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신진욱 교수·한병철 교수
[한겨레 창간 24돌 특집] 탈출! 피로사회
한병철·신진욱 교수 피로사회를 논하다
한병철·신진욱 교수 피로사회를 논하다
독일 베를린 현지시각으로 지난 3일 오후, 베를린자유대 방문교수로 독일에 체류하고 있는 사회학자 신진욱 중앙대 교수가 때맞춰 같은 시기에 베를린을 방문한 <피로사회>의 지은이 한병철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 교수를 만났다. <한겨레>의 요청으로 이뤄진 이 만남에서 두 학자는 ‘피로사회’ 담론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내보였다. 한 교수가 피로사회는 ‘자기를 착취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착취하는 타인’이 없다고 강조한 반면, 이에 비판적인 질문을 던진 신 교수는 ‘자기착취’ 역시 본질적으로는 ‘타인에 의한 착취’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적했다. 한주연 <한겨레> 베를린 통신원이 두 학자의 대담을 진행했다.
‘넌 할 수 있다’는 정언이 지배
스스로 성과 못내면 자책뿐
시스템에 대한 저항 불가능 권력자에 의한 고통도 있다
착취에 저항 못하는 다수가
현실에 적응한 결과는 아닐지… 신진욱(이하 신) 한 교수의 저작 <피로사회>는 2010년 독일에 이어 2012년 한국에서도 많은 독자들과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독일 사회에서는 <피로사회>의 어떤 메시지를 어떤 맥락에서 특별히 의미있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하다. 한병철(이하 한) <피로사회> 출간 당시 독일에서는 저항하는 시민들, 이른바 ‘분노의 시민’이 부상했고, <앞으로 올 저항> <분노하라> 등 사회비판서들이 속속 출간됐다. 그런데 나는 <피로사회>에서 “우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혁명을 끌어낼 수 있는 분노’는 없다”고 썼다. 분노란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전체를 바꾸려는 충동인데, 우리 사회에선 진정한 분노가 없다고 본 것이다. 독일 사회에서는 이 때문에 논쟁이 붙었다. 신자유주의는 한편으론 자유를 주지만 종국에는 자기를 착취하는 폭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독일인이나 한국인들도 모두 깨닫게 됐다. 신 ‘피로사회’라는 단어는 피곤에 찌들어 있고 지쳐 있고 이 사회가 참으로 피로한 사회, 피로하게 만드는 사회라는 생각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맥락에서 즉각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단지 이런 일상적 체험을 확인하는 수준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교수께서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철학적 메시지는 무엇인가? 한 현대사회의 심리는 모든 게 나르시시즘적이고 이 때문에 우울증이 생긴다. 타자라는 범주가 희박해지면서 적이 없어졌다. 지금 집필중인 <에로스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나는 타인이 없어지면 적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도 사라지고 사랑의 대상도 사라진다고 썼다. 형태 없는 ‘나’라는 갯벌을 헤매고 살고 있기 때문에 나와 구별되는 진정한 타자도 없고, 타자를 사랑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요즘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둘이서 하는 나르시시즘, 곧 이중적 나르시시즘일 뿐이다. 타인은 나의 소비 대상일 뿐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경쟁의 대상은 나 자신일 뿐이다. 내가 나를 이길 수 없으니까 그것은 결국 죽음이 된다.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가 그렇다. 실업자들도 그런 분위기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최고경영자뿐 아니라 실업자도 자신을 소진하는 병에 걸린다. 사람들은 자유라는 미끼에 걸려 희생물이 된다. 자유가 결국 죽음과 폭력으로 변하게 되는 자본주의의 간계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보여주듯, 유럽의 역사는 자유를 동경하고 추구했다. 프랑스혁명의 핵심이 바로 자유 아닌가. 그런데 주인에게서 해방된 노예가 자유롭지 못하다. 해방된 노예가 자신의 주인이자 노예가 되면서 자신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 한 교수는 이 시대를 ‘신경증적 폭력의 시대’로 진단하면서 현대사회가 “그 자체로는 고통이 없이 스스로를 착취하는 특징이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피로사회를 사는 현대인들은 너나없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이들의 고통은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보는가?
