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진의 시네마 즉설
위플래쉬
위플래쉬
요즘 <위플래쉬>가 화제다. 오랜만에 광역 배급과 블록버스터급 마케팅 돈질을 하지 않고도 관객 입소문에 기댄 완성도의 힘으로 흥행하는 영화를 보게 돼 호감이 간다. 지난주 칼럼에서 조원희 감독은 흥미롭게도 음악 영화의 탈을 쓴 무협 영화라는 관점에서 이 영화를 평했다. 그의 말은 파격적으로 보이는 이 영화가 장르 이야기 문법에 충실하고 드럼이라는 악기 특징을 영리하게 살린 대중영화라는 말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영화를 가르치는 필자는 그의 평 외에 뭔가 덧붙일 말이 있어 다시 펜을 들게 되었다. <위플래쉬>의 악마 같은 선생 플레처는 야심찬 제자 앤드루 니먼을 사납게 몰아붙인다. 그가 제일 혐오하는 말은 ‘잘했어’라는 칭찬이다. 그는 니먼을 집요하게 공격해 니먼의 몸과 마음을 너덜너덜하게 만드는데 이게 과연 납득할 만한 교육술인가 의문이 들었다.
<위플래쉬>는 휘몰아치는 클라이맥스의 감동을 통해 청출어람 결말을 내린다. 박력있는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스승 플레처의 영화적으로 매력적인 캐릭터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모습인가 헷갈린다. 이 영화에 관한 영화 주간지 <씨네21> 기고문에서 재즈 평론가 황덕호는 ‘예술가와 리더는 어느 정도 악마가 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데 나는 그의 글의 마지막 문장이 흥미로웠다. ‘앤드루 니먼은 플레처와 다른 유형의 밴드 리더가 될 수 있을까?’라고 그는 질문한다. 플레처 교수의 스승상에 혼란을 느낀다는 점에서 나도 황덕호와 비슷한 입장이다.
대학에서 내가 가르치는 영화 전공 학생들은 자기가 최고라는 환상과 남들에게 뒤처지면 어쩌나라는 불안감 사이에서 헤맨다. 밤새 쓴 시나리오가 교수의 낙점을 받지 못해도 그들은 끝까지 자기가 쓴 게 최고라고 우기거나 겉으론 수긍하는 척 자기 버전을 완강히 지키려 한다. 그들이 자기 것을 우기며 영화로 만들었을 때 대개 때는 이미 늦은 것으로 판명난다. 그들은 곧바로 자괴감에 시달리며 레벨업 단계로 가지 못한 채 방황하기 시작한다. 어떤 식으로든 학생의 완강한 자아는 깨어져야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지난 10년간 나는 몇 년간은 악마로, 몇 년간은 천사로 학생들을 대했는데 어느 쪽도 제대로 효과를 본 편은 아니다. 내 체험에 따른 결론은 모든 학생을 평등하게 대하면 그들 가운데 나를 스승으로 인정하는 학생은 저절로 나와 사제지간의 밀도 있는 교류를 나누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다. 플레처 교수처럼 굳이 악마의 탈을 쓰고 사납게 학생이나 후배를 몰아붙일 필요가 없다. 그렇더라도 이 영화에 담긴 인물들의 에너지는 놀라웠다. 그들은 그들의 거센 에너지 덕분에 위대해진다. 이렇게 쓰고 보니 수정해야겠다. 나는 누구에게라도 위대해지라고 다그칠 자격도 없을뿐더러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류 평론가로 살고 있는 것이지만.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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