문학수와 이중섭은 오산학교 출신이다. 이과전에 출품했던 이호련은 황염수의 친구였는데, 6·25 때 나를 따라 남하했는데, 그 뒤 행방을 알 수 없다. 6명 가운데 문학수만 평양에 남아 대표적 화가로 활동했고, 나머지는 월남하여 새로운 화풍을 선보였다. 윤중식은 석양 풍경을 즐겨 그렸다. 그러니까 그는 일출에는 무심했고 유독 해 지는 풍경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했다. 그렇다고 석양과 무슨 지조 관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황염수는 ‘장미 화가’라는 별명을 얻었을 만큼 장미꽃을 즐겨 그렸다.

광성고등보통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1년 선배 계명칠이 미술반장을 지냈다. 그는 조선미전에 출품하여 화가로 입문하기도 했다. 1년 후배로 최영림과 황유엽이 있다. 상대적으로 시골 출신 우등생이 많았던 평양고보생들은 사립인 광성고보를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정관철이나 황헌영도 평고보 출신이었다. 황헌영은 소설가 김사량과 단짝이어서 해방 이후 그의 추천으로 미술동맹 부회장으로 이름을 올렸지만 별다른 활동은 하지 않았다. 이중섭은 원산에서 살아 자주 만날 수 없었다.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온 친구는 문학수였다. 그래서 우정을 듬뿍 나눴다. 전쟁 때 달라진 이데올로기로 적대관계에 놓이기도 했지만 우정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문학수 집안은 고읍에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농장에서 한 해 겨울을 보내기도 했다. 고읍은 쌀 생산지로 유명해, 일본 왕도 고읍 쌀을 먹을 정도였다.

문학수와 이중섭이 다닌 정주 오산학교는 민족학교로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오산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며 민족의식을 함양했다. 이중섭 재학 시절 미국 예일대 출신의 임용련이 미술 선생이었다. 임용련의 부인 백남순 역시 프랑스 유학파로 당대 최고의 엘리트 화가 부부였다. 언젠가 오산학교에 가본 적이 있는데, 이중섭의 그림이 복도에 걸려 있었다. 왼손을 사실적으로 아주 잘 묘사한 그림이었다. 중섭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주목받았다.

함경도 출신의 김하건이란 화가도 기억난다. 해방 이후 평양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지식인 분위기의 모더니스트로 정관철과 가깝게 지냈다. 그는 일본의 미술문화협회에 출품했다. 초현실주의적 공간 같은 화풍의 그림을 발표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 시도하는 화풍이었다. 어쩌면 김기림 시인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커다란 공간에 소 두 마리가 있는 풍경, 뭔가 상징성을 나타내려 한 것 같다.

그 시대 분위기로 ‘만주국 체험’을 들 수 있다. 일제는 만주에 괴뢰정부로 만주국을 세웠다.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였다. 동경제대 미학과 출신 후쿠자와 이치로는 만주국을 왕래하면서 만주국의 허점이랄까 괴리감 같은 것을 느꼈다. 제국주의에 대한 반항까지는 아니었지만, 일종의 공허감을 느꼈다. 만주국은 일본 청년에게 있어 의문의 공간이었다. 일본인의 대륙적 공간에 대한 맹점의 표현이었다. 텅 빈 공간에 소나 말 혹은 아낙네가 있는 풍경, 이는 만주국의 공허감과 연결될 수 있다.

평양 시내의 문화예술인 집결처로 ‘세르팡’ 다방이 있었다. 세르팡(serpent)은 프랑스어로 ‘뱀’이라는 뜻이다. 뱀은 이지(理智)를 상징했다. 다방은 단층 건물의 반지하에 있었다. 세르팡이란 말은 ‘셋방’이란 말과도 비슷한 어감을 주었다. 세르팡에 가면 항상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있어 고담준론을 나누게 했다. 평양 예술의 산실인 셈이다. 원래 도쿄에서 발행되던 월간 <세르팡>이란 문예지가 있었다. 프랑스 문화를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영화도 프랑스 영화를 중심에 두었지 미국 영화는 시시하다 해서 비중을 두지 않았다. 하기야 일제 시기에 대다수 예술가들은 미국보다 프랑스를 선호했다. 특히 미술 쪽에서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프랑스 미술을 우위에 두었다. 나도 원래 프랑스 유학을 꿈꾸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실행하지 못한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평양 기질이란 말이 있다. 보통학교 6학년이면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다. 그런대 특이한 ‘전통’ 한 가지가 있다. 평양 학생들은 서울 가면 으레 서울 아이들을 때리고 와야 했다. 그래야 수학여행으로 인정될 정도였다. 평양 사람은 박치기를 잘했다. 경평 축구대회를 할 때면 으레 패싸움을 하고 헤어졌다. 그만큼 평양 사람은 서울 사람과 대결 의식이 가득했다. 서울 사람을 ‘이조’의 후예라고 낮추어 본 반면, 평양 사람 자신들은 ‘고(구)려’의 후예라고 자긍심이 컸다. 특히 평양 지식인 사이에서 서울 말투로 ‘그랬어요’ 하면 경박하다고 보았다. ‘그랬쇠다’라는 식으로 평양 말투를 써야 품위 있다고 보았다. 남의 집을 방문할 때 서울 식으로 ‘이리 오너라’ 했다가는 큰일 난다. 어떻게 남의 집에 가서 ‘이리 오너라’라고 큰소리칠 수 있는가. 아무리 조선시대 양반가의 풍습이라 해도 평양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을 하인 대하듯 하는 어투는 금기였다. ‘이리 오너라’가 아니라 ‘계십니까’가 맞는 어투였다. 그런 평양의 자긍심과 진취적 의식이 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하게 한 토양이라고 생각한다.”

구술·집필 윤범모/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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