한 피로하다는 것은 갈등이 아니다. 피로에는 ‘나-피로’와 ‘우리-피로’가 있다고 본다. 나-피로는 모든 걸 나에게 끌어들이는 과잉된 자기무장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내가 품고 있던 내면의 폭탄이 터진다. 이것이 바로 ‘소진’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자기무장을 철거하는 상태의 피로함이 있다. 자기를 철거하는 순간 타자와 다른 곳이 보인다. 이런 상태로부터 영감을 얻을 수 있다. <피로사회>에서 나는 자기를 무장해제시키는 피로가 가능하고, 이를 통해 다른 방식의 삶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기존의 ‘규율사회’에서는 지배자가 “너는 해야만 돼”라며 피지배자를 착취함으로써 고통을 안겨줬다. 이에 대해 피지배자들은 연대를 통해 지배자를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 사회, 또는 ‘성과사회’에서는 “너는 할 수 있다”는 정언이 지배한다. 이 시스템에는 지배자가 없다. 이 때문에 시스템에 책임을 전가할 수가 없고, 내가 해내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 책임 전가를 할 뿐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가 형성될 수가 없고 시스템에 대한 저항이나 혁명이 불가능하다.
신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사회체제와 제도, 또 힘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성과와 업적을 강조하는 측면도 있다. 말하자면 타인에 의한 고통, 특히 사람들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는 타인들에 의한 고통도 있지 않은가? ‘자기착취’로 보이는 현상이 실은 착취자와 착취사회에 저항할 수 없는 대다수 사람들이 현실에 적응한 결과는 아닌가?
한 소진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오히려 권력이나 돈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더 많다. 곧 무능력의 결과가 아니라, 무력감에서 빠져나오려는 시도의 결과다. 타인착취 시대의 착취자는 자기착취 시대의 착취자와 다르다. 피로사회, 성과사회에는 우리가 제거할 수 있는 자본가와 같은 타인착취자가 없다. 자본가 스스로 자기착취를 하기 때문이다. ‘착취자와 대다수의 사람’으로 구분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발상인데, 여기에서 벗어나야 피로사회의 새로운 현상과 문제를 볼 수 있다. 가난한 서민들이 자기착취를 하는 것은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자유롭기 때문에 자신을 착취하는 것이다.
신 ‘정의론’에서 ‘성과 정의’는 분배 정의의 중요한 한 차원으로 이해되어 왔다. 특히 사회민주주의 전통에서 노동, 성과, 기여에 대한 정당한 보상은 ‘사회적 정의’의 중요한 측면이었고, 이는 자유주의 정의론이 주로 ‘기회의 정의’에 집중해온 것과는 구분됐다. 오늘날 사회 현실에 대한 주된 비판 가운데 하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노동에 상응하는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반면 극소수의 사람들이 사회의 대부분의 자원을 가져간다는 것 아닌가? 이른바 ‘20 대 80 사회’ ‘1% 대 99%’ ‘승자독식 사회’ 등의 규정들은 그런 분배 정의의 훼손을 가리키고 있다. 한 교수의 성과사회 비판은 이런 분배 정의의 문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가?
한 나의 피로사회 담론은 정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 피로사회의 희생자는 분배를 못 받은 서민만이 아니라 수입이 많은 매니저, 교수들이다. 적은 양의 파이를 차지하는 대다수만이 아니라 가장 많은 양의 파이를 차지하는 소수도 희생자다. 신 교수는 분배를 적게 받는 사람들을 희생자로 보지만, 나의 피로사회 담론에서는 분배를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조차 자신을 착취한다. 마르크스주의적인 범주를 가지곤 내가 말하는 피로사회를 이해하기 힘들다.
