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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내 약혼식 주례는 조만식 장로…결혼식은 주기철 목사 집도”

등록 2017-04-06 01:57수정 2018-03-29 15:53

【길을 찾아서】 ⑬ 평양은 기독교 문화의 요람

김병기가 태어난 1910년대 평양은 기독교 부흥운동의 진원지였다. 1893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모펫(마포삼열)이 개척한 장대현교회를 시초로 산정현교회, 남문밖예배당 등 수많은 예배당이 자리했다. 사진은 1905~9년 길선주 목사의 새벽기도운동으로 시작된 평양대부흥운동 때 장대현교회 앞에 운집한 교인들. 사진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김병기가 태어난 1910년대 평양은 기독교 부흥운동의 진원지였다. 1893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모펫(마포삼열)이 개척한 장대현교회를 시초로 산정현교회, 남문밖예배당 등 수많은 예배당이 자리했다. 사진은 1905~9년 길선주 목사의 새벽기도운동으로 시작된 평양대부흥운동 때 장대현교회 앞에 운집한 교인들. 사진 한국교회사연구소 제공

평양은 20세기 초 한국 기독교 문화의 요람이었다. 특히 장로교회가 활발했다. 일제강점기라는 암흑의 시대에 복음을 전달하면서 민족정신을 곧추세운 곳, 바로 평양이었다. 그래서일까, 평양은 수많은 기독교 중요 인물을 배출했다. 특히 장로교의 본거지로 자리매김되었다. 장로교회가 10개라면, 감리교회는 2개 정도의 비율이었다. 그 무렵 장로교는 교회를 세우고 영혼 구제에 주력했다면, 감리교는 학교와 병원을 세우면서 선교 활동에 주력했다. 화가 김병기는 어려서부터 어머니 품에 안겨 교회에서 살았다. 기독교 문화와 자연스럽게 익숙해졌다. 다음은 화가의 증언이다.

대동강은 평양 시내의 동쪽에서 와서 남북으로 흐르고 있다. 아주 아름답고 풍만한 강이다. 시내의 산에는 고개(峴)마다 예배당이 있다. 제일 먼저 있는 고개가 장대현이고, 거기에 장대현교회가 있다. 그다음 산정현교회가 있는데, 장대현과 산정현은 장로교회다. 남산현교회와 시내의 중앙교회 정도만 감리교였다. 일제시대인데도 평양에는 선교사 마을인 양촌도 있었고, 이른 시기부터 신학교가 들어섰다.

1920년대 평양 장로교의 중심으로 자리한 산정현교회는 1940년 담임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 거부로 옥중 순교하면서 한국기독교사의 성지가 됐다. 사진은 1937년 1월 산정현교회 제직들 모습으로, 앞줄 왼쪽부터 조만식·김동원·박정익 장로, 주기철 목사, 유계준·김봉순·오윤선·김찬두 장로이고, 둘째 줄 오른쪽 넷째가 김동원의 부인이자 김병기의 장모, 다섯째가 주 목사의 사모 오정모 등이다.
1920년대 평양 장로교의 중심으로 자리한 산정현교회는 1940년 담임 주기철 목사가 신사참배 거부로 옥중 순교하면서 한국기독교사의 성지가 됐다. 사진은 1937년 1월 산정현교회 제직들 모습으로, 앞줄 왼쪽부터 조만식·김동원·박정익 장로, 주기철 목사, 유계준·김봉순·오윤선·김찬두 장로이고, 둘째 줄 오른쪽 넷째가 김동원의 부인이자 김병기의 장모, 다섯째가 주 목사의 사모 오정모 등이다.

산정현교회에는 ‘3대 장로’가 유명했다. 조만식·오윤선 그리고 장인어른인 김동원이다. 이들은 평양의 유지로 상징적 인물이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은 민족의 스승으로 거목이었고, 장인은 국회 초대 부의장을 지냈다. 내 친구 극작가 오영진의 부친이기도 한 오윤선은 평양에서 포목상 등 사업을 크게 했다. 그는 조만식의 비서 노릇도 했다. 김동원과 오윤선은 실업인으로 조선물산장려운동 같은 데에도 관심이 컸다. 특히 김동원은 기업인의 대표였다. 그는 고무공장과 석유회사도 운영했다. 그는 조만식하고 동료이면서, 도산 안창호의 수제자 노릇을 했다. 평양에는 도산과 고당이라는 거목이 나란히 있었다. 고당은 평양 시내, 도산은 강서 출신이다. 강서는 평양과 진남포의 중간에 있다. 강서의 강이 넓어지고 밀물 때 바닷물이 대동강까지 올라오면서 평양이 생긴 것이다. 모란봉 근처까지 큰 배가 들어올 수 있는 이유는 밀물 덕분이다. 일제 때 도산은 미국에 있었고, 국내에는 조만식이 있었다. 도산이 감옥 갔다 나왔을 때, 평양역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환영 인파가 너무나 많아 도산이 자동차 위에 올라가서 인사말을 할 정도였다.

