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행훈 언론광장 공동대표
미디어 전망대
‘채동욱 검찰총장 사건’으로 드러난 한국 언론의 추한 모습이 반복되는 것을 보며 걱정이 많다. 이 사건은 한국 민주주의의 취약한 현황을 반영하는 부끄러운 사건인 동시에 권력 감시 기능을 망각하고 권력의 불법행위를 방조하는 ‘시녀’ 내지 ‘공범’으로 타락한 한국 언론의 맨얼굴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지난 대선 때 국정원이 저지른 대선 개입을 선거법 위반 행위로 기소한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결단으로 모처럼 검찰이 최고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법대로 사건을 처리하는 자세를 보여준 것 같아 검찰 독립에 대한 기대를 걸어봤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사실이 드러나면서 교수, 대학생, 가톨릭 사제, 불교 승려, 시민단체들의 촛불시위와 시국선언이 이어지자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채 전 총장의 존재가 정권 불안 요인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임기가 법으로 보장된 검찰총장을 밀어내는 일이 쉽지가 않자 혼외 아들이 있다는 소문을 퍼뜨려 그를 찍어낼 음모를 궁리했을 수 있다. 이런 음흉한 작전에는 바람잡이가 필요하다. 그 바람잡이로 고른 것이 조선일보라는 게 언론계에서 떠도는 시나리오다.
채 전 총장이 혼외 아들이 있다는 것을 강하게 부인하는 데다 의심갈 만한 행적을 찾지 못했지만, 권력 내부에서는 조선일보를 통해 혼외 아들 설을 밀고 나가기로 했을 수 있다. 언론은 보도에 대해서 책임을 잘 지지 않는다. 그 때문에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지만 무책임을 특권으로 오해하는 무책임한 언론인이 적지 않은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세계적인 현상이다. 물론 이런 언론은 독자의 신뢰를 잃기 마련이다. 조선일보가 신뢰를 중시하는 신문이라면 빠져서는 안 될 유혹이었다.
채 전 총장이 혼외 아들 보도를 부인하자 법무부는 검찰총장에 대한 감찰을 실시하겠다고 공표한다. 채 전 총장의 자존심을 자극하기 위해서다. 결국 채 전 총장은 사의를 표명한다. ‘혼외 아들’ 때문이 아니라 법무부의 감찰 공표 때문이었다. 검찰총장의 체면에 손상을 입혀 사표를 내지 않을 수 없게 만들려는 비겁한 꼼수였다.
사퇴는 했지만 채 전 총장이 도덕적인 흠을 입지 않고 물러나는 것이 불만이었던지, 총장 퇴임식 날 조선일보 계열의 <티브이조선>은 혼외 아들의 보모라는 이의 인터뷰를 방송했다. 보모는 방송에서 채 전 총장이 ‘혼외 아들’의 아버지가 틀림없으며 그를 여러 번 만난 일도 있고, 자신의 아들을 잘 보살펴줘 고맙다며 친필로 쓴 연하장까지 받았다고 말했다. 티브이조선은 카드에 쓴 필적이 감정 결과 채 전 총장 것과 아주 흡사하다고 강조했다. 채 전 총장은 방송 내용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그런데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한국방송>(KBS)이 밤 9시 뉴스 머리기사로 티브이조선 방송을 ‘재방송’한 것이다. 공영방송이 신뢰도가 낮은 타사 종편 방송 내용을 머리기사로 보도하는 것은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이다. 보도국 기자들이 반대했는데도 머리기사로 보도했다는 것이다.
높은 데서 좋아할 것으로 판단한 것일까? 한국방송이 정부의 눈치에 민감하다는 것을 반영하는 행동인 것 같다. 박근혜 정부의 방송 정책 방향을 시사하는 한 단면이다.
조선일보나 한국방송의 보도를 통해 채 전 총장 사건은 한국 언론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명박 정권의 언론 정책이 박근혜 정부에서도 그대로 답습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한국의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의 현주소다.
장행훈 언론광장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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