한 “자기성찰이 중요” …신 “분노하는 사람들의 연대 확산”
자기착취 감내하는 이유로
잉여인간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짚을 수 있을텐데… 실직 아닌 성취 압박감 때문
분배를 많이 받은 경영인도
자기착취로 소진해 쓰러져 신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는 미국의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은행자본과 정치권력의 결탁에 저항하는 행동들이 확산되는 모습을 보고 있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유럽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렸고, 남유럽과 남미에서는 스스로를 ‘분노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시민들이 소셜네트워크 등을 매개로 연대하고 행동한다. 이들은 ‘착취’와 ‘분노’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한 교수는 피로사회에 대해 ‘긍정성의 과잉’을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이런 현상들은 성과사회, 성과주체 안에 어떤 적대나 균열, 부정성이 감춰져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 교수의 관점에서 이런 사회현상들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한 내가 말하는 피로사회는 아랍이나 남미 사회가 아니다. 이런 사회는 아직 규율사회라고 본다. 내가 말하는 피로사회는 서구 사회다.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은 주변부의 현상이다. 모든 사람들이 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를 뒤흔들 수 있는 별다른 힘이 없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금융시장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 전체, 곧 시스템 자체가 개인을 고립시킨다. 우리 사회는 이미 ‘너는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가 아니라 ‘너는 너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쪽으로 변했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이들이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게 만들고, 이 시스템은 저항을 없애버린다. 시스템을 바라봐야 하는데, 각자의 시선은 내면으로 향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신 한 교수는 푸코가 말했던 ‘훈육사회’는 과거 시대의 일이고, 오늘날 성과사회에서는 주체들이 스스로를 노예로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한 교수가 말하는 바는 다름 아닌 푸코가 ‘자유 속의 지배’라고 불렀던 자기훈육이 아닌가? 푸코와 그로부터 영감을 받은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처럼 자기훈육을 하는 주체를 만들어내는 사회의 권력기술과 장치들이었다. 성취와 성공, 능력 있는 인간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우리 사회의 담론들, 소수의 승자에게 거대한 보상을 내리고 저항하는 주체들을 ‘실패한’ 주체로 낙인찍은 선택과 배제의 제도들, 또 이런 제도들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있는 집단들, 이런 사회적 차원들을 염두에 둔다면 ‘자기착취의 주체’는 주체를 길들이는 ‘훈육사회’의 결과물이 아닌가? 한 자기훈육에서는 ‘너는 해야 돼’라는 정언이 통하지만, 피로사회는 ‘너는 할 수 있어’라는 동기부여와 자기최적화로 특징지을 수 있다. 처음엔 희열을 느끼지만 나중엔 폭력과 강요로 변하는 것이다. 푸코의 ‘자기훈육’ 사회에서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하지만 피로사회의 자기착취는 성형수술에 비유할 수 있다. 성과에 희열을 느끼고 더 많이 하다가 쓰러지고 만다. 성격이 다르다. 보상을 받는 승자 역시 결국엔 쓰러진다. 승자와 패자의 도그마적 도식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신 한 교수는 ‘피로사회’를 ‘노동사회’라고도 본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 사이 사회과학자들은 ‘노동사회의 종언’에 대한 성찰을 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주로 탈산업사회로의 이행, 생산의 자동화, 완전고용의 불가능성, 구조적 실업 등이었고, 거기서 문제는 ‘노동’이라기보다 ‘노동할 수 없음’이었다. 이렇게 보자면, 사람들이 자기착취를 감내하는 이유로 ‘노동할 수 없는 위치로 떨어지는 데 대한 두려움’을 짚을 수도 있다고 본다. 노동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리처드 세넷이 말한 ‘쓸모없는 인간’, 또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잉여인간’처럼 일체의 사회적 인정을 박탈당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한 성과사회에서는 나를 칭찬해주는 존재가 없다. 보람을 줄 수 있는 타자가 없기 때문에 내가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긴다. 