평양의 중요한 일은 산정현교회에서 일어났다. 신사참배 반대 운동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주기철 목사가 담임이던 시절이었다. 그는 경남 창원 출신으로 정주 오산학교를 거쳐 평양의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마산 등지에서 목회 활동을 하다 1936년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조만식과 김동원 장로가 모셔 온 것이다. 1940년 주기철 목사는 일제의 신사참배 ‘명령’을 거부했다. 민족정신과 하나님 정신에 따른 신사참배 반대는 목사직 파면과 더불어 교회 폐쇄를 불러왔다. 5년간 감옥생활을 해야 했던 주 목사는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그래서 순교자로 추앙받고 있다. 널리 알려진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가 바로 주기철 목사를 찬양한 것이다.

20세기초 평양시내 고개마다 교회 우뚝
산정현교회 조만식·김동원·오윤선 삼총사
1940년 주기철 목사 신사참배 거부로 순교
“1939년 결혼땐 그렇게 큰인물인 줄 몰라”

장인 김동원 별채 김재준 목사 사택으로
‘보수 대부’ 한경직 목사 유학비도 지원

어머니 따라 남문밖예배당서 살다시피
아동극 ‘화가’ 배역·중학교때 야학교사도
평양 출신 예술인 목사 자손들 유독 많아

길림 손정도 목사가족 김일성 옥바라지 인연
둘째아들 손원태와 어릴적 같이 놀던 친구
“91년 평양 초청해 금시계 선물 등 대접”

우리 약혼식 주례는 조만식 선생이 했고, 결혼식 주례는 주기철 목사가 했다. 1939년 결혼식을 올릴 때만 해도 주 목사가 그렇게 큰 인물인 줄 몰랐다. 훗날 주 목사께서 주례를 해주었다니까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영광 중에도 영광인 셈이다. 김찬영-김동원 두 가문의 위상에 맞추느라 우리 결혼식은 교회 대신 평양에서 제일 큰 공회당에서 했다. 그만큼 양가의 하객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미국 유학파 신학자로 촉망받았던 송창근(왼쪽)·김재준(오른쪽) 목사도 1930년대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을 잇달아 맡았다. 사진은 1927~8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시절 함께 찍은 모습이다.
미국 유학파 신학자로 촉망받았던 송창근(왼쪽)·김재준(오른쪽) 목사도 1930년대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을 잇달아 맡았다. 사진은 1927~8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시절 함께 찍은 모습이다.
산정현교회에 주기철 목사가 취임하기 이전 함경도에서 온 청년 목사가 있었다. 장인이 그의 거처로 자택 정원 남쪽의 별채를 내주었다. 그가 바로 김재준 목사로, 1960~70년대 민주화운동 진영에서 진보적 인사로 빛나는 활동을 했다. 주기철 취임 이후에는 부목사로 활동했을 것이다. 한국신학대학을 김재준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진보적 목사로는 김재준 전임이었던 송창근 목사도 생각난다. 송 목사는 어머니를 만나러 우리 집에도 왔다. 어머니는 남문밖교회의 집사였다. 장인은 한경직 목사의 미국 유학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평양은 한경직 목사 같은 보수적 인사부터 송창근·김재준 목사 같은 진보적 인사를 두루 아우른 폭넓은 교회의 도시였다.

장대현교회의 담임은 길선주 목사다. 바로 나와 도쿄 유학 시절 어울렸던 화가 길진섭의 아버지다. 길진경이 맏아들이고 작은아들이 길진섭이다. 길선주 목사는 시력이 좋지 않았다. 맹인(시각장애인)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성서를 다 외웠다. 105인 사건으로 수난 당했고,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하나로 참가했다. 그만큼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분이다. 그는 평양장로교회신학교 제1회 출신으로 한국인 최초의 목사 7인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평양 대부흥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고,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새벽기도회를 처음 시행한 분이다.