더 많이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일자리를 잃는 공포에서 오는 게 아니다. 독일에서는 몇 년 전 국가대표 축구 골키퍼였던 로베르트 엥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많은 성과를 이미 이룬 사람으로서, 그가 자기착취를 한 건 실업의 공포 때문이 아니라 성취감 때문이었다. 슬라보이 지제크도 자기착취를 하는 사람이다. 그도 책을 못 쓰면 불안해하고 압박감에 시달린다고 한다. 실업의 공포 때문에 그런 압박감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다. 성과 자체에서 나오는 압박감이다.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잉여인간만이 ‘호모 사케르’(버림받은 인간)가 아니라, 성과사회의 모든 주체가 호모 사케르다. 경영인들은 배제의 대상이 아닌데도 소진상태가 되어 쓰러지지 않는가? 신 ‘성과’라는 원리 자체에 대해 말해보자. 성과 원리는 전통사회의 ‘귀속 원리’와 대비되는 현대사회의 제도적 원리이자, 가치체계의 중요한 요소였다. 전통사회에서는 ‘당신 신분이 뭐냐?’, 곧 귀속(ascription)이 중요했다면, 현대사회에서는 ‘당신은 얼마나 성취했느냐?’, 곧 성취(achievement)가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능력주의의 원리는 오늘날 사회제도와 현대인들의 의식 세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서, 성과 원리 자체를 문제삼는 건 현대성의 근본적인 원리를 건드리는 일이 될 것이다. 성과 원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 귀속 원리가 통하던 시대처럼 어떤 신분으로 태어나는 건 아주 편한 일이다. 태어나 신분과 직업이 정해져 있는 고향에서 살다 죽고, 나무처럼 죽을 때까지 한자리에만 있는 게 단지 ‘부자유’인 것은 아니다. 그게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다. 자유라는 말의 독일어 어원을 따라가 보면, 그 뜻은 ‘친구와 같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편하고 즐겁게 사는 게 자유다. 곧 모두가 나한테 손을 뗀 상태가 아니라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는 상태가 자유로운 상태다. 이를테면 부모님을 속박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아버지가 자식을 칭찬하면 자식은 기뻐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칭찬이 불가능한 사회에 살고 있다. 내가 무엇을 성취해도 칭찬해주는 사람이 없다. 내가 나를 칭찬할 수 없으니까 더 많은 것을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긴다. 아버지가 ‘너 잘했다, 그만해도 된다’고 이야기한다면 휴식이 가능한데, 이런 휴식을 줄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자유가 폭력으로 변하는 것이다. 신 현대인들의 피로는 사람들이 일하는 사회조직의 작업 속도, 그에 따르는 삶의 속도, 일상의 밀도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특히 한국에서도 최근 ‘슬로라이프’에 대한 관심이 높고, ‘느림’이나 ‘비움’에 대한 책들이 많이 읽힌다. 속도를 늦추는 것은 성과사회의 탈출구인가? ‘속도’와 ‘피로’는 어떻게 연결된다고 보는가? 한 가속화와 피로는 표면적으로는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 착취와 속도는 근본적인 관련이 없다고 본다. 느리게 자기착취를 하든 빠르게 자기착취를 하든 모두 자기착취다. 속도와 자기착취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나는 속도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 그렇지만 서로에게 속도를 요구하는 시간의 관계성, 또는 강자가 약자에게 속도를 요구하는 시간의 위계성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독일의 역사학자 페터 보르샤이트는 지난 세기 동안 사회의 가속화와 그것의 내면화가 진행된 것은 무엇보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더 빠른 속도를 요구하고 강화시킨 것과 관계가 있다고 봤다. 우리는 사무실에서 오늘 안으로 프로젝트를 완성하라고 닦달하는 상관에게 시달린 뒤, 야근 중에 배달시킨 짜장면을 늦게 가져왔다고 배달 청년을 닦달하지 않나? ‘느림’과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관계의 철학’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 피로사회에서는 나에게 소리를 지르는 상관도 자기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다. 상관이 자기 자신에게 소리 지르는 것을 보지 못하면 내 피로사회 담론을 이해하기 어렵다. 상관에게 시달리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시달리는 게 피로사회다. 상관에게 시달린다면, 그건 규율사회다. 신 한 교수는 20대에 한국을 떠나 독일에서 오랜 세월 생활했다. 한국과 독일 두 사회를 모두 깊이있게 경험했는데, 한국 사회의 피로와 독일 사회의 피로는 어떻게 다르다고 보는가? 또 두 사회는 자신의 고유한 피로를 치유하기 위해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한 유럽은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넘어가는 기간이 길었다. 반면 우리는 이 기간이 아주 짧다. 그래서 압박도 그만큼 더 크다. 유럽은 그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저항도 생길 수 있었다. 속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스템의 변경이 너무 빨리 이뤄졌기 때문에 비판적 목소리가 없었다. 독일은 시스템의 변화가 느리게 진행됐으므로 그에 대한 비판적 이론, 곧 시스템에 비판적인 저항의 사유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비판적 사유를 할 틈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가 만족한다면 <피로사회>와 같은 비판적 사유가 생겨날 이유가 없다. 한국 사회는 자신에 대한 ‘비판이론’을 더 깊게 사유해야 한다. 비판적 사유가 부족한 상태에서 갑자기 성과사회로 떨어졌다. 피로사회 담론을 통해 한국 사회가 비판적 사유를 펼치는 동기부여가 됐으면 좋겠다. 베를린/한주연 통신원 정리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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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성과 못내면 자책뿐
시스템에 대한 저항 불가능 권력자에 의한 고통도 있다
착취에 저항 못하는 다수가
현실에 적응한 결과는 아닐지… 신진욱(이하 신) 한 교수의 저작 <피로사회>는 2010년 독일에 이어 2012년 한국에서도 많은 독자들과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독일 사회에서는 <피로사회>의 어떤 메시지를 어떤 맥락에서 특별히 의미있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하다. 한병철(이하 한) <피로사회> 출간 당시 독일에서는 저항하는 시민들, 이른바 ‘분노의 시민’이 부상했고, <앞으로 올 저항> <분노하라> 등 사회비판서들이 속속 출간됐다. 그런데 나는 <피로사회>에서 “우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혁명을 끌어낼 수 있는 분노’는 없다”고 썼다. 분노란 전체를 대상으로 하고 전체를 바꾸려는 충동인데, 우리 사회에선 진정한 분노가 없다고 본 것이다. 독일 사회에서는 이 때문에 논쟁이 붙었다. 신자유주의는 한편으론 자유를 주지만 종국에는 자기를 착취하는 폭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독일인이나 한국인들도 모두 깨닫게 됐다. 신 ‘피로사회’라는 단어는 피곤에 찌들어 있고 지쳐 있고 이 사회가 참으로 피로한 사회, 피로하게 만드는 사회라는 생각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맥락에서 즉각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단지 이런 일상적 체험을 확인하는 수준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교수께서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철학적 메시지는 무엇인가? 한 현대사회의 심리는 모든 게 나르시시즘적이고 이 때문에 우울증이 생긴다. 타자라는 범주가 희박해지면서 적이 없어졌다. 지금 집필중인 <에로스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나는 타인이 없어지면 적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도 사라지고 사랑의 대상도 사라진다고 썼다. 형태 없는 ‘나’라는 갯벌을 헤매고 살고 있기 때문에 나와 구별되는 진정한 타자도 없고, 타자를 사랑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요즘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둘이서 하는 나르시시즘, 곧 이중적 나르시시즘일 뿐이다. 타인은 나의 소비 대상일 뿐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경쟁의 대상은 나 자신일 뿐이다. 내가 나를 이길 수 없으니까 그것은 결국 죽음이 된다.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가 그렇다. 실업자들도 그런 분위기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최고경영자뿐 아니라 실업자도 자신을 소진하는 병에 걸린다. 사람들은 자유라는 미끼에 걸려 희생물이 된다. 자유가 결국 죽음과 폭력으로 변하게 되는 자본주의의 간계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보여주듯, 유럽의 역사는 자유를 동경하고 추구했다. 프랑스혁명의 핵심이 바로 자유 아닌가. 그런데 주인에게서 해방된 노예가 자유롭지 못하다. 해방된 노예가 자신의 주인이자 노예가 되면서 자신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 한 교수는 이 시대를 ‘신경증적 폭력의 시대’로 진단하면서 현대사회가 “그 자체로는 고통이 없이 스스로를 착취하는 특징이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피로사회를 사는 현대인들은 너나없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이들의 고통은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보는가?