평양 널다리골에 자리한 국내 첫 장로교회인 장대현교회는 보기 드문 한옥 양식에 남녀 신도 출입구가 구분된 독특한 구조로 유명했다. 사진은 1903년 72칸짜리 기와집으로 준공을 앞둘 무렵 전경이다.
평양 널다리골에 자리한 국내 첫 장로교회인 장대현교회는 보기 드문 한옥 양식에 남녀 신도 출입구가 구분된 독특한 구조로 유명했다. 사진은 1903년 72칸짜리 기와집으로 준공을 앞둘 무렵 전경이다.

20세기 초 평양 시내에는 높은 고개마다 교회가 자리해 한때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10%에 이를 정도로 번성했다. 사진 오른쪽으로 감리교 중심 교회였던 남산현교회의 뾰족한 양식 지붕이 보인다.
20세기 초 평양 시내에는 높은 고개마다 교회가 자리해 한때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10%에 이를 정도로 번성했다. 사진 오른쪽으로 감리교 중심 교회였던 남산현교회의 뾰족한 양식 지붕이 보인다.

평양 교회 가운데 완전 한옥은 장대현 예배당뿐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건물 구조가 기역자였다는 점이다. 남녀의 출입구가 달라 서로 바라볼 수 없는 구조였다. 목사님만 꺾어진 가운데 자리에서 설교하고 양쪽의 남녀를 볼 수 있었다. 다른 교회는 모두 양옥이었다. 남산현 예배당은 서울 정동교회 같은 양옥이었다. 1924년부터 오기선 목사가 담임했는데, 그의 아들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오천석이다. 이승만 정권은 기독교인과 북한 출신들을 많이 기용했다. 이승만 자신이 감리교 사람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서 살았다. 다양한 교회 활동 등 장로교의 여러 문화를 체험했다. 남문밖 예배당에서도 야학을 운영했는데 나는 중학교 1학년 때 나보다 훨씬 나이 많은 처녀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쓰고 밤에는 한글을 가르쳤다. 내가 광성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간 것은 어머니 뜻이었다. 광성은 감리교 계통의 학교로 부잣집 아이들이 많이 갔고, 평양고보는 공부를 잘해 관직을 꿈꾸며 출세하려는 시골 아이들이 많이 갔다. 숭실학교는 장로교 계통으로 더 기독교적이었다. 숭실 교내에 훌륭한 강당이 있어 대형 부흥회를 열었다. 미국인 윤산온 박사가 교장으로 있었다. 광성학교에도 멋진 강당이 있었다. 김득수 교장이 시카고에서 건축을 전공한 분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스테인드글라스까지 있는 강당에서 많은 집회를 열었다. 고교 시절 영국에서 신학을 전공한 한 맹인이 일본어로 강연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는 셸리의 영시를 외우면서,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상기시켰다. ‘이프 윈터 컴스 와이 스프링 낫 소 파?’, 겨울이 오면 어찌 봄이 멀겠는가. 이는 내 일생을 통하여 항상 새기고 다니는 시구절이 되었다.

매년 크리스마스이브 때가 되면 찬양대가 집집마다 다니면서 축가를 불렀다. 찬양대는 늘 우리 집을 제일 마지막으로 들렀다. 우리 집에서는 러시아식 커다란 주전자인 ‘서모알’(사모바르)로 영국제 립턴 홍차를 끓여 카스텔라와 함께 대접했다. 어머니는 십여명의 찬양대를 정성으로 대접했다. 교회에서 아동극을 할 때 내가 화가 밀레 역으로 무대에 오른 적도 있다. 평양은 교회가 많은 덕분에 음악도 발전했다. 우리나라의 서양 음악은 교회에서 시작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가톨릭은 그림을, 신교는 음악을 했다. 가톨릭은 희랍인들의 습성에 따라 조각을 만들었다. 조각을 모시게 되니 신전이 되었다. 희랍 미술이라는 것이 집 짓고 모신 것, 그게 신전이다. 그런 전통 때문에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서 전도할 수 있었다. 베드로와 바울이 예수교를 희랍인들에게 전달한 첫 전도사다. 희랍인들에게는 독특한 습성이 있었다. 자기 자신의 조각도 만들고, 자기 조상도 만드는 것이다. 사실 유대교에서 형상(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한다. 그러니까 가톨릭은 그림을 하고, 기독교는 음악을 한다.