잉여인간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짚을 수 있을텐데… 실직 아닌 성취 압박감 때문
분배를 많이 받은 경영인도
자기착취로 소진해 쓰러져 신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는 미국의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은행자본과 정치권력의 결탁에 저항하는 행동들이 확산되는 모습을 보고 있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유럽에서 날개 돋친 듯 팔렸고, 남유럽과 남미에서는 스스로를 ‘분노하는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시민들이 소셜네트워크 등을 매개로 연대하고 행동한다. 이들은 ‘착취’와 ‘분노’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한 교수는 피로사회에 대해 ‘긍정성의 과잉’을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이런 현상들은 성과사회, 성과주체 안에 어떤 적대나 균열, 부정성이 감춰져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한 교수의 관점에서 이런 사회현상들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한 내가 말하는 피로사회는 아랍이나 남미 사회가 아니다. 이런 사회는 아직 규율사회라고 본다. 내가 말하는 피로사회는 서구 사회다.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은 주변부의 현상이다. 모든 사람들이 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사회를 뒤흔들 수 있는 별다른 힘이 없다. 우리 사회의 문제가 금융시장의 문제만은 아니다. 사회 전체, 곧 시스템 자체가 개인을 고립시킨다. 우리 사회는 이미 ‘너는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가 아니라 ‘너는 너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쪽으로 변했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이들이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게 만들고, 이 시스템은 저항을 없애버린다. 시스템을 바라봐야 하는데, 각자의 시선은 내면으로 향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신 한 교수는 푸코가 말했던 ‘훈육사회’는 과거 시대의 일이고, 오늘날 성과사회에서는 주체들이 스스로를 노예로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한 교수가 말하는 바는 다름 아닌 푸코가 ‘자유 속의 지배’라고 불렀던 자기훈육이 아닌가? 푸코와 그로부터 영감을 받은 많은 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처럼 자기훈육을 하는 주체를 만들어내는 사회의 권력기술과 장치들이었다. 성취와 성공, 능력 있는 인간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우리 사회의 담론들, 소수의 승자에게 거대한 보상을 내리고 저항하는 주체들을 ‘실패한’ 주체로 낙인찍은 선택과 배제의 제도들, 또 이런 제도들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있는 집단들, 이런 사회적 차원들을 염두에 둔다면 ‘자기착취의 주체’는 주체를 길들이는 ‘훈육사회’의 결과물이 아닌가? 한 자기훈육에서는 ‘너는 해야 돼’라는 정언이 통하지만, 피로사회는 ‘너는 할 수 있어’라는 동기부여와 자기최적화로 특징지을 수 있다. 처음엔 희열을 느끼지만 나중엔 폭력과 강요로 변하는 것이다. 푸코의 ‘자기훈육’ 사회에서는 하기 싫어도 해야 한다. 하지만 피로사회의 자기착취는 성형수술에 비유할 수 있다. 성과에 희열을 느끼고 더 많이 하다가 쓰러지고 만다. 성격이 다르다. 보상을 받는 승자 역시 결국엔 쓰러진다. 승자와 패자의 도그마적 도식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신 한 교수는 ‘피로사회’를 ‘노동사회’라고도 본다. 그런데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 사이 사회과학자들은 ‘노동사회의 종언’에 대한 성찰을 하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주로 탈산업사회로의 이행, 생산의 자동화, 완전고용의 불가능성, 구조적 실업 등이었고, 거기서 문제는 ‘노동’이라기보다 ‘노동할 수 없음’이었다. 이렇게 보자면, 사람들이 자기착취를 감내하는 이유로 ‘노동할 수 없는 위치로 떨어지는 데 대한 두려움’을 짚을 수도 있다고 본다. 노동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리처드 세넷이 말한 ‘쓸모없는 인간’, 또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잉여인간’처럼 일체의 사회적 인정을 박탈당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한 성과사회에서는 나를 칭찬해주는 존재가 없다. 보람을 줄 수 있는 타자가 없기 때문에 내가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긴다. 더 많이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일자리를 잃는 공포에서 오는 게 아니다. 독일에서는 몇 년 전 국가대표 축구 골키퍼였던 로베르트 엥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많은 성과를 이미 이룬 사람으로서, 그가 자기착취를 한 건 실업의 공포 때문이 아니라 성취감 때문이었다. 슬라보이 지제크도 자기착취를 하는 사람이다. 그도 책을 못 쓰면 불안해하고 압박감에 시달린다고 한다. 실업의 공포 때문에 그런 압박감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다. 성과 자체에서 나오는 압박감이다.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잉여인간만이 ‘호모 사케르’(버림받은 인간)가 아니라, 성과사회의 모든 주체가 호모 사케르다. 경영인들은 배제의 대상이 아닌데도 소진상태가 되어 쓰러지지 않는가? 신 ‘성과’라는 원리 자체에 대해 말해보자. 성과 원리는 전통사회의 ‘귀속 원리’와 대비되는 현대사회의 제도적 원리이자, 가치체계의 중요한 요소였다. 전통사회에서는 ‘당신 신분이 뭐냐?’, 곧 귀속(ascription)이 중요했다면, 현대사회에서는 ‘당신은 얼마나 성취했느냐?’, 곧 성취(achievement)가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능력주의의 원리는 오늘날 사회제도와 현대인들의 의식 세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서, 성과 원리 자체를 문제삼는 건 현대성의 근본적인 원리를 건드리는 일이 될 것이다. 성과 원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 귀속 원리가 통하던 시대처럼 어떤 신분으로 태어나는 건 아주 편한 일이다. 태어나 신분과 직업이 정해져 있는 고향에서 살다 죽고, 나무처럼 죽을 때까지 한자리에만 있는 게 단지 ‘부자유’인 것은 아니다. 그게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다. 자유라는 말의 독일어 어원을 따라가 보면, 그 뜻은 ‘친구와 같이 있다’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곳에서 편하고 즐겁게 사는 게 자유다. 곧 모두가 나한테 손을 뗀 상태가 아니라 누군가 내 손을 잡아주는 상태가 자유로운 상태다. 이를테면 부모님을 속박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아버지가 자식을 칭찬하면 자식은 기뻐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칭찬이 불가능한 사회에 살고 있다. 내가 무엇을 성취해도 칭찬해주는 사람이 없다. 내가 나를 칭찬할 수 없으니까 더 많은 것을 성취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긴다. 아버지가 ‘너 잘했다, 그만해도 된다’고 이야기한다면 휴식이 가능한데, 이런 휴식을 줄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자유가 폭력으로 변하는 것이다. 신 현대인들의 피로는 사람들이 일하는 사회조직의 작업 속도, 그에 따르는 삶의 속도, 일상의 밀도와 관련이 있을 것 같다. 특히 한국에서도 최근 ‘슬로라이프’에 대한 관심이 높고, ‘느림’이나 ‘비움’에 대한 책들이 많이 읽힌다. 속도를 늦추는 것은 성과사회의 탈출구인가? ‘속도’와 ‘피로’는 어떻게 연결된다고 보는가? 한 가속화와 피로는 표면적으로는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 착취와 속도는 근본적인 관련이 없다고 본다. 느리게 자기착취를 하든 빠르게 자기착취를 하든 모두 자기착취다. 속도와 자기착취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나는 속도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 그렇지만 서로에게 속도를 요구하는 시간의 관계성, 또는 강자가 약자에게 속도를 요구하는 시간의 위계성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독일의 역사학자 페터 보르샤이트는 지난 세기 동안 사회의 가속화와 그것의 내면화가 진행된 것은 무엇보다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더 빠른 속도를 요구하고 강화시킨 것과 관계가 있다고 봤다. 우리는 사무실에서 오늘 안으로 프로젝트를 완성하라고 닦달하는 상관에게 시달린 뒤, 야근 중에 배달시킨 짜장면을 늦게 가져왔다고 배달 청년을 닦달하지 않나? ‘느림’과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관계의 철학’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한 피로사회에서는 나에게 소리를 지르는 상관도 자기 자신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다. 상관이 자기 자신에게 소리 지르는 것을 보지 못하면 내 피로사회 담론을 이해하기 어렵다. 상관에게 시달리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시달리는 게 피로사회다. 상관에게 시달린다면, 그건 규율사회다. 신 한 교수는 20대에 한국을 떠나 독일에서 오랜 세월 생활했다. 한국과 독일 두 사회를 모두 깊이있게 경험했는데, 한국 사회의 피로와 독일 사회의 피로는 어떻게 다르다고 보는가? 또 두 사회는 자신의 고유한 피로를 치유하기 위해 상대방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가? 한 유럽은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넘어가는 기간이 길었다. 반면 우리는 이 기간이 아주 짧다. 그래서 압박도 그만큼 더 크다. 유럽은 그 기간이 길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저항도 생길 수 있었다. 속도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스템의 변경이 너무 빨리 이뤄졌기 때문에 비판적 목소리가 없었다. 독일은 시스템의 변화가 느리게 진행됐으므로 그에 대한 비판적 이론, 곧 시스템에 비판적인 저항의 사유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비판적 사유를 할 틈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가 만족한다면 <피로사회>와 같은 비판적 사유가 생겨날 이유가 없다. 한국 사회는 자신에 대한 ‘비판이론’을 더 깊게 사유해야 한다. 비판적 사유가 부족한 상태에서 갑자기 성과사회로 떨어졌다. 피로사회 담론을 통해 한국 사회가 비판적 사유를 펼치는 동기부여가 됐으면 좋겠다. 베를린/한주연 통신원 정리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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