1907년 평양대부흥의 물꼬를 튼 길선주(갓쓴이) 목사는 한국인 최초 장로교 목사 7인 가운데 한명이다. 1902년 황해도·평안도 도조사 시절 가족사진으로 앞줄 가운데 남자 아이가 훗날 화가로 김병기와 절친했던 둘째아들 길진섭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의 물꼬를 튼 길선주(갓쓴이) 목사는 한국인 최초 장로교 목사 7인 가운데 한명이다. 1902년 황해도·평안도 도조사 시절 가족사진으로 앞줄 가운데 남자 아이가 훗날 화가로 김병기와 절친했던 둘째아들 길진섭이다.
한국 현대음악은 교회음악으로 출발해 북에서 남으로 퍼졌다고 본다. 평양 출신 음악가만 해도 바이올리니스트 계정식, 성악가 김천애, 작곡가 김동진 등이 있다. 평양의 기독교 가정 출신 가운데 문학 예술가들도 많이 나왔다. 길진섭과 마찬가지로, 김동진도 목사 아들이었고, 시·소설·희곡 등 각각 작가로 이름난 주요한·주요섭·주영섭, 이들 3형제의 부친도 유명한 주공삼 목사였다. 주영섭은 고리키의 <밤주막>을 연출한 연극인이었다. 오윤선 장로의 아들인 오영진은 경성제대 출신으로 뮤지컬 <시집가는 날>을 썼다. 처음에는 일본어로 <맹진사댁 경사>로 발표했는데, 어느 나라 오페라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명작이다. 오영진은 내 사촌형의 딸과 결혼해 나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순교자>의 작가 김은국도 남문밖교회 이학봉 목사의 외손자이자 김찬도 목사의 아들이다. 목사 자손이라고 해 모두 훌륭한 것만도 아니다. 목사와 장로 아들 가운데 일본 여성과 사귀거나 결혼한 이들도 적지 않다.

평양 기독교계는 일제강점기 도산 안창호(왼쪽)의 흥사단운동에도 중심으로 참여했다. 사진은 1920년 도산의 생일 기념으로 상하이 임시의정원 원장 손정도(오른쪽) 목사와 함께한 모습.
평양 기독교계는 일제강점기 도산 안창호(왼쪽)의 흥사단운동에도 중심으로 참여했다. 사진은 1920년 도산의 생일 기념으로 상하이 임시의정원 원장 손정도(오른쪽) 목사와 함께한 모습.

1930년대 만주 길림 시절 손정도 목사는 기독교 집안이었던 김일성의 옥살이를 보살펴준 인연이 있었다. 김일성은 보답으로 1991년 미국 시민권자인 손 목사의 차남 원태씨 부부를 평양에 초대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30년대 만주 길림 시절 손정도 목사는 기독교 집안이었던 김일성의 옥살이를 보살펴준 인연이 있었다. 김일성은 보답으로 1991년 미국 시민권자인 손 목사의 차남 원태씨 부부를 평양에 초대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만주 길림교회를 만든 손정도 목사 집안과도 남다른 인연이 있다. 그는 원래 서울 정동교회 목사로 있다 북경을 거쳐 길림으로 갔다. 손 목사의 맏아들 원일은 해군을 영도한 제독이고, 작은아들은 내 친구이기도 한 원태이다. 해방 이후 같은 친목회원이었는데, 미국으로 이민 가 의사로 살았다. 그의 여동생 손인실은 의사 문병기의 부인으로,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YWCA) 회장을 지냈다. 1954년께 나는 서울대 교수라고는 했지만 전쟁 직후여서 너나없이 살림이 어려웠다. 손인실이 미국 대사관 문정관 부인들 대여섯명을 모아 내 미술 수업을 받도록 주선하고 통역까지 맡아 주었다. 훗날 뉴욕에서 살 때 그 부부와 인연을 이어가게 되었다. 뉴욕 허드슨강 북쪽 끝 태펀지 다리 옆에 한국 교회가 하나 있다. 내가 그곳에서 장로를 지냈는데, 부부를 그곳 교회로 인도했다. 손원태는 김일성의 친구이기도 했다. 어려서 ‘왕치기’ 놀이라고 왕 잡기 놀이를 같이 하고 놀았다고 했다. 김일성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손원태 가족 이야기를 자세히 소개했다. 김일성은 길림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손정도 목사의 큰 보살핌을 받아, 평생 생명의 은인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그의 가족과 지낸 일화도 소개했다. 원래 김일성 가문도 교회에 다녔다. 그 집안에 강양욱 목사가 있지 않은가. 1991년 김일성이 손원태를 평양으로 초청해 금시계를 선물하면서 후한 대접을 했다고 들었다.

구술·집필/윤범모 동국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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